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강신문=하얼빈 2007.01.19
장강의 중류에 위치한 무한은 중국중부의 중요한 수륙교통과 문화중심지였다. 손중산의 무창봉기가 이곳에서 일어났기때문에 많은 혁명가들에게 있어서 이곳은 혁명의 성지로 간주되였다. 북벌군이 무한을 공략한후 중국혁명의 중심지는 광주에서 무한으로 옮겨졌다. 많은 조선혁명가들도 무한에 모여와 혁명투쟁에 참가하였다.
20세기 20년대초에 무한에는 벌써 중한호조사가 있어 조선이주민들과 중국혁명지사들이 함께 활동하였다. 그들은 중국인민이 조계지를 회수하는 투쟁에 참가하였다. 중국혁명이 고조됨에 따라 더욱 많은 조선혁명가들이 이곳에 모여왔다. 의렬단은 단장 김원봉을 따라 본거를 무한에 정하고 조직세를 크게 확장하였다. 1937년 중국의 전면적인 항일전쟁이 일어나자 더욱 많은 조선혁명가들이 무한에 모였다. 그들은 중국의 국공합작 정세에 비추어 여러 당파들의 대단결을 주장하였고 표면적으로나마 통합을 이루었다. 그 산물이 바로 무한에서의 조선의용대 창립이였다.
무한에서 우리는 중한국민호조사(中韩国民互助社)유적지, 조선의용대 창립지들을 찾아야 했고 무한보위전에 관한 상황을 료해해야 했으며 황포군관학교 무한분교 옛터를 찾아야 했다. 그러나 모두 단서가 명확치 못했다. 우리가 책에 기재한 주소에 따라 문의했으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우선 무한혁명박물관(武汉革命博物馆)에 가서 단서를 찾아보기로 하였다. 무한혁명박물관은 중앙농민운동강습소구지(中央农民运动讲习所旧址)로 널리 알려지고있다. 대혁명시기에 모택동이 이곳에 농민운동강습소를 세우고 각지 농민운동 간부들을 강습시켰기때문에 무한혁명박물관은 아는 사람이 많았다.
박물관에서 우리는 우연하게 한구에서의 조기 공산주의자이며 중국인변호사였던 시양(施洋)의 사진을 발견하였다. 시양은 한구에서 로동자, 농민 운동을 조직하였고 조계지의 영국제국주의자들과 적극 항쟁한 인물이다. 그는 조선인 리우민(李愚民), 조중구(赵重九) 등과 함께 한구 중한국민호조사를 조직하고 조선혁명가들을 많이 도와주었다.
무한에는 일찍부터 부분적인 조선이주민들이 중약과 인삼 장사를 하면서 살고있었다. 20세기 20년대에 들어서서 조선이주민들이 점차 많아지기 시작하였고 혁명가들도 이곳에 모여왔다. 1920년 겨울부터 조선지사 리우민과 조중구는 시양과 함께 무한의 여러 단체와 학교를 다니면서 강연회를 가지고 중국과 조선 두 나라가 서로 협조해야 할 필요성을 력설하였다.
1921년 1월하순에 마침내 한구에서 중한국민호조사가 조직되였다. 한구 중한국민호조사 선언과 강령, 활동계획은 시양과 조선지사 리기창(李基彰)목사가 작성하였다. 이해 3월 21일 조중구, 리기창, 황영희(黄永熙) 등 조선지사들은 독립선언발표기념일을 맞으면서 각계 중국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한구 상당보안회내에서 성대한 기념축하의식을 가졌다. 리기창이 기념식을 사회하고 조중구가 선언서를 랑독하였으며 중국 각계 인사들이 축사를 하였다. 기념대회가 끝난후 두 나라 인사들은 무한의 거리를 다니면서 선전삐라를 살포하였다.
중한호조사의 활동은 한구의 일본령사관 밀정들의 감시를 받았다. 일본밀정은 조중구를 독살하려고 하였지만 시양의 노력으로 구원되였다. 시양은 프랑스 령사에게 서한을 보내 법에 따라 프랑스조계지의 조선인을 보호할것을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조중구는 치료를 받고 구원되였으며 기타 조선혁명가들의 활동도 보호를 받게 되였다.
1922년에 리기창이 무창에서 일본경찰들에게 체포되였을 때도 시양이 무한 각계 인사들을 동원하여 강력한 항의를 제기하였다. 한달 남짓한 노력을 거쳐 리기창은 끝내 석방되였다.
한구 중한호조사를 조직할무렵 황영희, 리기창, 리우민을 비롯한 조선혁명가들은 호남성 장사에서도 호조사를 설립하였다. 1921년 3월 17일에 설립된 장사 중한호조사에는 모택동과 하숙형(何叔衡)도 참여하였다. 호조사 선전부 주임은 하숙형과 조선인 리기창이 맡았고 통신부 주임은 모택동과 조선인 황영희가 맡았다. 그리고 조선인 리우민이 경제부 주임을 맡았다.
중국과 조선의 많은 혁명가들이 적극적으로 협조하면서 활동했던 중한호조사의 설립지는 지금 무한에서 찾을수 없었다. 독립선언 발표기념식을 가졌던 상당보안회라는 단서가 있었지만 현지 연구일군들은 확인하지 못했다. 그들의 판단에 의하면 한구 프랑스조계지의 어느 곳에 사무실을 정하고 일을 보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 그곳도 주요건물을 제외하고는 모두 허물어버렸기때문에 더욱 확인할수 없다고 하였다. 다행히 중국인 변호사 시양이 있어 그를 통한 중한호조사의 사적을 다소나마 더듬어 볼수 있었다. 시양은 후에 공산당을 따라 로동운동과 반제운동을 진행하던중 북양군벌 오패부(吴佩孚)에 의해 비밀리에 살해되였다. 무창에는 그를 위한 기념비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