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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홍에서 태양승까지]영용한 '정보계의 두 별'-장영흥, 장극흥
//hljxinwen.dbw.cn  2021-06-02 09:55:00

  올해는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100년간 파란만장한 세월을 거치고 힘겹게 한세기를 걸어오면서 만리강산 곳곳에 빛나는 붉은 발자취를 남겼다.

  항일련군의 전쟁의 불길이 타올라서부터 황무지를 개간하기에 이르고, 대국의 중점 사업 추진에서 북쪽 전선으로 향하면서 백년간 "붉은 발자취"는 천년동안 깊이 잠들어 있던 흑토지를 깨웠다.

  흑룡강텔레비전방송 뉴스프로그램 위챗공중계정은 대형 특별프로 "동방홍에서 태양승까지"--클라우드에서 만나는 흑룡강성 100대 "붉은 발자취"를 선보여 3갈래의 발자취를 따라 시공간을 넘어 잘 알려지지 않은 파란만장한 "붉은 력사"를 되새겨본다.

  북위 53°27′00″부터 53°33′30″ 사이에, 중국 최북촌락인 북극촌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 흑룡강은 중국 판도 최북쪽의 륜곽을 그려내고 이곳에서 북극의 별이 신주대지를 밝게 비추었다. 우리 함께 북상하여 '항일 첫 총성'의 메아리에 귀를 기울이고 항일투사들의 사적을 되새기며 대국 중기의 굴기를 견증하고 림구 전형의 맥락을 거슬러올라가본다. 홍색 빛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국기가 하늘높이 훨훨 휘날리는 곳을 따라 줄곧 북쪽으로 올라가보자.

  제72역 치치할비밀전선

  항일전쟁시기, 항일대오가 치치할에 은페해 활약하면서 일본침략자들과 총성이 없는 전투를 펼쳤는데 그들이 바로 공산당국제극동정보소 치치할지점 정보일군들이다. 그들은 선혈과 목숨으로 하나 또 하나의 가치있는 정보를 바꿔와 항일전쟁의 최종 승리에 불멸의 공헌을 했다.

좌:장영흥 우:장극흥

  1934년부터 1936년 사이 중공만주성위는 당중앙의 지시에 따라 동북인민혁명군을 건립해 항일유격전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일본괴뢰군과의 작전과정에 군사정보가 극히 중요했다. 따라서 당과 각지 동북인민혁명군 모두 정보업무를 높이 중요시하면서 자체의 군사정보조직을 건립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당조직은 장영흥(张永兴)동지를 파견해 한 정보조직을 령도하고 치치할에서 비밀리에 정보업무를 조직하도록 했다. 장영흥은 1932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1933년 상급조직에 의해 소련의 하바롭스크 극동군구 정보부로 파견되여 정보업무기술을 학습했다. 1934년 학습기한이 만기된 후 흑룡강 성회인 치치할로 파견되여 비밀리에 지하국제군사정보소를 조직건립했다.

  1934년 년말의 어느 날, 그는 친척방문 온 동북사람으로 가장한채 쥐도새도 모르게 무선통신기를 집까지 옮겨왔다. 정보조직이 꾸준히 발전장대해짐에 따라 1935년 년말, 정보소에서 일하고 있는 골간정보일군이 20여명에 이르렀다.

        장극흥(张克兴)은 장영흥의 친동생이다. 그는 형님의 영향 하에 견강한 혁명자로 자라났다. 장극흥은 특별히 소련에서 무선정보수신발송기술을 학습했으며 정보수신발송기의 안장, 분해, 고장배제 등에 대해 모두 숙련하게 장악했다. 장극흥은 늘 심야까지 업무를 보았을 뿐만 아니라 무선전신의 파장과 주파수를 경상적으로 바꿔 치치할 주재 일본군 무선전신소 및 위만주전신국은 줄곧 무선통신기 소재위치를 파악하지 못했다.

정보소 방송국설치처

  1936년 9월 20일, 반역자가 배반한 탓에 치치할 지하정보소가 폭로되였다. 장영흥은 통신원이 실종된 사실을 확인한 후 바로 치치할로 돌아왔다. 그때 그는 자신의 집도 이미 적에 의해 감시되고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는 집으로 서둘러 돌아와 숨겨두었던 무선통신기, 정보수신발송기, 수집정리한 수백건의 일본군 정보를 옮겨려고 작정했다. 그러나 창고 문어구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적들에 발각되였다. 뒤이어 장극흥도 집으로 돌아와 무선통신기와 정보를 이전하려다가 불행하게도 일본군에 체포되였다.

  장영흥, 장극흥 등이 체포된 후 일본 관동군 건립 이후 최대 규모의 '간첩사건'이 해명되였다. 적들은 온갖 악형으로 자백을 강요했다. 그러나 장영흥은 "아무리 물어봐도 소용없다. 죽을지언정 절대 말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나라를 침략한 네놈들에게 내가 어찌 투항할 수 있단 말이냐?"란 말만 반복했다.

  1937년 1월 5일, 사형에 처하기 직전 장영흥, 장극흥은 얼굴에 미소를 띤채 적들을 매섭게 노려보면서 결국 영용하게 목숨을 바쳤다. 희생될 때 장영흥은 41살, 장극흥은 고작 26살이였다.

  /동북망 조선어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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