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8일 오후 필자와 유성훈 금천구청장을 포함한 방문단 일행이 절강성 항주(抗州) 공항에 내리니 소흥(紹興)시 관계자와 한중도시우호협회 상해 지회 류영춘 비서장 등이 마중을 나왔다. 차량으로 이동해 40여분 걸려 숙소 겸 행사장이 있는 소흥호텔에 도착했다. 소흥은 춘추시대 월(越)나라의 도읍지였다. 호텔은 소흥시 영빈관으로 옛 월나라 궁궐에 마주해 지어졌다. 마치 월나라 왕궁을 보는 듯한 고풍스런 외관이 인상적이었다. 호텔 건너 월나라 산성터에 자리잡은 찻집은 우리를 수천년을 거슬러 옛 월나라로 데려다 주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 왕궁터 옆 찻집에서 월왕 구천(鳩踐)이 서시(西施)의 춤을 보며 한잔 술을 들이키는 모습이 떠올랐다.
환영만찬에서 전통공연을 하는 중국 예술단
호텔에 여장을 풀고 소흥시 초청 환영 만찬에 참석했다. 이날 만찬은 소흥시 정부가 '제 6회 소흥 국제우호도시대회' 대표단을 환영하기 위해 마련한 것이다. 만찬장인 영빈관에는 20여개국 30여명의 대표들을 위한 자리가 마련돼 있었다. 절강(浙江) 특선 요리와 소흥 전통명주인 황주(黃酒)는 잘 어울렸다. 우즈베키스탄 대표인 바코로프 말리코비치 르네상스대학교 총장과 인사를 나누었다. 지난 2022년 북경대 국제지도자 과정을 함께 한 바크롬에 대해 얘기했더니 아주 잘 안다고 해서 더 반가웠다. 그는 르네상스대학교에도 한국인 교수가 2명 있다며 타슈켄트에 있는 르네상스대학교 방문을 요청했다.
제 6회 소흥 국제우호도시대회에 참석 중인 권기식 회장(왼쪽)
식전 행사로 소흥시 소년예술학교 학생들의 창작 공연과 이탈리아 아스티시 측이 준비한 '오솔레미오' 독창에 이어 '아름다운 옛 월나라(美哉古越)'이라는 중국 전통공연이 이어졌다. 마치 경극 배우들과 같은 복장을 한 수십명의 출연자들이 월극(越劇)과 소극(紹劇)을 융합해 연기했다. 월나라의 흥망을 표현한 공연은 보는 이들을 2500년전 월나라의 어느 밤으로 이끄는 듯 매혹적이었다. 오페라의 고장 이탈리아 아스티시 대표단도 공연에 환호했다. 아름다운 공연과 맛있는 요리가 어우러진 멋드러진 우호의 밤이었다. 소흥시 스후이팡(施惠芳) 서기, 우덩펀(吳登芬) 시장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우호를 위한 건배를 했다.
태극권을 시연하는 로봇
29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니 창밖에서 새들이 시끄럽게 합창을 했다. 조식 전에 월나라 궁성을 둘러봐야겠다는 생각에 부산(府山)공원에 올랐다. 이곳은 소흥시 서쪽에 자리한 성으로 해발 74미터 높이의 산에 월나라가 궁궐을 조성한 산성이다. 용이 누운 듯한 형상을 해서 와룡산(臥龍山)이라고 불렀다. 성 안에는 월왕대(越王臺)와 문종묘(文種墓) 등 유적들이 남아있다. 옛 성곽길을 따라 천천히 오르니 마치 한국의 행주산성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성황각에서 내려다본 서호 전경
먼저 문종묘를 찾았다. 문종은 토사구팽(兎死拘烹)'과 관련이 있는 인물이다. 그는 '와신상담(臥薪嘗膽-섶에 눞고 쓸개를 맛본다는 뜻으로 치욕이나 실패를 잊지 않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 고난을 견디며 노력하는 태도를 이르는 사자성어)'으로 잘 알려진 춘추시대 월왕 구천(鳩踐)의 신하였다. 월나라 대부였던 문종은 군사(軍師) 범려(范蠡)와 함께 구천을 도와 원수 오(吳)나라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10년의 계획을 세우고 중국 4대 미인으로 유명한 서시(西施)를 활용한 미인계(美人計)로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이후 범려는 문종에게 토사구팽을 언급하며 "구천의 사람됨이 교만해 결국 우리를 죽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함께 도망갈 것을 권유했으나 문종은 이 말을 따르지 않았다. 이후 범려는 혼자 월나라를 떠나 제(齊)나라에서 상업으로 큰 부를 축적하고 천수를 누렸다. 하지만 문종은 구천의 의심을 사 마침내 목숨을 잃었다. 구천은 월나라 왕이 되기 위해 문종을 리용했다. 그러나 월나라가 패권을 차지한 이후 문종이 필요 없어지자 죽인 것이다. 월산성(越山城) 기슭에 있는 문종의 무덤은 인간세계의 믿음과 배신에 대한 슬픈 이야기를 후대에 전하고 있다. 토사구팽은 수천년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이다. 충신을 죽인 구천과 충신의 이름을 남긴 문종 중 누가 력사의 승리자인가?
