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공산당의 백년 분투발전력사에서 룡강 인민들은 당의 령도 하에 앞사람이 쓰러지면 뒤사람이 이어가면서 완강하게 분투했다. 혁명, 건설, 개혁에서 꾸준히 중대한 승리를 거둔 그들은 흑토지에서 인류발전력사상 가장 장려한 서사시를 써내려갔다.
룡강의 우수한 정신을 고양한다.
청춘으로 흑토지를 포옹한다.
여러분들에게 북대황의 열혈분투 력사를 들려준다.
북대황박물관에 들어서면 '개황의 첫 밭갈이'부터 현대화 대형 농기계를 사용하기까지, 한 세대 개황인들이 청춘과 열혈을 쏟던데로부터 북대황에 뛰여들어 '과학기술의 새로운 농업인'이 되기까지, 한장한장의 사진, 한건한건의 물품을 통해 한 갈래 중국 특색의 농업 현대화 길을 펼쳐보이고 있다.
동북근거지를 건립 및 공고히 할데 관한 당중앙과 모주석의 지시에 따라 일부 제대군인들이 북대황으로 건너와 녕안, 조광 등 제1부류 국영농장을 세우면서 북대황 개발건설의 서막을 열었다.
1958년, 성도회의에서 '군인들이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장을 발전시킬데 관한 의견'을 통과시킨 후 중국인민해방군 각 군(병)종 약 10만명이 전국 각지에서 북대황으로 몰려왔다. 왕진 장군은 "총대를 영원히 내려놓지 말자, 사내대장부들은 북대황 건설에 뛰여들자!"라고 호소했다. 박문관의 흑백사진은 그 해 10만 장병이 밀산에 모였다가 도보로 북대황에 진입하는 장면을 재현했다.
같은 시기, 대학교, 중등전문학교 학교들도 북대황건설에 뛰여들었는데 그중의 다수가 개간지구 농학전문가로 되였다. 1958년, 6만명에 달하는 산동 변경지원청년이 북대황으로 달려와 이곳의 개발과 건설에 새로운 힘을 주입하였다. 1968년부터 1976년 사이, 54만명에 달하는 지식청년이 북대황건설에 새로운 힘을 주입하였고 이곳에서 땀을 흘리면서 자신들의 청춘을 바쳤다. 850, 852, 859......북대황에서 걷노라면 군 번호로부터 개편된 농장명칭에서 그 당시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전진, 전봉, 전초......'전(前)'을 돌림자로 하는 농장에서 그 당시 지식청년이 황무지로 호호탕탕하게 진군하던 호방한 모습과 열정을 여전히 느낄 수 있다. 당의 령도 하에 '힘을 모아 대사를 처리한다'는 사회주의 제도 우세를 발휘하여 북대황은 전국으로부터 인원을 집중시켜 대형 농장을 빠르게 건설함으로써 대형 농업기계화 발전을 빠르게 추진했다.
70여년간, 북대황인들은 주목할만한 물질재부를 창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간고분투하고 용감하게 개척하며 전반국면을 돌보고 사심없이 기여하는' 북대황정신을 형성했다. 박물관의 거대한 부조 '북대황사람을 노래하다'는 중국에서 가장 큰 실내 부조이다. 시간을 주선으로, 138명의 인물과 32개 개황이야기를 통해 황무지개간 대군들이 오래된 항무지를 중화의 량식창고로 탈바꿈시키는 황무지개척 신화를 얘기했다. 북대황정신은 인민해방전쟁의 포화 속에서 육성되였다. 광범한 제대군인들이 당중앙의 지시에 따라 극도로 악렬한 자연조건 속에서도 황무지를 개간하여 곡식을 재배하고 농장을 건설하는데 뛰여들었다.
박물관내의 축소판 경관 '초막'은 당시의 정경을 재현했다. 제대군인들이 북대황에 방금 도착하였을 때 살 곳이 없어 나무가지를 꺾고 흑벽돌을 만들어 '초막'을 지었다. 이토록 루추한 거처가 바로 당시 국영농장군의 모형이다. 개발건설 초기의 장병들은 수십일만에 1000여개의 '초막'을 지어냈다. 오늘날, '초막'은 북대황의 간고분투를 설명하는 대명사로 되였다.
북대황인은 량식 생산총량 100억근을 실현하는데 48년, 200억근을 실현하는데 10년, 300억근을 실현하는데 4년, 400억근을 실현하는데 2년의 시간이 걸렸다. 현재 이미 련속 10년간 400억근의 상품식량 생산량을 실현하고 있다. 량식 생산량의 증가는 재배구조 조절과 현대화 농업기계작업 덕분이다. 현재 농간지구의 기계화률이 99.9%에 달한다. 북대황정신은 한 세대 또 한 세대 북대황인들이 끊이없이 분발하여 현대농업에서 립지를 굳히고 온 힘을 다해 '농업령역 항모'를 구축하도록 격려하고 있다.
/동북망 조선어채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