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강신문=하얼빈 2007. 01. 17)
1925년 반제반봉건투쟁을 제기하고 국공합작을 주도하였던 중국혁명의 선구자 손중산이 북경에서 서거하였다. 지도자를 잃은 광주의 국민혁명정부는 좌파, 우파로 나뉘여 벌써 권력쟁탈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하여도 손중산의 뜻을 이어받아 북벌할것을 요구하는 세력이 우세를 차지하였다.
국민정부에서 주요한 역할을 감당하고있던 공산당은 1926년 4월에 중앙특별집행위원회 림시회의를 소집하고 신속히 북벌을 개시할것을 결의하였다. 국민정부의 쏘련고문이였던 보로진도 중국공산당과 함께 국민당내 진보인사들을 단합하여 광주국민정부의 북벌을 적극 추진하였다. 이때 혁명군은 두차례 동정과 군벌반란을 평정함으로써 혁명기반이 더욱 굳어졌기때문에 북벌할 조건이 성숙되였다.
1926년 6월 5일 광주국민정부는 북벌출사표를 내면서 전국동원령을 내렸다. 그리고 7월에는 ≪북벌선언≫을 발표함과 더불어 각 혁명군에서는 선후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북벌의 목표는 20만 군대를 거느리고 호남, 호북, 하남, 하북을 통제하고있는 오패부, 35만 군대를 가지고 동북과 경진(京津)지역에 웅거한 장작림, 20만 군대를 가지고 장강하류의 강소, 절강, 안휘, 복건, 강서를 비롯한 동남부지역을 제패하고있던 손전방이였다.
제국주의자들을 등에 업고 국권을 팔아가면서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는 이들 봉건군벌을 제거하기 위해 국민혁명군 10만 정규부대가 세길로 나뉘여 공격을 시작하였다. 리제심의 4군, 리종인의 7군, 당생지(唐生智)의 8군으로 구성된 제1로군은 중부지역의 오패부를 상대로 공격을 개시하였고 담연개(谭延闿)의 2군, 주배덕의 3군, 정잠(程潜)의 6군으로 편성된 제2로군은 강서의 손전방을 목표로 하였다. 그리고 장개석은 직계부대인 하응흠(何应钦)의 1군을 동남부에 배치하였다. 한편 혁명사상을 받아들인 풍옥상이 서북군을 거느리고 장작림을 공격함으로써 북벌군을 유력하게 도왔다.
북벌초기 도합 800명에 달하는 조선청년들이 북벌군에 참가하여 싸웠다. 황포군관학교의 조선인 재학생들은 중국인 재학생들과 마찬가지로 학생군에 편입되였다. 10월에 졸업식을 가진 4기생들은 곧 사관으로 임명받아 광주시 수비와 일선전투에 투입되였다. 그러나 의렬단의 김원봉은 황포군관학교 정치부 교관으로, 박효삼과 강평국은 입오생부 교관으로, 리기환은 관리부 요원으로 학교에 남아있었다. 그들은 후속 입학생들속에서 더욱 많은 의렬단 단원들을 모집할 의도였다.
황포군관학교출신인 200여명 조선청년들은 제4군 장발규부대와 엽정독립퇀에 가담하였고 기타 제2군, 제3군, 제6군을 비롯한 혁명군에도 많은 조선혁명가들이 있었다. 중국 동북과 쏘련에서 풍부한 전투경험을 쌓고 훌륭한 군사지식을 습득한 조선혁명가들도 이 시기 북벌전쟁에 참가하였다.
씨비리 고려의용군 사령관을 력임했던 리용은 국민혁명군 동로군 총지휘부의 포병대 교관직을 맡고 참전하였고 동북의 조선독립군부대 지휘관이였던 김홍일(金弘壹)도 동로군 총지휘부의 참모로 되였다.
국민혁명군은 병력을 집중해 각 군벌을 하나하나 격파하는 전술을 짰다. 우선 력량을 집중해 오패부를 타격하고 풍옥상부대와 장작림의 싸움을 관망하고만 있는 손전방을 잠시 놓아두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제1로군이 북벌의 주력으로 되였고 호남, 호북 전선이 주요전장으로 되였다.
1926년 7월상순 싸움에 능한 지휘원들인 장발규, 엽정, 채정개(蔡廷铠), 리종인의 지휘하에 여러 북벌군부대는 파죽지세로 진격하였다. 그들은 7월 10일부터 련이어 예릉(醴陵), 주주(株洲), 상담(湘潭)을 격파하고 호남성의 중심도시인 장사를 공략하였다. 8월에는 평강, 악양(岳阳) 등지를 점령하고 호북경내로 진격하였다.
전투가 호북경내에서 벌어지자 크게 놀란 오패부는 본거지인 무한을 사수하기 위해 주력군을 무한 남부의 정사교와 하승교에 포진하였다.
북벌군은 4군의 두개 사단과 엽정독립퇀을 정사교 정면공격에 내세우고 7군과 8군의 부분적부대로 우회공격을 시도하였다. 북벌군 선견대로 선정된 엽정부대에는 리용과 같은 조선인지휘원이 있었을뿐만아니라 160명으로 된 조선인련대도 있었다. 조선인사관들은 뛰여난 통솔력과 정치공작능력으로 중국 군정요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1926년 8월 26일 전투가 시작되였다. 북벌군 수만명과 2만 수비군이 정사교에서 접전하였다. 치렬한 전투에서 진지는 빼앗기고 다시 빼앗는 거듭되는 반복을 거쳤고 시체가 도처에 널렸다. 팽팽한 대치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엽정부대는 우회작전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6군의 기관총부대가 이를 엄호하였다. 기관총련의 교관을 맡은 조선인군관 김준섭은 기관총련을 지휘하여 적을 제압하였다. 기관총부대의 정확한 명중률과 집중사격으로 적들은 머리를 들수 없었다. 이 기회를 타서 엽정부대는 신속히 우회하여 적의 배후를 공격하였다. 전투에서 엽정부대는 1,000여명 적들을 섬멸하고 1,400여명을 포로하였다. 전투에서 뛰여난 지휘력과 전투력을 과시한 김준섭은 공을 세워 표창받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