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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쉐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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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커눙 |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 제1차 국공합작
홍군과 동북군 내전 중지, 공동항일의 첫 걸음
(흑룡강신문=하얼빈) 1935년 겨울, 중공중앙은 중공중앙연락국(中共中央联络局)을 건립해 리커눙(李克农)을 국장으로 임명했다. 이는 저우언라이(周恩来), 예지엔잉(叶剑英)의 영도하에 국민당 즉 동북군, 서북군과의 통일전선사업을 달성하기 위해서였다.이번 통일전선사업의 중점은 장쉐량(张学良)이 이끄는 동북군이다. 또한 이번 사업은 우선 포로된 고우푸위엔(高福源) 군관과의 관계를 다그치는게 관건이었다.
고우푸위엔은 산베이(陕北) 위린치아오(榆林桥)전역에서 홍군 15군단에 의해 체포된 동북군 619군단의 단장이었다. 그는 체포된 지 얼마 안되어 홍군에 의해 다른 포로들과 함께 산베이(陕北) 안띵현(安定县)의 와요보(瓦窑堡)에 옮겨졌다. 그는 와요보에 두달간 머물면서 홍군의 친절하고 우호적인 모습들을 직접 목격했다. 그리고 내전을 중지하고 일제히 항일하는 공산당의 기치 아래 홍군이 설산을 넘고 초지를 지나는 영웅사적을 직접 들으면서 심각한 정치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는 현재 자기가 해야할 일은 동북군으로 돌아가 장쉐량을 설득하여 공산당과 연합해 항일하는 것만이 민족해방사업에 일정한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1936년 1월 8일, 고우푸위엔은 뤄촨(洛川)에 이르렀다. 일주일 후, 그는 홍군 측에서 깜짝 놀랄만한 소식을 갖고 돌아왔다. 그는 뤄촨에서 왕이저(王以哲) 군장(동북군 제67군 군장)을 만났고, 장쉐량과도 담화를 가졌다. 결과는 흥분할만 했다. 왕 군장이 중공과 함께 항일하는 주장에 심히 찬성했을 뿐만 아니라 장쉐량도 중공측 전권대표를 직접 만나 공동으로 항일하는 문제를 상담하기를 원한다고 표시했다.
이에, 중앙은 크게 중시를 갖고 리커눙을 홍군대표로 파견해 뤄촨에서 장쉐량과 회담을 갖기로 결정했다. 1936년 2월 21일 리커눙은 대설도 마다하고 와요보에서 출발해 동북군의 호송하에 25일 오후 5시경에 뤄촨에 도착했다.
리커눙 일행의 뤄촨회담은 엄격히 비밀리에 진행되어 4명으로 구성된 그들 일행은 모두 사복으로 분장을 했고 리커눙은 중산복(中山装) 차림을 했다. 뤄촨회담은 두개 단계로 진행됐다. 첫단계인 2월 26일부터 28일까지는 왕이저(王以哲), 조우전판(赵镇藩)이 장쉐량의 전보지시에 따라 리커눙과 여러차례 의견을 교환하면서 홍군과 동북군 67군의 국부적인 합작문제에 있어서 구두협의를 달성했다.
3월 3일, 장쉐량은 남경(南京)에서 시안(西安)에 돌아와 이튿날에 직접 비행기로 뤄촨에 도착해 비밀리에 리커눙과 면담을 가졌다. 3월 4일 오후 3시에 뤄촨회담은 두번째 단계로 정식 진입해 주로 동북군에서 내전을 정지하고 홍군과 공동으로 항일하는 문제에 대해 담화했다. 회담은 리커눙 처소의 작은 방에서 진행됐다.
장쉐량은 재치있어 보이는 부상(富商)으로 변장을 했는데 아주 호방스러운 분위기었다. 그는 방에 들어서자 “리선생 수고많네요. 저는 이번에 ‘큰 장사’를 하러 왔지 ‘작은 장사’를 하러 온 것은 아닙니다”라고 농담조로 인사를 나누었다. 뜻인 즉 홍군과 67군에서 달성한 구두협의에 완전히 동의한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첫단계는 국부적인 것만큼 이번엔 전면거래를 하려는 의도였다.
리커눙은 뜻을 알아채고 “장 장군이 갑옷을 벗고 ‘상업’을 하려는군요”라고 유머적으로 받아주었다.
“자네는 무슨 사업을 하는지요?” 장쉐량이 갑자기 리커눙에게 물었다. 그는 리커눙의 경력에 대해 이미 알아는 봤으나 의문점을 갖고 있음이 분명했다.
“홍군정치부 조직부 부장입니다” 리커눙은 이번 회담의 공개신분을 밝혔다.
“조직부는 적군에 대응하는 것입니까?” 장쉐량이 또 물어왔다. “아닙니다”
“자네가 여기 온 것을 마오(毛泽东) 선생도 알고 있는지요?”
“바로 그의 명을 받들고 온 것입니다”
“좋습니다”장쉐량은 의자를 치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걸음을 옮기면서 리커눙에게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했다. “그럼 아래 몇가지 문제를 해답해 주세요. 첫째, 홍군이 정말로 항일하는 것인지요? 위장은 아니구요? 둘째, 홍군 내부가 단결된 것이 분명한가요? 셋째, 홍군은 항일을 한다면서 왜서 장지에스(蒋介石)를 반대하는지요?”
리커눙은 위기당당한 장 장군을 대면하자면 일정한 “투쟁”을 해야함을 잘 알고있었다.
