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전쟁시기, 항일련군전사들은 선혈로 흑토벌을 붉게 물들이면서 외적들의 침략에 완강하게 저항했다. '홍색흔적 룡강에' 시리즈 보도는 홍색기록을 통해 동북항일련군의 간고한 전쟁세월을 되돌아본다.
1936년 1월 28일부터 29일 사이, 동북민중반일련군이 탕원현 길흥구에서 군정련석확대회의(즉 탕원회의)를 소집한 가운데 조상지, 리조린 등이 회의에 참석했다. 이번 회의는 동북지역에서 유일하게 중공당사 중대사건에 기록된 당의 회의이기도 하다. 회의에서는 당의 통일적인 령도에 대한 인식을 형성했는바 이는 동북항일련군의 탄생을 의미한다.
군정간부를 교육하고 육성하기 위해 탕원회의에서는 동북항일련군정치군사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학교는 현재의 이춘시 북산공원 내에 자리잡고 있다. 당시의 학습과 생활조건이 극히 간고하여 학원들은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해야만 했다.
왕력공 이춘시이미구로구건설촉진회 회장에 따르면, 당시 필이 없어 목탄을 태워 필로 사용하고 흑판이 없어 나무조각을 대패로 깍은 후 흑판으로 사용했다. 학교는 총 3기를 개최하여 250명에 달하는 간부를 육성해냈다. 졸업 후, 항일련군부대에 분배되여 정치공작간부와 군사지휘관으로 활약했다. 수강생들은 군을 이끌고 항일전쟁터에서 용감으로 적을 무찔렀을 뿐만 아니라 솔선적으로 모범을 보이고 맨 앞에서 달리며 희생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1987년, 이춘시 북산공원에 동북항일련군군정간부학원기념비가 건설되였다.
수릉림업국과 70킬로미터 떨어진 곳인 장가만농장 린근에 높이가 4.52미터, 길이가 7.56미터, 최장 너비가 약 1미터인 돌이 있는데 형태가 백마와 흡사해 백마석란 이름을 얻게 되였다.
강남남 수릉현위 당교 교원에 따르면, 백마석은 간고한 서정(西征)력사를 견증하고 있다. 1936년, 일본침략자들이 치안숙정(治安肃正)계획을 세웠는데 3년 안팎의 시간을 리용하여 북만 항일련군의 주력부대인 3, 6, 9, 11군을 송화강 하류지역에서 소멸하는 것이였다. 적들의 봉쇄와 '토벌'을 분쇄하기 위해 북만 항일련군 주력군은 전략적 전이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이로부터 항일련군부대는 서정의 길에 올랐다. 1936년, 선견소분대가 수릉현에 도착한 후 밀림속에서 가장 눈에 띄는 큰 돌을 지상표지로 하여 부대가 합류하는 곳으로 정했다. 6개월의 시간동안 세번에 걸쳐 항일련군 서정부대가 륙속 백마석에 도착했다. 이번 합류를 통해 항일련군의 유생력량을 보존함으로써 일본 관동군을 효과적으로 견제했다.
/동북망 조선어채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