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100년간 파란만장한 세월을 거치고 힘겹게 한세기를 걸어오면서 만리강산 곳곳에 빛나는 붉은 발자취를 남겼다.
항일련군의 전쟁의 불길이 타올라서부터 황무지를 개간하기에 이르고, 대국의 중점 사업 추진에서 북쪽 전선으로 향하면서 백년간 "붉은 발자취"는 천년동안 깊이 잠들어 있던 흑토지를 깨웠다.
흑룡강텔레비전방송 뉴스프로그램 위챗공중계정은 대형 특별프로 "동방홍에서 태양승까지"--클라우드에서 만나는 흑룡강성 100대 "붉은 발자취"를 선보여 3갈래의 발자취를 따라 시공간을 넘어 잘 알려지지 않은 파란만장한 "붉은 력사"를 되새겨본다.
"동방홍 태양승(동쪽 하늘이 붉게 물들더니 태양이 솟아오르네)……" 이는 노래 "동방홍"의 가사 첫소절이다. 우연의 일치라고 해야 할가 '동방홍'과 '태양승'은 흑룡강 경내의 두 기차역의 이름이기도 하다. 저 멀리로 뻗어나간 철로는 마치 우리를 파란만장한 세월 속으로 안내하는 것 같다. 이제 '동방홍'역에서 출발하여 서쪽 '태양승'까지 가는 길에 호두요새(虎头要塞)를 거쳐, 만경량전(万顷良田)을 건너, 북국의 얼음도시의 중후함을 만끽하고 무쇠사람정신의 세례를 거쳐 공산당원의 발자취를 따라 룡강의 100년 발전의 맥박을 짚어본다.
제32역 할빈당사기념관
할빈은 영광스러운 혁명전통을 지닌 영웅도시이다. 중국 공산당의 령도 하에 할빈인민은 민족독립, 인민해방, 번영발전을 쟁취하기 위해 휘황찬 력사 편장을 써냈다.
할빈의 홍색 력사를 전면적으로 기록서술하고 당의 우량한 전통을 고양하기 위한 차원에서 2013년 2월 20일, 할빈 해방 67주년과 '중공할빈조직'설립 90주년을 즈음하여 할빈당사기념관을 정식 개관했다.
할빈당사기념관은 할빈시 저명한 관광 풍경지인 중앙대가 남쪽 끝 동측, 도리구 서15도가 33번지에 위치해 있다. 전에 이곳은 1930년 할빈의 저명한 좌익 문화인사이자 공산당원인 김검소(金剑啸)가 창설한 천마광고사였는데 할빈시 유명한 혁명유적으로 꼽히고 있다. 전시구역 면적이 2100평방미터에 달하는 기념관에는 력사사진 약 천폭, 여러 류형 문물, 전시품 300여 건의 유화, 부조 등 예술품 약 100건이 소장되여 있다.
중국공산당이 할빈에서의 력사는 그야말로 파란만장하고 굴곡적이며 감동적이다.
1907년 5월, 할빈 로동자들이 전국에서 가장 먼저 '5.1'국제로동절 기념활동을 전개했다. 이는 중국 로동자들이 처음으로 자체 명절을 경축한 것이다.
1923년, 동북지역 첫 당조직인 중공할빈조직이 설립되였다.
1923년, '9.18'사변 이후 중공 만주성위가 할빈으로 옮겨오면서 할빈은 동북항일구국운동의 령도중심으로 되였다.
1946년, 할빈이 전국에서 가장 먼저 해방한 대도시로 되였다.
1953년, 할빈은 전국의 중요한 공업기지로서 1.5개년 계획 가운데서 새중국의 건설과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중국공산당 설립전후 마준, 라장룡, 구추백, 주은래 등 초기 중공 당원이 선후로 할빈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전파해 할빈의 당건설에 사상기반을 마련해주었다. 1921년 7월 이후, 중국공산당은 동북지역에서의 조직건립 업무를 보다 중요시하면서 수차 인원을 할빈으로 파견해 고찰하고 혁명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당조직을 건립하도록 했다.
