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김만융교수의 그 말씀은 사실 그대로가 아니였다. 그때 김만융교수가 흑판에 씌여진 그런 글을 보고 구금자에게 살며시 귀띔은 해주었지만 기실 그 ‘통지’는 백일호와 구금자가 얼굴을 맞대고 같이 창작해낸 사랑의 선언이였다. 그랬던 일을 속으로 번연히 아는 백일호지만 동창모임에 모처럼 모셔온 김만융교수님을 즐겁게 해드리려고 지금 일부러 구금자에게 모르쇠를 놓고 있다는건 이들 부부밖에는 누구도 알리 만무했다.
기념 사진
병풍처럼 둘러싸인 숲에서 맑은 공기가 신선하게 풍겨온다. 상쾌한 아침이다.
호텔정원 한가운데 있는 분수못가에는 일색 남성 동창들만 줄느런히 모여있다. 그들은 지금 해볕이 호듯호듯 내리쬐는 분수못 바위벽을 등을 지고 서서 호텔정문을 지켜보며 녀성들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기 바쁘게 녀성들은 뿔뿔이 방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거울 앞에서 저마끔 얼굴에 화장을 하느라고 분주하기 그지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오늘 오전 시간에는 이제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이번 동창모임의 기념사진을 찍기로 되여있었던것이다.
“녀성들은 왜 꼭 저렇게 얼굴에다 찍고 바르느라고 분주스럽지?”
“어제 비아바이 말 못 들었나? 암컷들은 수컷보다 못생겼으니까. 수컷한테 짝지지 않으려고 날마다 저렇게 얼굴에 찍고 바른다고 말이야.”
아침 식사를 마치자 약속이나 한듯 그 길로 밖으로 나온 남성들은 녀성들처럼 화장과 옷치장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래서 멀쩡히 기다리기가 더구나 신경질이 나는 모양이다.
“내 자네들한테 어제 하던 말을 계속 해줄가?”
‘비아바이’ 박재동이 또 발동이 걸린다.
“아이를 낳은 녀성들의 몸에는 말이야, ‘모성애’와 ‘녀성애’ 이 두가지 ‘애’를 다 가지고 있거든. 그런데 저렇게 얼굴에 연지곤지를 바르며 화장을 하고 있을 때는 암짐승들이 꼬리를 흔드는것처럼 ‘녀성애’가 발작하는거야. 그러니까 암냄새를 풍기려는 수작들이란 말이야. ‘녀성애’를 아름다운 꽃에 비유한다면 모성애는 씨를 품고 있는 열매로 보면 맞춤하네. ‘모성애’는 자기 몸에서 나온, 자기 생명의 련속인 오직 새끼만을 위한 본능적인 사랑이기 때문에 선택성이 없고 무조건적이여서 죽음과 삶을 초월할수도 있는거야. 하지만 ‘녀성애’는 동성과는 질투하면서 많은 이성에게 잘 보이고 또 그 중에서 눈에 드는 이성을 유인하려는 목적성이 뚜렷하고 그만큼 선택성이 있는거야. 야, 저 녀성들이 못 들으니 다행이지 저것들이 들었으면 어제 뚝배기처럼 이 아바이 바지를 벗기자고 달려들겠다. 그래서 말이야, 구금자는 이 숱한 남자동창들중에서 백일호만 졸졸 따른거고 주영주는 또 대머리가 좋아서 결혼까지 했다가 싫다고 차버린거야. 내 말 틀리나 대머리?”
“과연 ‘비’아바이는 ‘비’아바이구려. 그 ‘비’자 음을 중국말로 직역하면 바로 녀자들의 그것이란 말이 아니겠슈?!”
“에끼, 제 할아버지 수염을 뽑아 팽이 채찍을 만들려고 설치는 버릇없는 손주녀석 같군.”
비아바이는 마치도 할아버지가 손주를 혼내주듯이 주먹을 쳐들고 당금 대머리를 한매 때릴 시늉을 해보인다.
이럴 때 화장을 마친 녀성들이 깔깔거리며 호텔에서 나왔다. 그러는 녀성들의 뒤를 따라 호텔 복무원들이 걸상들을 들고 나왔다.
그러자 그냥 어깨에 메고 다니던 디지털사진기를 언녕 벌써 삼각틀 우에다 고정시켜놓고 대기하고 있던 강현수가 앞으로 달랑 나서며 몽통한 팔을 머리우로 쳐든다.
“그대들! 지금부터 단체사진을 찍겠습니다. 먼저 이 분수못에서 정식으로 한장 찍고 그 다음엔 저 잔디밭에 가서 앉을 사람은 앉고 설 사람은 서고 자유로운 자세들로 또 한장 찍겠습니다. 그러니 모두들 줄을 서시오! 석줄입니다. 앞에는 앉고 가운데는 서고 제일 뒤줄은 걸상 우에들 올라서시오!”
강현수가 이렇게 지휘를 하자 동창들이 호응하여 분수못가에 모여들었다. 그런데 단체사진을 찍으면 제일 앞줄엔 언제나 녀성들이 무릎을 꺾으며 앉는것이 규칙아닌 규칙으로 되여있었는데 약속이나 한듯 녀성들이 몽땅 제일 뒤줄 걸상우에 줄느런히 올라섰다.
“남녀 평등이 아니야? 오늘은 남자들이 앞에 무릎꿇고 앉아!”
안송옥이가 걸상우에서 남자들을 내려다보며 소리를 지른다. 그것 또한 재미나는 일이라 남성들은 투덜거리는척 하며 앞에는 아예 땅바닥에 엉뎅이를 붙이고 올방자를 틀며 척척 들어앉고 그 뒤엔 어깨에 어깨를 붙이며 줄을 맞추어 선다.
그런데 가운데 줄에 선 비아바이가 앞줄을 내려다보니 그의 바로 앞에는 대머리가 올방자를 틀고 앉아있었다.
“어허, 농사가 아무리 안 되였다고 해도 이렇게 한심한 논은 처음 보네.”
그는 지금 이마부터 머리 웃면에는 머리카락 한오리 없는 대머리의 머리를 슬슬 만지며 골려주는 판이다.
“이 한심한 논판을 좀 내려다들 보라구. 벼대가 못 자라면 하다못해 돌피대라도 몇대는 있어야 하는거 아닌가?”
그 소리에 사진을 찍자고 정색하고 섰던 동창들이 웃음보를 터뜨린다.
“아바이, 늙으니까 확실히 안질은 나쁘시구만 그려.”
비아바이한테 그렇게 놀림을 당하기만 하고 있을 대머리가 아니였다.
“찬찬히 좀 들여다보시구려. 그게 어디 논이시유? 그건 얼음강판이유다. 녀자들이 지나가다 핸들, 핸들 자빠질 얼음강판 올시다.”
그래서 또 한바탕 폭소가 터지는 그 찰나, 강현수는 제꺽 사진기 샤타를 누르고 어느 사이 달려와 가운데 줄 변두에 바릇 자세를 하고 섰다.
“야! 오늘 사진이야말로 최고로 잘된 사진이구나.”
강현수가 방금 찍은 화면이 그대로 나오는 디지털사진기를 들여다보며 고함을 지르자 모두들 몰려가 그 화면을 구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