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100년간 파란만장한 세월을 거치고 힘겹게 한세기를 걸어오면서 만리강산 곳곳에 빛나는 붉은 발자취를 남겼다.
항일련군의 전쟁의 불길이 타올라서부터 황무지를 개간하기에 이르고, 대국의 중점 사업 추진에서 북쪽 전선으로 향하면서 백년간 "붉은 발자취"는 천년동안 깊이 잠들어 있던 흑토지를 깨웠다.
흑룡강텔레비전방송 뉴스프로그램 위챗공중계정은 대형 특별프로 "동방홍에서 태양승까지"--클라우드에서 만나는 흑룡강성 100대 "붉은 발자취"를 선보여 3갈래의 발자취를 따라 시공간을 넘어 잘 알려지지 않은 파란만장한 "붉은 력사"를 되새겨본다.
제83역 동북항일련군정치군사학교유적
흑룡강성 이춘시 삼림공원 내에 동북항일련군정치군사학교유적기념비가 세워져 있는데 이곳이 항일련군에서 군정간부를 육성하는 요람이였음을 영원히 기념하고 있다.
1936년 1월 26일, 동북민중반일련합군 군정확대련석회의에서는 '군정간부를 대량 교육 및 육성하기 위해 동북민중반일련합군 정치군사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조상지(赵尚志)가 교장직을, 리조린(李兆麟)이 교육장직을 맡았다. 회의가 끝난 후 조상지와 리조린은 탕왕(汤旺)하곡근거지를 개척하고 군사기지와 정치군사학교를 건립할 데 대해 계획했다.
날씨가 화창한 4월의 어느 날, 동북항일련군정치군사학교가 목각릉(木刻楞) 건물에서 개학식을 가졌다. 조상지는 "항일련군부대에 정치립장이 굳건하고 유격전술에 능통하며 지휘에 뛰여나고 대중을 상대로 한 업무를 잘 할 줄 아는 간부를 육성하는 것이 발등에 떨어진 불로 되였다. 수강생 개개인의 정치와 군사, 문화수준을 향상시키는 것이 우리가 학교를 설립한 목적이다."고 말했다.
조상지
군사학교의 학습환경과 생활조건이 극히 간고했다. 수강생들은 산에서 자작나무껍질을 벗겨 필기책으로 사용하고 불에 태운 목탄으로 연필을 대체했다. 학교에 늘 먹을 식량이 없어 수강생들은 산에서 산나물을 캐거나 야생과일을 따다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군사학교는 '림시요강초안', '군사교육대강', '규률상세규칙초안', '학생위원회요강' 등 세칙과 규장제도를 제정하고 군사학교의 성질, 학교운영 취지와 목표를 명확히 하였으며 정확한 학교운영방향을 견지했다.
리조린과 풍중운(冯仲云)은 차례로 교육장직을 맡았다. 그들은 교과서 편찬을 직접 조직하고 교학을 연구하는 한편, 학교관리 등 업무도 개진했다. 조상지는 북만성위 설립 후의 두번째 서쪽 정벌 전에 군사학교에서 15일간 머물면서 교학업무를 총화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군사학교는 총 3기를 개설하고 학교 주소는 차례로 쌍자하반(双子河畔), 이춘하(현재의 이미구)북산과 취란(翠峦)의 로영반에 설립하였으며 수강생이 250명에 달했다. 항일련군 로전사가 기억해낸 수강생의 이름은 총 49명이였다.
1936년의 늦은 봄, 적의 무선통신기 로획을 계기로 조상지는 전신학교 설립을 제기하고 우리 군의 전신인재 육성에 뛰여들었다.
1936년 7월 파란하곡(巴兰河谷) 장목영자(张木营子) 밀영(이불복장공장)에 동북항일련군제3군사령부 전신학교를 설립했는데 그 당시 수강생이 총 9명이였다. 교과과정은 무선통신기술을 주로 하고 전기학, 전기공학원리, 무선통신 기초지식을 가르치는 외에도 실천수업을 개설해 전보 수신과 발송을 가르쳤다. 1936년 12월, 항일련군정치군사학교와 합병했다. 전신학교가 항일련군 각 군, 각부를 위해 무선통신인재를 육성함으로써 로획한 적들의 무선통신기계가 전쟁 중에서 우리군에 활용될 수 있도록 큰 역할을 발휘했다.
/동북망 조선어채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