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녀자축구운동은 유럽의 발달한 나라들보다 늦게 시작되였으므로 토대가 박약하였다. 그러나 그 발전속도는 세계를 놀래웠다.
불과 3~4년이 안되여 우리 나라 녀자축구 수준은 인차 세계 선진행렬에 들어서게 되였다. 선진행렬에 진입하게 된 여러가지 원인 가운데서 가장 홀시할 수 없는 조건 가운데 하나가 바로 중국녀성들의 신체소질이 좋은 것이다. 하지만 이런 조건외에도 가장 주요하고 유리한 조건은 대부분 선수들이 다른 운동종목에서 일정한 능력을 가지고 활약하다가 축구종목으로 넘어왔기에 기초가 좋다는 그 점이다.
비록 녀자축구운동은 신흥종목이였으나 각 성, 시에서는 지도부로부터 중시하고 경제면에서나 최우수지도 배비면에서 대폭적으로 뒤받침하여주었기에 중국 녀자축구는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연변녀자축구팀의 정황은 이와는 매우 달랐다. 연변녀자축구팀에는 비록 국가녀자축구훈련팀 선수로 선발되여 우리 나라 녀자축구운동력사에 이름을 남겨놓은 조선족선수 리화련, 안영실, 장어금, 박순애, 리미화 등 5명의 우수한 선수가 있었지만 우에서 서술한 다른 성, 시의 우월한 조건이 마련되기 어려웠다.
우선 경제력이 약했고 다음으로는 과학적인 관리가 안받침되지 못하였다. 하여 ‘고난의 행군 길’에 들어선 연변녀자축구팀은 객관상 악렬한 환경 속에서 심리적인 고통의 타격을 받았으나 누구나 이를 마다하지 않고 구슬땀을 흘려가면서 모든 정력을 훈련에 집중시키느라고 갖은 노력을 다하였다. 이렇게 애를 썼지만 경기성적은 좀처럼 올라가지 못하고 내려만 갔다.
당시 주체육운동위원회의 상황을 놓고 볼 때 길림성남자축구팀마저 꾸려나가기 어려운 경제형편에서 곤경에 빠진 녀자축구팀을 계속 꾸려나갈 경제적 힘은 더욱 없었다. 막부득이한 형편하에 주에서는 연변녀자축구팀을 당시 화룡현체육운동위원회에 넘겨주지 않을 수 없었다.
주에서도 꾸려나가기 어려운 연변녀자축구팀을 더구나 하나의 자그마한 현에서 꾸려나간다는 것은 실로 아름찬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여 날로 악화되는 경제적 조건으로 말미암아 부득불 연변녀자축구팀을 해산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1988년 4월에 연변녀자축구팀은 마침내 녀자축구운동사에서 종지부를 찍고 말았으며 연변 각 중소학교에서 꾸리던 녀자축구팀마저도 앞길이 막막한 나머지 너나없이 해산을 선포하군 하였다.
료해한 데 의하면 현재 연변에는 녀자축구팀이 있는 중소학교가 없다고 한다.(몇년 전 화룡시 팔가자진상남소학교에 녀자축구팀이 있었댔음.) 이렇게 10여년간 들끓던 연변녀자축구운동사에 있어서 가장 유감스러운 것이란 녀자축구건장들을 비롯한 수준급 녀성코치들도 양성해내지 못한 것이다.
현재까지 다년간 연변에서는 날로 흥성해가고 있는 다른 성, 시 녀자축구운동 현황을 바라보면서 기약 없는 앞날을 묵묵히 기대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해있고 그제날 활성화를 이루었던 녀자축구 진풍경은 이제 과거사로 되여버린 지 오랜 것이다.
하지만 지난날 20세기 80년대를 돌이켜보면 당시 연변의 녀성축구맹장들은 국내외 축구장을 부지런히 누비면서 뛰여난 기교와 완강한 투지를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국내의 축구팬들로부터 중국의 축무무대에서 ‘화려하게 피여난 진달래’로 높이 떠받들리면서 연변을 위해 영예를 빛냈었다.
비록 연변의 조선족 녀자축구선수들이 쌓아올린 업적과 시간은 짧았지만 연변 녀자축구운동의 발전을 위하여 특별한 기여를 한 연변녀자축구팀(화룡현 투도2중 녀자축구팀 주축)의 력사는 세세손손 멀고먼 후세까지 긴 여음을 남기면서 전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출처:연변일보
편집:김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