항주 림시정부 청사 기념관을 방문한 권기식 회장
문종의 무덤을 떠나 월왕대에 이르니 웅장한 건물앞에 옛 시골장터 같은 새벽장이 열렸다. 수천년 고사(古事) 앞에서도 인간은 먹고 살아야 하는 존재임이 새삼 느껴지는 곳이었다. 100여미터 남짓한 골목길은 새벽장을 보러온 사람들과 상인들로 붐볐다. 싱싱한 채소와 과일, 물고기 등을 사고파는 삶의 활기가 느껴졌다. 시장을 돌고 다시 월왕대로 오니 주민들이 우물에서 물을 긷고 있었다. 천년 이상된 우물인데 지금도 식수로 쓴다고 한다. 력사와 삶이 어우러진 모습에 처연한 느낌이 들었다.
서호 앞 항주 옛 거리
숙소로 돌아와 호텔 영빈관에서 열린 '제 6회 소흥 국제우호도시대회'에 참석했다. 소흥시는 나와 유성훈 청장, 정기명 여수시장 등을 주석단에 앉도록 배려했다. 대회는 오 시장의 환영사와 소흥시-아스티시 우호도시협약식, 도시 행정 및 경제 관련 특강 순으로 이어졌다. 행사 후 우리 일행은 소흥시 신개발구에 위치한 첨단 기업들을 방문했다. 로봇과 인공지능 회사들이었다.중국의 첨단산업 발전에 다들 놀라는 표정이었다. 특히 우즈베키스탄과 세르비아, 우루과이 등 개발도상국 대표들이 큰 관심을 보였다.
저녁을 마치고 유 청장과 중국 근대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루쉰(盧迅) 옛집을 방문했다. 그는 1881년 소흥시 월성(越城)구에서 태어나 '광인일기' 등 다수의 작품을 남긴 소설가이자 사상가였다. 그의 옛집은 수로 옆에 자리했는 데 지금은 이곳이 관광상업거리로 바뀌었다. 로신기념관으로 운영되는 로신 옛집 거리에는 소흥의 명주인 황주(黃酒)를 파는 가게와 취두부(두부를 삭힌 음식) 냄새가 코를 찔렀다. 루쉰은 술집에는 잘 가지 않고 거리에서 취두부를 안주 삼아 술을 마셨다고 한다. 황주는 쌀·기장·밀 등 곡물을 누룩(또는 효소제)과 효모로 당화·발효해 만든 비증류 양조주로, 알코올 도수는 대체로 14 ~ 20% 수준이다. 우리의 청주와 비슷한 술인데 한약재 맛이 나는 게 특징이다. 소흥은 황주와 취두부의 본고장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래서인지 이곳 사람들은 증류주인 백주(白酒) 보다 발효주인 황주를 선호한다.
30일 아침 일찍 항주(抗州)로 떠났다. 항주와 소흥은 붙어있는 도시로 자동차로 1시간 이내 거리에 있다. 지하철도 련결돼 있어 같은 생활권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 소동파(蘇東坡)가 수리했다는 서호(西湖)에 들러 중국 강남 4대 누각 중 하나인 성황각(城隍閣)에 올랐다. 아름다운 서호가 한눈에 들어왔다. 성황각을 보고 유람선을 타고 호수를 한바퀴 돌아보니 중국인들이 가장 아름다운 호수로 손꼽을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말이라 그런지 아름다운 중국 전통옷을 입은 녀인들이 호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모습이 곳곳에 보였다. 소동파도 흐뭇해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호 옆 식당에서 점심을 하고 항주 림시정부 청사에 들렀다. 이곳은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의 홍구(虹口)공원 의거 이후 일경에 쫒기는 신세가 된 림시정부 요인들이 1932년 5월부터 1935년 11월까지 임정 청사로 사용했던 곳이다. 청사는 중국 정부의 배려로 잘 보존되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해를 떠나 무려 7번이나 옮겨 다니면서도 독립의 꿈을 지켜냈던 독립영웅들의 삶에 새삼 고개가 숙여졌다. 나의 벗인 조인래 조소앙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의 조부인 조소앙 선생도 이곳에서 활동했다는 설명을 들었다.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소흥에서 가흥(嘉興), 항주로 이르는 곳곳에 한국과 중국이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함께 싸운 유적지가 많다. 한중 두 나라가 평화와 우호에 앞장서는 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서호의 한켠에는 가난과 병마에 시달리고 죽어가면서도 독립의 열망을 잃지 않았던 우리 선조들의 위대하고 신산한 삶이 녹아있다. 이 위대한 력사의 발자취를 한중의 청년들이 함께 돌아보는 날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오월동주(吳越同舟), 토사구팽(兎死拘烹)의 고사(古事)와 로봇ㆍAI 등 첨단산업이 어우러진 소흥과 항저우는 매력의 도시, 우정의 도시이다.
필자/권기식 한중도시우호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