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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땀 한땀의 오색실에 전통공예의 매력 숨어있다
//hljxinwen.dbw.cn  2024-12-31 15:57:22
     ‘며느리들의 살림솜씨’라는 민간이야기가 있다.   
      옛날 어느 큰 부자집에서 며느리를 구할 때가 되였다. 재산을 잘 관리하고 늘일 수 있는 총명한 며느리를 구하려니 걱정이 많았다. 그래서 방을 걸고 며느리 되기를 자청하는 처녀를 모집하여 따로 살림집을 내여주고 일정한 량의 식량을 주어 한달을 살게 했다. 많은 처녀들이 재산을 탐내 지원하였으나 주어진 식량이 터무니없이 적었으므로 도무지 견딜 수가 없어 하나둘 물러났다.   
     그런데 그중의 한 처녀만은 류달랐다. 그녀는 ‘시집’에서 준 식량으로 먼저 밥 한끼 배불리 지어먹고 나머지 쌀로는 떡을 빚어 마을사람들에게 고루 돌렸다. 시중드는 하녀가 앞으로 어떻게 지내려고 그러느냐고 걱정하니 처녀는 새물새물 웃으며 마을사람들에게 삯바느질할 것이 있으면 거두어 오라고 한다.  
 

      1983년, 류송옥은 자수공방을 차렸다.   

      떡으로 인심을 베풀었기 때문에 동네 부녀자들은 다투어 일감을 보내왔다. 처녀는 옷감의 색갈과 질감에 따라 어울리는 실과 바늘을 골라서 정성껏 바느질을 했다. 해진 소매에는 곱게 핀 꽃을 수놓고 구멍난 바지 무릎에는 나비가 앉은 아름다운 문양을 수놓았다. 처녀의 손길이 닿은 옷들은 이렇게 새옷처럼 곱게 변했고 마을사람들 또한 처녀의 손재간에 저마다 탄복해마지 않았다. 한편 처녀는 삯바느질로 한달 내내 먹을 걱정, 입을 걱정 하지 않게 되였을뿐더러 많은 식량을 모을 수 있었다. 부자집에서는 크게 만족하여 기꺼이 처녀를 며느리로 맞아들였고 처녀 또한 시집을 가 재산을 잘 관리하여 더 큰 부자가 됐다고 한다.   
     이 민간이야기에 얽힌 우리의 수놓이는 긴긴 세월 전래되여오다가 어느 날인가 성급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기능 보유자 대표로 류송옥 장인을 알게 된다. 
 

     류송옥이 재단, 수놓이를 한 활옷.   

     류송옥은 우리 지역에서 유일한 조선족수놓이 대표 기능 보유자이다.   
     겨울바람이 차겁게 부는 날, 그녀의 작업실, 재빛이 끼여들 틈이 없다.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색갈의 전통복장들이 빼곡이 들어차있다. 물론 그녀의 작품들이다. 바늘 하나로 옷 짓는 일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장인의 세계이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여있는 수틀 우에 새빨간 비단천이 놓여있다. 그녀의 정성스런 손길을 따라 바늘과 실이 물 흐르듯 흘러내린다. 비단천에 꽂힌 바늘을 타고 한올 한올 색실이 내려와 천 속으로 스며든다. 어느새 가느다란 색실은 붉은 태양이 되고 화려한 모란꽃으로 피여나고 한마리의 봉황이 돼 날아오른다.   

      수놓이를 하는 류송옥.   

      바느질을 잘했다는 그 민간이야기 속 처녀의 모습이 저러했을가? 장인의 솜씨를 보고 있자면 마치 한폭의 동양화가 완성되는 과정을 보는 듯하다.   
      류송옥은 “수틀 앞에 앉아서 수를 놓으면 모든 잡념도 사라지고 밤새는 줄도 몰랐습니다. 저도 모르게 수놓이의 매력에 빠져들게 됐고 결국 평생을 수놓이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 옛날, 녀인들에게 바느질은 반드시 갖추어야 할 중요한 덕목의 하나로 여겨졌다. 옷을 지을 때는 바늘 한땀이라도 소홀히 하지 않고 때를 가려서 옷 마르기 좋은 날과 피해야 하는 날을 정해두었고 동지날의 양기를 받으면 좋다고 하여 동지날 시어른의 버선을 지어 그 양기를 밟기도 했다. 바느질할 때에도 옷에 때가 묻거나 일하던 중간에 도구나 재료가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미리 준비해야 했다. 그래서 바느질 한땀 한땀에는 녀인의 정성과 사랑, 소망이 깃들어있었다.  
 
