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세대
아들 청아와 통화한 뒤 구금자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아침을 먹을 때도 사진을 찍을 때도 내내 눈에서는 말없이 웃음이 흘렀다. 이제 동창모임이 끝나 집으로 가면 청아가 상해에서 데리고 온 조선족처녀애를 볼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그랬다.
하지만 청아는 지금 엉뚱한 짓을 저지르고 있었다. 청아는 상해에서 어느 처녀애를 데리고 오지도 않았다. 하긴 전화에서도 련인이 생겨 집으로 왔다는 말만 했는데 백일호도 구금자도 상해에서부터 련인과 함께 온걸로 착각하고 있었던것이다. 그러니 부모들이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되는 날이면 또 한번 가슴이 서늘하게 놀랄 일이 아닐수 없었다.
청아가 부모님께 선보이려는 처녀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박화였다.
지금 백일호네 집에는 어제 밤 상해에서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청아와 그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온 박화가 마주 앉아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지난 겨울방학, 구금자가 아들 청아를 자기한테 소개해줄 때 박화는 ‘저분들은 아무것도 모르니 저러시는구나’ 하는 생각에 속으로 구금자와 백일호를 많이 웃었다. 그때쯤 박화는 이미 어머니 최윤희와 북방사범대학 부총장인 백일호가 옛날 대학시절 어떤 일이 있었겠다는것도 나름대로 판단을 하였고 그래서 자기와 백일호는 어떤 관계라는것도 속으로 짐작하고 있던 터였다. 하지만 그러한 내막을 전혀 모르는 구금자에게 무턱대고 거절할수도 없는 일이고 또 아버지가 같은 청아라는 남동생은 어떤 애일가 하는 호기심에 모르는척 하고 구금자가 시키는대로 청아를 만나보기로 작심했던것이다.
그날, 대학 도서관 구금자의 사무실에서 청아를 만나게 된 박화는 첫 인상부터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청아는 아버지처럼은 키가 불쑥 크지는 않아도 1미터 80쯤 되여 보이는 큰 키에 정열과 예지로 빛나는 어글어글한 두눈, 사내애답게 뼈가 굵고 근육이 부풀어오른 두 어깨, 거기다 성격 또한 시원시원했다.
두 사람이 만나본 그 이튿날 청아는 기차를 타고 상해로 떠나가게 되였는데 청아는 박화의 핸드폰에 할빈기차역까지 바래다 줄수 없느냐는 청탁 메시지를 보내왔었다. 그래서 박화는 구금자 몰래 청아를 기차역까지 바래주기도 했었다. 그때부터 둘은 매일 메일을 주고받았다. 그렇게 접촉이 많아질수록 공통언어도 많아졌고 두 사람의 정도 깊어갔다. 어느 한번은 청아가 메일에다 ‘진리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보내오기에 박화는 머리에 장악한 사회과학리론으로 그 문제를 해답했다.
그런데 청아는 박식한 순수 자연과학으로 박화의 눈길보다 훨씬 더 멀리 내다보며 풀이하는것이였다. 그렇게 대화를 하면 할수록 청아의 총명에 탄복이 갔다. 그 보다도 박화는 앞으로 박사까지 졸업하고 대학교 교수가 되는것이 꿈이였는데 청아는 아버지처럼 국립대학에서 심부름을 하는것이 아니라 마흔살전으로 절로 사립대학을 하나 꾸리고 싶다는것이였다. 그렇게 포부가 크고 웅심깊은 애였다. 그래서 박화는 청아가 만약 아버지가 같은 동생이 아니였다면... 하는 생각을 여러번이나 몰래 해보게 되였다.