1922년, 중공북경구집행위원회는 라장룡을 할빈으로 파견해 로동자운동 상황 및 당조직 건립을 고찰하도록 했다. 현지에서 고찰을 마친 라장룡은 중공북경구집행위원회에 '동북 로동자 상황과 동북에 당단조직을 건립할데 관한 건의 관련 보고'를 제출했다. 1923년 3월, 중공북경구집행위원회는 라장룡의 건의에 따라 진위인, 리진영을 할빈으로 파견해 당 업무를 전개하도록 했다.
할빈에 도착한 진위인과 리진영은 먼저 할빈의 진보 신문인 '진광보' 신문사를 찾아 기자의 신분으로 업무를 시작했다. 이곳에서 그들은 '진광보' 총편집이자 할빈구국각성단 령도 중 한 사람인 한질성을 알게 되였다. 그 후 진위인, 리진영은 선후로 '할빈통신사', 할빈청년학원을 창설해 진보청년들을 점차 당의 주위에 단결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10월, 진위인의 령도 하에 중공할빈조직이 정식 설립되였다. 이는 동북지역에서 가장 먼저 건립한 당조직으로, 할빈 나아가 전 동북의 혁명투쟁이 새로운 단계로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1931년 9월 18일, 일본제국주의가 중국을 침략하는 9.18사변을 발동했다. 동북3성이 짧은 몇달 사이 일본 외적들의 무자비한 침략을 당했다. 중공만주성위와 할빈시위의 령도 하에 할빈인민은 항일구국운동의 최전선에서 항일구국운동을 적극 전개했다. 그들은 파업, 등교거부, 시위행진, 문화운동, 무장투쟁 등 다양한 형식으로 일본 침략자들과 장장 14년에 달하는 간고한 투쟁을 벌였다.
1932년 2월 5일은 굴욕적인 날이다. 이날 할빈이 함락되면서 10여 만명에 달하는 할빈인민이 이때부터 도탄에 빠지게 되였다. 그 후 중국 공산당의 령도 하에 할빈인민들은 일본제국주의와 완강하게 맞서 싸웠다. 양정우, 조상지, 리조린, 조일만을 대표로 하는 동북항련전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절대 굴복하지 않으며 완강하게 맞서 싸우고 용감하게 적을 무찔렀다.
전시관은 4명 영웅의 유화, 조상지 체포 현상령 및 동북항일련군이 전에 사용했던 무기, 장비, 전리품과 생활용품 등 력사문물을 전시해 그제날 파란만장을 세월을 이야기하고 있다.
1946년 4월 28일, 할빈은 전국에서 가장 먼저 해방한 대도시로 되였다. 그 후 할빈은 당시의 전략 후방으로 되여 특수하고도 중요한 위치에서 막중한 전선지원 임무를 맡았으며 전국의 해방전쟁을 지원함에 있어 큰 공헌을 했다. 1948년, 전국의 저명한 민주인사들이 할빈에 모여 신정권 설립과 새중국 건립을 연구했다.
새중국이 건립된 후 할빈은 국민경제를 빠르게 회복하고 발전시켜 국가에서 중요한 공업기지로 발돋움했을 뿐만 아니라 소비도시로부터 신흥공업도시로 빠르게 전환했다.
오늘날의 할빈은 경제건설과 사회발전에서 거대한 성과를 거두었고 도시 면모와 인민들의 생활에 천지개벽의 변화가 나타났다. 무수한 혁명 선렬들이 선혈과 목숨으로 평생 추구해온 념원이 이미 현실로 되였다. 현재 전국에서 처음 해방을 맞이한 대도시가 름름한 자태로 사회주의 현대화 전면 건설의 새로운 려정을 걸어나가고 있다.
력사는 거울과 같다. 지난날을 비춰줄 뿐만 아니라 미래도 보여주고 있다. 흑룡강성 중공당사교육기지, 성급애국주의교육기지와 미성년사상도덕건설교육기지인 할빈당사기념관에서 할빈 사람들은 꾸준히 영양분을 흡수하며 현대화를 건설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하는 대도시에 새로운 편장을 써내려갈 것이다.
/동북망 조선어채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