      바늘 하나로 옷 짓는 일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장인의 세계이다.   
      우리 선조들은 어떤 옷매무새로 맵시를 뽐냈을가? 수놓이였다. 한때 비싼 천에 고운 색실로 수놓아 온갖 사물을 표현한 수놓이는 민간착용이 금지된 최고 사치품이기도 했다.   
      수놓이는 동양권은 물론 서양에서도 성행했는데 그 가운데서 우리의 전통수놓이는 부드러운 선과 대담한 생략법을 구사해 그 품격을 높이 인정받았다.  
      고대 력사문헌에는 우리 민족 녀성들이 먼 옛날부터 수놓이를 해온 기록이 있다. 《삼국지》에는 부여국(기원전 3세기)의 귀족들이 다른 나라에 방문갈 때 수놓이무늬가 있는 비단옷을 입었다고 기록되여있다. 또 고구려 의복은 모두 비단에 수놓이무늬를 돋힌 것이며 금은으로 장식했다고 기록되여있다. 이는 이 시기에 이미 방직물과 수놓이공예가 널리 활용되였음을 증명한다. 신라에서도 수놓이의복이 많이 류행되였고 수놓이가사(북료복식)도 출현했다.   
      고려시기에 수놓이공예는 새롭게 발전한다. 이 시기 상업과 대외무역이 전례없이 활발하여짐에 따라 수놓이공예품은 대외무역의 주요품종의 하나로 됐다. 고려시기에는 수공업관청인 상의국, 액정국, 도염서 등을 설치하여 여러가지 천과 수예품들을 전문적으로 제작했다. 고려시기의 수예는 그 조형적, 예술적 형상력이 매우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조선시기에는 수놓이공예가 더욱 높은 발전을 이룩했다. 이 시기에 염직술과 수놓이공예품 제작이 보다 세분화되고 발전되였다. 또한 도시의 일반계층 녀성들과 농민녀성들 속에서도 수놓이와 수놓이공예품 제작이 활발히 진행되였다. 궁중의 궁녀들에 의한 ‘궁수(궁중 자수)’와 민간의 녀성들에 의한 ‘민수(민간 자수)’가 서로 뚜렷한 특징을 가지고 발전했던 셈이다.   
      문무관의 신분과 계급을 구별하기 위해 관복의 앞뒤에 각기 다른 문양의 흉배를 착용하는 제도가 제정됨으로써 수놓이의 수요는 더욱 커졌다. 한편 민간에서는 부녀자들을 중심으로 의복은 물론 베개모, 방석 등 일상 용품에까지 수놓이가 폭넓게 적용되면서 생활의 일부로 정착됐다.   
      궁정에서 발전한 궁수는 대체로 꼬지 않은 비단색실로 수놓은 것인데 표현수법이 정밀하고 색상에 있어서도 세련된 느낌을 주거나 귀족들의 취미에 따라 규범화된 수본에 의하여 만들어졌으므로 격식화되여 있었다.   
      민수는 틀에 박힌 수본이 없이 각자의 기호와 취미에 따라 본 대로, 느낀 대로 수놓아진 것으로 정교하지는 못하나 소박하고 해학적이면서도 생기가 있었다. 민수는 종류에 있어서도 베개모, 이불, 주머니, 방석, 골무, 바늘꽂이, 댕기, 모자, 버선, 수건, 어린이장식띠 등 종류가 다양했다.   
      민수는 또 궁수와 달리 지방적 특징이 강했다. 조선시기에는 자유분방한 솜씨로 엮어지는 민수의 급격한 발전에 의하여 수놓이공예의 표현 수법과 기교가 이전 시기보다 더 다양해지고 그 형상력도 한단계 높아졌다.   
      19세기 말엽부터 조선인들이 대량으로 중국에 이주하면서 민간에서 류전되던 민수기법도 그대로 전승되여왔으며 그것이 조선족 지역사회의 복식문화의 변화와 발전과 함께 나름의 조선족수놓이로 자리매김을 했다. 20세기 50, 60년대 연변의 조선족마을들은 거개가 전통 복장과 수놓이를 일삼는 재봉점이 있었고 손끝이 여문 녀성들은 거의다 수놓이를 할 줄 알았다.   
      1956년 룡정에서 태여난 류송옥은 갓 20살을 넘기던 그해, 마을에서 수를 잘 놓기로 소문난 친척 이모 황해월로부터 옷고름에 수를 놓는 기초적인 기능을 배워 익혔다. 어려웠던 시절, 손재간 하나를 더 익혀 먹고사는 데 보태기 위해 시작했던 일이였다.   
