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빈시일만가, 조린공원, 상지시...... 룡강대지에는 영웅의 이름으로 명명한 도시와 가도, 공원이 수없이 많다. '홍색 흔적 룡강에'을 따라 전쟁의 포화속에서도 빛난 영웅들의 이름을 되새겨본다.
상지시조일만조상지기념관에는 조상지장군이 황포군관학교에 다닐 때 사용했던 가죽상자가 전시되여 있다. 1926년, 조상지가 동북으로 돌아와 혁명운동에 참가하면서 가죽상자도 함께 동북으로 가져왔다. 1933년, 조상지가 주하동북반일유격대를 무어 주하인민을 이끌고 항일투쟁을 벌였다. 그는 선후로 빈주삼차하, 통북빙당자 등 여러 유명한 전역을 지휘했다.
조효홍 상지시조일만조상지기념관 관장은 "조상지가 유리한 지형을 리용하여 적을 빙당자까지 유인했다. 그번 전역에서 죽거나 부상당한 적의 수가 300여 명에 달한 반면 우리 군은 총 7명이 희생되였다. 당시 무기가 현저하게 차이가 나는 상황에서 적의 수가 우리 군의 수를 훨씬 초월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성적을 거두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다."고 말했다.
당시 조상지가 령도한 항일유격전쟁의 전쟁터가 송화강 량안 40여 개 현을 아울렀다. 수천번 전쟁을 치러 명성이 널리 알려짐에 따라 적들은 그의 이름만 들어도 무서워했다. 일본침략자들은 상금을 내걸로 조상지를 지명수배했을 뿐만 아니라 수차 특무를 파견하여 그를 암살하려고 시도했다. 1942년, 적들과 맞서 전투를 벌이던 조상지가 크게 부상을 입고 체포되였다. 죽을지언정 투항하지 않은 조상지는 결국 영용하게 희생되였다. 조상지를 기념하기 위해 후인들은 그의 이름으로 도시, 가도와 공원을 명명했다.
리조린은 한편으로 동북 항일전쟁을 치르면서 다른 한편으로 전우와 함께 '야영의 노래'를 창작했다. 가사에 '불을 지피니 가슴이 따스해지고 바람이 부니 등이 시려오는구나'란 구절이 있는데 항일전쟁시기 환경이 얼마나 간고했는지를 진실하게 반영했다. 그러나 대지가 꽁꽁 얼어붙고 극심한 허기에 시달려도 '국난을 함께 겪고 있는니 어찌 약해질 수 있으리'란 가사처럼 전사들은 여전히 용감하게 적진을 향해 돌격했다. 이 노래는 당시 전사들의 투지를 크게 일깨워주었다.
리조린이 동북항일련군 제6군 정치부 주임으로 지낼 때 조상지와 함께 전쟁을 치렀는데 빈주, 오상보를 점령하였을 뿐만 아니라 송화강 하류 탕원항일유격대근거지도 설립했다. 항일전쟁이 승리한 후 리조린은 빈강성 부성장 등을 맡았으며 국민당 반동파 내전 음모를 적극 폭로한 바 있다. 당시 동북의 복잡하고 험악한 형세하에 그는 개인의 안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만약 나의 피로 인민들의 눈을 맑게 할 수 있고 인민들의 각성을 불러일으킬 수만 있다면 죽는다고 해도 가치가 있는 일이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1946년, 리조린은 불행하게도 국민당 특무에게 살해되였다. 리조린을 기념하기 위해 할빈시 전 도리공원을 조린공원으로 이름을 바꾸어 영웅의 이름을 길이길이 전하고 있다.
/동북망 조선어채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