청아 역시 어머니의 소개로 박화를 만나본 후부터는 마음속에 박화가 들어앉는 자리가 점점 더 커져갔다. 소학교부터 한족학교를 다닌 그는 여러면으로 우수한 한족녀자애들은 많이 보아왔어도 주위에 그렇게 마음에 드는 조선족녀자애는 하나도 보지 못했었다. 그래서 어머니가 반드시 같은 민족이여야 한다고 침을 놓을 때도 사랑과 결혼은 우선은 마음이 통해야 받아들일수 있는 일인데 조선족들중에 그렇게 신통한 처녀가 나질가 하는 의문이 많았었다. 그렇게 우선은 마음이 우러나지 않았으니 부모님의 요구를 무턱대고 받아들일수가 없었다.
그런데 박화를 만나서부터는 그런 불신이 가뭇없이 사라졌다. 박화는 어머니 구금자처럼 섬세하면서도 사리가 밝고 인정 많은 처녀애였다. 그런데다 허위와 가식을 싫어하는 솔직한 성격이 마음에 쏙 들었다. 그런데 박화가 괘씸하고 미워나는 일이 한가지 있었다. 그것은 겨우 한살이 이상인걸 가지고 말끝마다 ‘너는 내 동생이야’하는 그것이였다. 그래서 언젠가 청아는 ‘이제 한번만 더 동생이란 소리가 나오면 메일을 끊겠다’고 했고 과연 꼬박 일주일이나 메일을 보내지 않은적도 있었다...
어제 오후였다. 사무실 왕주임이 백일호총장이 자기를 갑자기 찾는다고 하자 박화는 대뜸 이 분이 어머니랑 동창모임에서 무엇인가 알아낸것이 아닐가 하는 의심이 생겼었다. 아니나 다를가 사무실에 들어서자 자기를 바라보는 백교수의 눈길이 전에 와는 많이 달랐다. 그 눈에서는 진한 피줄이 이어진 사이에만 오고 갈수 있는 자애롭고 따스한 빛이 흐르고 있었다. 더우기 이야기를 마치고 사무실에서 나올 때 ‘우리 청아와는 어떤 사이로 지낼거냐?’고 하시던 물음은 박화의 직감으로 모든것을 알고 마음을 떠보는 말씀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박화는 혼자서 마음속으로 자주 외워보던 백일호 부총장을 만나고 나니 기분이 이상하고 마음이 싱숭생숭 해났다. 그래서 교실로 가지 않고 숙소로 돌아와 컴퓨터를 마주하고 앉았다. 마침 상해에 있는 청아한테서 메일 한통이 와 있었다...
박화! 어제 밤 이상한 꿈을 꾸었어...
내가 네 손을 꼭 잡고 등산을 하고 있었는데 땀벌창이 되여 정상에 오르고 보니 발밑은 천길 절벽이더구나. 그런데 나와 나란히 서있던 네가 어쩌다 한발을 잘못디뎌 그 절벽우에서 허망 떨어지는것이 아니겠니. 그래서 나는 너를 구하려고 팔을 아래로 쭉 펴며 그 절벽우에서 허망 몸을 날려 그냥, 그냥 너를 쫓아 내려가다가 화닥닥 놀라서 깨여났어.
혹시 몸이 어디 불편하지는 않은지? 근심스럽구나. 메일을 열어보면 인츰 답장을 줘!
너를 사랑하는 오빠, 그리고 래일의 남편 청아.
메일을 보고난 박화는 깊은 사색에 잠겼다. 백일호총장도 이젠 모든 사실을 알게된 마당에 동생 청아를 더 속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청아에게 보내는 메일에다 아버지는 일찍 세상뜨셨다고 하기에 그런 줄로만 알고 자랐는데 대학에 붙어서부터 어머니의 몸에서 느껴지던 가지 가지 의심스럽던 일들과 그래서 누구도 몰래 그 비밀을 밝혀내게 된 그 경과를 쭉 내리썼다. 그리고 마지막엔 마침내 오늘은 나의 아버지이자 너의 아버지인 북방사범대학 백일호부총장께서도 이 일을 알고 계시는것 같다는 말까지도 덧붙였다.