     “이모가 수를 놓다 잠시 자리를 비우면 얼른 수틀에 가서 앉았죠. 어릴 때이니 뭘 제대로 할 줄 알았겠어요. 이모의 작품을 망치기 일쑤였지만 이모는 한번도 혼내지 않았고 늘 ‘잘한다, 참 예쁘구나’ 해주셨죠. 그만큼 수를 놓는 것이 좋았어요.”   
     이후 전효순, 전옥실, 최어금 등 그 당시 수놓이로 소문을 놓았던 이들을 만나 조선족수놓이에 대해 깊이있게 배우게 되였는데 특히 최어금 스승에게서 침선에 수놓이를 접목시키는 특수 기법을 완벽하게 전수받았다.   
     류송옥의 타고난 재능과 식을 줄 모르는 열정, 끈질긴 인내력은 그를 조선족수놓이의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한다. 1983년, 그는 룡정에 ‘조선족수놓이연구실’을 개원해 주부들을 상대로 전통수놓이를 전수하기 시작했다. 2000년에는 또 례미민족복장유한회사를 설립하고 산하에 복장가공공장과 조선족 전통복장 전문점을 세웠으며 이를 복장, 수놓이, 염색을 일체화한 생산업체로 부상시켰다.   
     자수에 대한 그의 자부심과 애정은 2003년에 그 빛을 발했다. 그해 10월 중국문화중심이 프랑스 빠리에서 개최한 중화민족복식전람회에 류송옥이 직접 디자인하여 만들고 수를 놓은 조선족 전통복장이 무대에 오르면서 우리의 전통수놓이의 아름다움을 전세계에 알리는 데 역할을 했다.   
     지금도 연변도서관이나 연변박물관에서 열리는 우리 지역 전통공예품전시에는 류송옥의 활옷, 베개모, 방석, 귀주머니, 수저주머니와 같은 수놓이 작품들이 어김없이 전시된다.   
     이런 전시물들은 결과적으로는 무척 화려한 것이지만 그 제작 과정은 더디고 고단하다. 수개월이거나 수년이라는 오랜 시간을 들여서야 작품 하나가 완성될 때가 많다. 그리고 실을 고르는 과정으로부터 시작해 수를 놓고 그 후의 관리과정까지 어느 하나 쉬운 부분이 없다.   
     류송옥은 “수놓이는 시간과의 싸움”이라고 했다. 정식 입문 이후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바느질을 련습했다. “익숙해지려면 자꾸 반복하는 것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떤 기능이든 하루를 련습한 사람과 열흘을 련습한 사람, 1년을 련습한 사람이 다를 수밖에 없다.”며 “책읽기를 좋아했지만 바느질을 시작한 뒤에는 전문서적만 봤다.”고 했다.   
     “하지만 요즘은 세상이 변했습니다. 젊은이들이 웬만해서는 수놓이 문을 두드리지 않아요. 전통수놓이가 너무 힘드니까 배우려고 나서는 사람이 없는 거죠.”   
     모직기계 등의 발달로 전문적으로 수를 놓는 장인들이 설자리를 잃기 시작한 것도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산업구조의 재편으로 인한 생활의 현대화로 전통문화 전승기반이 취약해질 대로 취약해진 실정이다.   
     “아무튼 누가 시킨다고 억지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삼아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그저 좋아서 해야 평생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류송옥은 인터뷰 나중에 이 같은 말을 남겼다. 마음가짐을 얘기하는 듯싶은데 눈빛에서는 조선족 전통수놓이의 어여쁨을 알아봐주고 얼싸안아줄 차세대 누군가에 대한 기다림 같은 것이 보였다…

  출처:연변일보

  편집:김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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