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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발자취(65)-북벌에 참가한 조선인기관총수 김준섭렬사
http://hljxinwen.dbw.cn   2008-12-10 15:09:15
 
 
 
 
 

  (흑룡강신문=하얼빈 2007.01.13)

  제1차국내혁명전쟁시기 손중산이 령도하는 국민혁명군정부는 제국주의를 등에 업고 백성들을 수탈하는 봉건군벌들을 타격하기 위해 단연히 북벌을 개시하였다. 1926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북벌전쟁에서 혁명군은 파죽지세로 호남, 호북, 강서를 석권하면서 반년도 안되는 사이에 장강이남을 전부 통제하였다. 이 휘황한 전쟁에 수많은 조선혁명가들이 참가하였다. 그중 제2차남창공격전에서 희생된 조선인기관총수 김준섭렬사는 혁명군내에서 명망이 아주 높은 장교였다.

  남창시 '8.1'대로 북쪽에 위치한 강서혁명렬사기념당에는 김준섭렬사에 관한 자료들이 있었다. 렬사에 대한 전문소개가 있었고 그가 쓰던 회중시계를 비롯한 유물들도 전시되여있었다. 그리고 김준섭렬사가 희생된 락화역 옛 사진과 렬사를 위한 북벌군의 추도회 사진도 있었다. 수많은 북벌군전사들이 장엄히 서있는 가운데 렬사의 유체가 누워있는 커다란 관이 있었고 관앞에는 꽃다발이 있었다. 그뒤 프랑카트에는 김준섭렬사를 추모한다는 글이 씌여져있었다.

  김준섭(?―1926년)은 일명 강화일이라고도 하였다. 그는 조선 함경북도 명천군 오동리에서 태여났다. 어려서부터 반일사상이 강했던 그는 '3.1'운동이후 동북에 들어와 독립투쟁에 참가하였다. 동북에서 그는 조직의 지시를 받고 쏘련에 가 군관학교 기관총전문과에서 무예를 닦았다. 김준섭은 동북에서 활동할 때 중국공산당에 가입한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사업의 수요에 따라 한동안 강화일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었다.

  1926년 2월에 쏘련으로부터 광동에 도착한 김준섭은 광동성 혜주에 주둔한 국민혁명군 제6군 55퇀의 기관총련 소좌 교관으로 배치받았다. 당시 국민혁명군은 혜주에 기관총훈련반을 꾸렸는데 김준섭은 훈련반의 교관으로 초빙되였던것이다. 당시 제6군에는 김준섭처럼 전문 기관총기술을 배운 인재가 없었다. 훈련반 학생들은 제6군 각 부대의 련장, 패장급 장교들이였다. 중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은 김준섭은 중국어에 익숙하지 못했기때문에 교수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인내력을 가지고 강의했으며 직접 시범을 보여주는것으로서 자기의 뜻을 전해주었다. 그리고 밤이면 부지런히 고장난 기관총을 수리해주었다. 그리하여 김준섭은 부대 장병들과 훈련반 학생들의 존경을 받았다.

  북벌전쟁이 시작되자 김준섭은 제6군을 따라 호남, 호북 전장으로 이동하였다. 그때 주력부대였던 제4군과 제7군은 공격을 도맡았고 제6군과 제3군은 주력부대를 협조하는 한편 강서의 손전방부대를 견제하는 임무를 맡았다. 9월에 이르러 북벌군이 정사교, 하승교에서 치렬한 전투를 치를 때 김준섭은 기관총부대를 거느리고 엽정선견부대의 공격을 협조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후 김준섭은 제6군을 따라 강서전장에서 싸우게 되였다. 제1차남창공격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김준섭렬사는 기관총련을 지휘하여 부대의 후위에서 어려운 엄호작전을 수행하였다. 력차 전투에서 승리를 이룩한 혁명군 총사령인 장개석은 손전방군이 다시 역습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는 참모진의 권유에도 마다하고 수비를 소홀히 했기때문에 손전방군의 역습을 받았던것이다. 다행히 북벌군 작전부에서 감강에 미리 다리를 놓았기때문에 주력부대는 쉽게 다리를 통해 강을 건너 철수할수 있었다. 치렬한 전투에서 김준섭렬사는 탄약이 떨어질 때까지 싸우다가 대오의 뒤를 밟아 홀몸으로 퇴각하였다.

  무사히 포위를 뚫고나온 북벌군은 부대를 정비한 다음 새로운 전투를 준비하였다.

  11월초 북벌군은 제2차남창공격전을 개시하였다. 남창시 교외의 주요화력거점인 락화역을 점령하기 위해 김준섭은 기관총부대를 거느리고 락화역으로 돌진하였다. 그는 기관총 3정을 지휘하여 역전의 적군보루에서 퍼붓는 적의 화력을 진압하면서 공격의 길을 헤쳐놓았다. 11월 19일 오후 화력망을 조직하기 위해 비발치는 탄우속을 달리던 그는 복부에 적탄을 맞고 쓰러졌다. 전우들이 달려와 그를 구원하려 했지만 피를 너무 많이 흘린탓으로 우리 민족의 자랑찬 영웅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북벌군장병들은 우수한 조선인 기관총교관 김준섭의 두려움 모르는 희생정신에 감화되였다. 그들은 교관의 원쑤를 갚자고 웨치면서 재차 적진을 향해 돌진하여 락화역을 탈환하였다.

  제2차 남창공격전의 유명한 전적지였던 락화역은 남창시중심에서 18킬로메터 떨어진곳에 위치했다. 남창시 신건현 락화진에 위치한 락화역으로는 중국 남북대동맥인 경구철도가 통하고있다. 낡은 역은 사라지고 지금은 새로운 2층건물이 축조되여있었다.

  전투가 끝난후 북벌군은 김준섭렬사를 위해 성대한 추도회를 가졌다. 그리고 남창시 교외 청운보에 북벌렬사기념비를 세우고 김준섭렬사와 기타 희생된 렬사들을 기념하였으며 또 남창시 진현문외의 피장구에 그의 묘소를 만들었다고한다. 묘소에는 '조선 김준섭동지지묘(朝鲜金俊燮同志之墓)'라고 썼다. 하지만 지금 청운보의 북벌렬사기념비나 김준섭렬사묘소는 모두 파괴되여 없었다. '문화대혁명'시기 극'좌'적인 사상의 영향으로 하여 기념비를 폭파해버렸다고 하였다. 강서혁명기념당 일군들이 북벌전쟁은 국민당이 주도했기때문에 없애버렸을것이라고 전했다.

  김준섭외에도 혁명군 제6군에는 포병영 영장 리검방, 부영장 권준, 부관 안동만을 비롯한 조선인 장교들이 있었고 제2군에는 포병련 련장 강파(姜波)라는 조선인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북벌전쟁에 참가했는데 엽정부대에만 하여도 160여명의 조선인 장병이 있었다 한다.

  파죽지세로 봉건군벌들을 무찌르고 수억 중국인민들을 크게 고무해주었던 북벌전쟁에서 수많은 조선혁명가들이 두려움없이 싸웠으며 소중한 생명을 바쳤다. 그들은 중국혁명의 승리와 더불어 조선민족의 독립과 해방의 그날이 꼭 오리라 굳게 믿고 싸웠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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