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강신문=하얼빈 2007. 01.10)
강서성 소재지인 남창은 중국공산당이 령도한 남창봉기로하여 영웅의 도시로 불리우고있다. 지금도 남창시에는 남창봉기기념관, 엽정과 하룡지휘부 옛건물을 비롯한 주요 사적지가 남아있다.
남창봉기기념관은 중산로(中山路) 세마지(洗马池)에 위치했다. 번지수는 중산로 48번이였다. 지금 그곳에는 남창봉기시 지휘부로 사용하였던 강서대려사(江西大旅社) 옛 건물이 그대로 보존되여있다. 건물은 돌로 된 회색 4층건물이였는데 중국식과 서양식이 어울린회(回)자형 건물이였다. 건물은 지금 기념관으로 사용되고있었다.
건물앞에는 남창봉기 주요 지도자들인 주은래, 주덕, 엽정, 하룡, 류백승의 동상이 있었고 그 뒤에는 낫과 망치가 새겨진 붉은기가 펼쳐져있었다.
1927년 장개석은 손중산의 혁명사상을 배반하고 총칼을 중국공산당에게 돌렸기에 제1차국내혁명은 실패하고말았다. 국민당은 도처에서 공산당을 살해하고 로농대중의 반제반봉건투쟁을 탄압하였다. 중화대지는 다시 암흑기에 처하게 되였다. 백성들은 끊임없는 전란을 겪게 되였고 더욱 많은 군벌들이 세력확장을 위해 갖은 수단으로 백성들의 고혈을 짜냈다. 그러나 혁명의 불씨는 영원히 꺼버릴수 없었다. 중국공산당은 반제반봉건의 력사적과업과 피압박인민의 해방투쟁과업을 짊어지고 무장항쟁의 길을 선택하였다.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민족의 독립과 자유, 동방피압박인민의 해방을 위해 중국에서 싸우던 수많은 조선혁명가들도 중국공산당과 함께 항쟁의 길에 나섰다.
8월 1일 중국공산당은 남창경내의 혁명적군인들을 이끌고 남창봉기를 일으켜 국민당에 항거하는 첫 총성을 울렸다. 많은 조선혁명가들도 이에 동조해 남창봉기의 적 총지휘부 공격전, 남창 공원(贡院)공격전, 송백항(松柏巷) 천주교회당전투에 참가하였다.
강서대려사는 1922년에 축조된 건물로서 당시 남창에서 가장 좋은 호텔이였다. 봉기를 앞두고 하룡이 호텔을 임대해 봉기 총지휘부로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주은래를 비롯한 봉기 주요지도자들이 이곳에서 거취하면서 봉기준비를 하였던것이다.
1927년 7월 왕정위의 무한정부는 공산당을 반대하는 조건으로 남경정부와 합류함으로써 국민당내의 통일을 실현하고저 하였으나 장개석은 이를 무시해버렸다. 그리하여 7월 17일 무한정부 군사위원회는 출병하여 장개석을 토벌하기로 하였다. 명령에 따라 무한정부의 통제를 받던 각 부대는 장강을 따라 강서 경내에 들어왔다.
이때 무창수비를 맡았던 엽정은 장개석의 남경정부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11군 24사의 1만 2,000여명 전사들을 거느리고 구강(九江)을 거쳐 남창에 입성하였다. 이 부대에는 길림성 룡정 개산툰출신인 박인(朴仁), 흑룡강성 녕안의 방월성(方月星), 김철강(金铁钢)을 비롯한 조선인 장병들이 있었다.
남창에 들어온 엽정은 백화주(百花洲) 동호(东湖)옆에 위치한 심원중학(沁远中学)에 11군 지휘부를 설치하였다. 100여년의 력사를 자랑하고있는 남창시 심원중학교는 지금 남창시 제2중학교로 명칭을 바꾸었지만 당시 엽정의 사령부 옛터를 계속 보존하고있었다.
새로 축조된 학교 주청사와 운동장을 지나면 해묵은 나무 두그루가 우거진 사이로 낡은 벽돌건물이 보인다. 2층으로 된 이 건물앞에는 ≪엽정지휘부구지(叶挺指挥部旧址)≫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엽정은 2층에 지휘부와 전화통신실을 설치하고 아래층에 경위원을 배치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남창봉기의 천주교회당전투와 공원전투, 신영방(新营房)전투를 지휘하였던것이다.
엽정부대가 구강을 거쳐 남창에 진입하였을 때 제2단계 북벌에 참가해 혁혁한 공훈을 세운 하룡부대도 구강을 거쳐 남창에 도착하였다. 독립 15사로 북벌전에 참가한 하룡부대는 수차의 전투에서 승전하고 20군으로 확대되였던것이다. 이 부대에는 강석필(姜锡弼), 김래준(金来俊), 홍범기(洪范基)를 비롯한 수십명 조선인 장병들이 있었다. 의렬단 단장인 김원봉도 하룡부대에 편입되여 남창봉기에 참가하였다. 의렬단 단원이였던 류자명의 회억에 따르면 당시 국민당의 탄압이 컸기때문에 조선혁명가들도 피해를 많이 보았다 한다. 제6군 포병영 영장이였던 리검운은 소속부대에 체포되였고 부영장인 권준과 부관인 안동만(安东满)은 각기 호남성과 남경으로 피신하였다. 시국이 이처럼 살벌해지자 김원봉은 무창을 떠나 구강으로 가 하룡부대에 편입되였던 것이다.
7월 25일 왕정위와 장발규는 려산(庐山)회의를 소집하고 하룡을 불렀지만 그는 응하지 않고 남창의 중화성공회(中华圣公会)에 20군 지휘부를 설치하고 공산당과 함께 남창봉기를 준비하였다.
하룡의 20군 지휘부 옛터는 남창시 자고로(子固路) 165번지에 위치해있었다. 당시 하룡은 지휘부의 두 건물가운데서 한 건물을 20군 군부사무실로 썼고 류백승, 운대영이 다른 한 건물에서 함께 사무를 보았다. 원래 중화성공회 굉도당(宏道堂)건물이였던 하룡지휘부 옛터는 지금 기념관으로 개방되여있었다.
엽정부대와 하룡부대가 입성하자 공산당이 장악한 부대가 우세를 차지하였다. 이 두 부대와 주덕이 거느린 군관교육퇀(军官教育团)의 부분적 장병 그리고 남창부근의 회마령(回马岭)에 주둔한 주사제의 부대까지 합치면 총수가 근 4만명에 달했다. 이와 반대로 국민당은 제5로군(第五路军) 총지휘인 주배덕(朱培德)이 본부를 거느리고 강서성 수비를 맡고있었다. 그는 남경정부와 무한정부사이에 끼여 시국에 대해 관망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그는 주력부대를 강서성 남부 길안(吉安)에 주둔시켰고 9군은 동향(东乡), 진현(进贤)부근에 배치하였다. 그리하여 남창시와 근교에는 제5로군 총지휘부와 경비퇀(警备团) 그리고 부분적인 부대만 있었다. 총수는 약 1만명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