이런 메일을 받으면 청아는 크게 놀랄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이 한살 더 많아서가 아니라 진짜 두 사람의 몸에는 같은 피가 흐르는 오누이라는것을 깨닫게 되리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안지나 청아한테서 날아오는 메일은 오히려 박화를 초풍할 지경으로 깜짝 놀라게 만들었던것이다.
청아는 첫마디에 나도 너와 꼭 같이 생부, 생모를 찾느라고 혼자서 애간장을 태운 경력이 있는 청년이란 말을 쓰고 자기는 태여나자 병원에서 백일호와 구금자의 아들과 바뀌였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자기의 친부모는 어떤 사람들이였고 바뀌운 그 애와 생모는 언제 어떻게 차사고로 죽었고 생부는 또 어떻게 되여 감옥으로 갔고 그러다가 병으로 감옥에서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마치도 인상 깊은 영화를 보듯이 생동하게 써보냈던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두 사람 사이엔 그 어떤 혈연관계도 개입되지 않는다는것이다...
백청아와 박화(박일화)는 하늘에서 정해준 천생배필!
청아 메일의 마지막 구절이였다.
청아는 박화와 이런 메일이 오고간 뒤 어제 밤 비행기로 급급히 상해에서 할빈으로 날아왔고 또 청아가 집에 와서 치는 전화를 받고 박화가 백일호네 집으로 달려왔던것이다.
“소뿔은 단김에 뽑으라고 내 말대로 일을 밀고 나가자. 마침 너의 어머니와 외할아버지도 할빈으로 오셨으니 너는 그분들께 이야기하고 나는 나대로 부모님께 말씀드리겠어.”
“아니야, 우리 둘은 모두 뜨거운 머리를 식히며 좀 더 차분히 생각을 해봐야 할것 같애.”
“이래서 녀자들은 큰 일을 못한다는거야. 우리 두 사람은 아무런 혈연관계도 없으니 부부가 되여도 당연하다는 큰 주제는 먼저 확정해놓고 그 다음 구체적인 방법에 들어가서 차분히 생각하면 되는거 아니겠니?!”
청아는 어제 밤 비행기안에서 생각해낸 방법들을 박화에게 터놓는다.
“너의 어머니와 외할아버지에겐 내가 우리 아버지, 어머니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사실부터 말해야 해. 그래야 우리 둘의 혈육관계가 해소되는거야. 문제는 우리 아버지보다도 우리 어머니에게 있어. 어머니는 지금 아무것도 모르고 계실거야. 그래서 내가 공개하는 련인이 박화라고 하면 역시 기뻐하실거야. 전에부터 너를 우리집 며느리로 삼고 싶어 어머니가 나서서 련줄까지 달아주었으니까. 하지만 너의 말 대로라면 우리 아버지께서 너와 너의 어머니와의 관계를 이미 알고 있는 이상 아버진 어머니에게 이 일을 숨기려 하지 않으실거야. 나의 짐작으로는 오늘 래일이라도 인츰 솔직히 다 말씀드릴거야. 그렇다면 기막히고 한심할 분은 우리 어머니가 아니겠니? 어떻게 아버지의 친딸을 다시 며느리로 받아들일수 있겠냐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미 머리속으로 이런 준비를 했어. 오늘 저녁엔 부모님께 너와 결혼하겠다는것만 선포할거야. 그러면 어머닌 무조건 동의하실거 아니겠니. 그 다음 래일이라도 속히 아버지와 담화를 해야겠어. 절대 급해하시지 말고 명년쯤에 어머님께 옛날에 있었던 비밀을 말씀드려라고 말이야. 그때가면 이미 다 써놓은 죽이여서 우리 어머니도 어쩔수 없게 되지 않겠니? 그렇게 되면 모든 일들이 투명해지고 우리도 아무런 장애 없이 떳떳한 부부로 될수 있단 말이야. 이렇게 구체적인 방법만 연구하면 되는 일 아니고 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