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백년 중동철도가 합류하는 곳;
여기는 가장 먼저 맑스레닌주의를 접촉한 중국 로동자운동이 일어난 곳;
여기는 중국공산당이 동북에서 가장 먼저 당조직을 설립한 곳;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의 승리가 중동철도를 통해 중국에 전파되였으며 송화강반의 할빈은 공산주의의 숨결을 느낄수 있었다. 무수한 중국혁명의 선행자들이 할빈을 통해 10월혁명의 성지로 향했다. 이로써 중국동북이 소련과 공산국제로 나아가는 ‘홍색통로’가 형성되였으며 이 홍색통로는 중국에서의 맑스레닌주의의 전파의 길을 넓혀주었다. 한편 이 통로는 중국공산당의 창건과 발전을 추진하고 중국인민과 중화민족의 해방사업에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중국공산당 창건 100주년을 경축하고 당의 분투의 력사를 회고하며 당의 빛나는 업적을 노래하기 위해 동북망은 ‘북방 지난사: ‘홍색통로’ 탐방기’ 특별보도를 기획하고 당의 백년탄생을 축하한다.
할빈시 도외구 정양대가와 19도가 교차하는 곳에 자리한 회색의 2층 집은 과거 리대소(李大钊)의 동창 등결민(邓洁民) 씨가 살던 집이다. 100년 전, 리대소의 소개로 장태뢰(张太雷)는 할빈 동화학교(东华学校) 교장 등결민과 련락이 닿는다. 제일 첫 사람으로 공산국제에 파견된 중국공산당 사자- 장태뢰는 등결민과의 관계를 통해 여러차례 중국과 러시아를 오가며 중국공산당 창당 관련 업무를 둘러싸고 공산국제와 조률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된다.
등결민의 옛 집
1918년4월, 등결민이 할빈에서 동화학교를 설립하자 여러 지식인들이 모여와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들은 새로운 사상을 선전하고 신문화를 전파하며 혁명활동을 전개하였다. 바야흐로 동화학교는 맑스레닌주의를 전파하는 중요한 기지로 거듭났다. 이와 동시에 동화학교는 중국공산당의 할빈 련락소, 환승역 역할을 하게 되였다.
할빈동화학교 옛 사진 복제본
리대소는 장태뢰를 “중서방 문화를 통달한 뛰여난 인재’라고 했다. 등결민의 옛집 앞에서 동북렬사기념관 원점군 연구원은 이렇게 소개했다. 1921년 장태뢰는 소련으로 건너가 공산국제 원동국 서기처에서 중국과 서기를 담당함으로서 공산국제에서 근무를 한 첫 중국공산당원이다. 장태뢰는 리대소가 등결민에게 전하는 소개신을 갖고 할빈으로 와 등결민의 도움으로 동화학교에 묵게 되였다. 그 당시 한창 추울 시기라 등결민은 남방사람인 장태뢰가 추위를 이기지 못할가 난로를 많이 태웠으며 특별히 집에서 두터운 솜이불을 가져왔다. 그리고 학교식당의 주방장에게 야참을 준비해주라고 분부했다.
장태뢰
장태뢰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등결민은 장태뢰에게 낮에는 활동하지 말 것을 부탁했다. 등결민은 믿을만한 러시아어 교원인 장소덕(张昭德)을 주할빈 러시아령사관에 보내 장태뢰의 출국 수속을 하도록 했으며 장소덕에게 장태뢰의 일상 안전에 각별히 신경 쓸 것을 부탁했다.
떠나기 전 등결민은 장태뢰에게 기차표를 구매하고 큰 눈을 무릅쓰며 장태뢰를 만주리로 향하는 기차에 태웠다. 만주리에 도착한 장태뢰는 장소덕의 이종사촌 형의 도움을 받아 소련으로 건너갔다.
1921년부터 1924년 사이 장태뢰는 6차례 러시아를 왕복하였으며 매번 중동철도를 통해 출국했다. 할빈에 머무는 사이 장태뢰는 거의 매일이다 싶이 동화학교 등결민 교장의 사무실에 들렀다.
동북력사기념관 연구원이 기자에게 소개하고 있다.
1920년 봄, 공산국제 대표 브이킨스키 등이 중국을 방문하고 리대소, 진독수와 중국공산당 창당관련 사항을 토론, 장태뢰가 통역을 담당했다. 얼마후 장태뢰는 북경에서 공산주의 소조에 참가하고 뒤이어 천진사회주의 청년단 소조를 설립하였으며 소조의 서기를 담당했다 . 1921년6월, 장태뢰는 공산국제대표 마린 등을 배동하고 여러 차례 북경에 있는 리대소와 상해에 있는 리달, 리한준 등과 의논 후 최종 상해에서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
/동북망 조선어채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