‘그동안 여러 가지 원인으로 조선족 동포와 한국인, 한국사회간에는 미묘한 갈등과 불신의 벽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지만, 그래도 한국이란 고국이 있었기에 동포들은 국경을 나들며 꿈에 도전할 기회가 있었고 오늘날 중국 연해지구 전역에 진출해 새로운 삶의 터전을 다져갈 엄두를 내게 되었다고 여겨집니다.’
한국내 동포사회 ‘산 증인’으로 불리는 한중경제친선교류협회 김일남 상임이사(흑룡강 영안 출신)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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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중국동포 당진 한가위축제무대. |
중한수교 후 조선족은 여타 민족으로부터 선망의 눈길이 따르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에게 결코 화려한 장만이 펼쳐진 게 아니었다.
연변 화룡에서 왔다는 박모씨에 따르면 일찍 친지방문, 노무송출수속을 해준다는 브로커에 속아 3년간 도합 7만위안 밀어 넣었다 한다. 나중에 집을 팔고 친척의 돈을 꿔 밀항으로 목적을 달성, 경남 어느 시골의 농장에서 여러 해 ‘숨어 살다’ 자진신고 기회에 출국했다가 들어왔다고 한다. 지난 90년대 후반, 이처럼 가지가지 경로에 명목에 목숨을 건 밀항까지 택하여 5만-7만위안 지어 10만여만 위안을 대가를 치르고 나온 사람도 적지 않은 현실이며 불법체류자로 전전하다 보니 빚을 갚는 데만 2~3년이 걸린 사례가 적지 않다고 한다.
1996년 말,흑룡강성 연수,상지,목란 일대의 10여명은 어느 브로커의 알선으로 남방 연해도시항구를 거쳐 밀항한다고 가족에 전하고는 소식이 두절되었다. 한국에 있는 친척들도 일행의 소식을 여태 모르고 있으니 모두들 수중고혼이 되었다는 결론, 그동안 가족들은 가슴이 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