“홍군은 당연히 항일을 합니다. 항일을 위하지 않았더라면 2만5천리 대장정은 또 무엇입니까? 그리고 홍군은 단결됐습니다. 확실히 일부 논쟁이 존재해 장궈타오(张国焘)가 우리와 이미 한 집안이 아니지만 이는 단지 우리당 내부의 모순입니다. 장 선생은 공산당원이 아니기에 이해하지 못합니다” 리커눙은 장쉐량이 은밀하게 장궈타오 분렬을 지적하는 것은 홍군의 단결에 의혹을 제기한 것으로 알아차리고 그는 툭 털어놓고 대답했다.
장쉐량은 리커눙의 말에 이해가 간다는 뜻으로 머리를 끄덕이면서 “항일한다면 장지에스를 왜 반대합니까?”라고 또 물음을 던졌다.
리커눙은 계속해 대답했다. “바로 장지에스는 항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릇 항일하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단결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방침입니다.”
이 말에 장쉐량은 동의하지 않았다. 밤이 가까와 오자 장쉐량은 리커눙에게 저녁식사를 요청했다.
식사를 마치고 회담은 계속 이어졌다. 장쉐량이 물었다. “저는 리 선생이 책임질수 있을지 모르지만 책임질수 있다면 계속 이야기합시다.” 장쉐량은 리커눙의 공산당 내부에서의 역할에 대해 아직도 의심쩍어 했다.
“당연히 책임질수 있습니다. 만약 제가 책임을 질수 없다면 이미 성명했을 것입니다. 저를 파견했다면 제가 대표인 것입니다” 리커눙은 간당명료하게 대답했다.
“그럼 또하나 묻겠는데요. 홍군은 무기를 내려놓고 정부의 개편을 접수할수 없습니까?” 장쉐량은 회담 중 함정을 만드는 것을 빼놓지 않았다.
리커눙은 인츰 “장 선생이 오해했군요. 저는 투항대표가 아니고 회담대표입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해주세요.”라고 대답한 후 몸을 일으켜 나가려고 했다.
장쉐량은 급히 막아서며 “가지 말고 계속 이야기합시다”라고 하며 말렸다. 이어 그는 지도를 가리키며 “와요보를 나에게 줄 수 없는지요?”라고 또 문제를 제기했다.
리커눙은 인츰 “부사령께서 이 지역을 요구한다면 왜서 더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함께 항일하여 실지를 수복하는 것은 어떻습니까?”라고 말했다. 후에 달성한 협의 중 이런 내용이 있다. 즉 1936년 6월 홍군은 와요보를 내놓고 중공중앙기관을 보안(保安)으로 옮겼다. 홍군은 동북군의 처지를 알고 한보 양보하여 장쉐량더러 이번 공적으로 장지에스의 입을 막게하기 위해서였다.
회담 가운데 장쉐량은 공산당과 연합 항전하는 주장을 완전히 수호할 것을 표시했고 중공의 주요 책임자와의 면담을 희망했다.
3월 5일 새벽 5시에 회담은 결속, 홍군과 동북군이 내전을 중지하고 공동 항일하는 초보적인 협의를 달성했다. 구체적으로 아래와 같다.
1. 장쉐량은 중공에서 마오쩌둥 혹은 저우언라이를 전권대표로 하여 장쉐량과 진일보로 항일구국의 대안을 상담할 것을 제기했다. 지점은 푸스(肤施. 지금의 연안), 시간은 중공에서 정하도록 했다.
2. 장쉐량이 성스차이(盛世才)와 협상해 홍군대표가 신장(新疆)을 거쳐 쏘련(苏联)에 가는 일을 책임진다.
3. 중공에서 시안에 대표를 파견해 상주하고, 장쉐량이 불분명한 명의로 몰래 보호한다.
4. 홍군과 동북군은 전보연락을 한다.
3월 16일, 리커눙 일행은 석루(石楼)에 도착했다. 리커눙은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장원티엔(张闻天), 펑더화이(彭德怀) 등 중앙지도자에게 회담 경과를 상세히 회보했다.
3월 27일, 중공중앙은 석루 부근에서 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에서 장쉐량은 태도가 진지했고, 그와 진일보 회담을 진행하는 것은 항일통일전선 구축에 있어서 아주 중요함을 인정했다. 그리고 저우언라이를 전권대표로 하여, 리커눙과 함께 연안에서 회담을 갖기로 결정했다.
연안회담 이후, 공산당과 장쉐량은 갈수록 밀접해졌다. 리커눙은 관련 동북군 사무를 책임졌고, 장쉐량과의 관계도 날로 친밀해졌다.
서안사변 후, 중공에서 회담 대표단을 파견했다. 리커눙을 중공대표단 비서장으로 임명했다.
저우언라이와 장쉐량의 회담을 내조하기 위해 리커눙은 동북군, 서북군의 여러 중, 고급 군관들과 다방면으로 접촉하는 가운데 그들이 장지에스를 반대하는 태도가 강렬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저우언라에게 보고를 올리는 한편 침착하게 국민당 군관들을 설득해 대의를 이해시켰다. 그는 서안사변의 정신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중공중앙의 주장을 천명함으로써 동북군과 서북군 내부의 중, 고급 군관을 설득해 의견을 합치시켰다. 이는 중국 공산당과 동북군, 서북군이 “삼위일체(三位一体)”가 되어 장지에스와 담판하는데 유력한 사상일치의 조건을 마련한 것이다.
/신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