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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친은 출판사업과 문구운동의 발전에 모든 것을 바치셨다
//hljxinwen.dbw.cn  2021-04-06 11:01:00

  

  2021년 2월 25일 오전 6시 50분 병마와 박투하던 선친(김청학)께서는 치료에 효험을 보지 못하고 향년 88세로 총망히 우리곁은 떠나가셨다. 그러나 일편단심 당에 충직한 출판사업일군으로서, 또한 출판사업뿐만 아니라 연변의 문구운동 개척과 혁신발전을 위해 힘다한 그의 뛰여난 공적은 영원히 사책에 기록될 것이다.

  중국인민지원군 전사로부터 출판사업일군으로

  1934년 길림성 훈춘시 반석향 맹령촌의 한 가난한 농민의 가정에서 태여난 선친은 훈춘시 초급중학교를 졸업한후 1950년 12월 만 17세의 나이로 중국인민지원군 수군 공작대 9중대에 편입되여 항미원조전선에 나가 1년동안 근무하다가 1951년 12월에 제대하여 지방에 돌아왔다.

  1952년 3월부터 6개월동안 중공 연변주위 당학교의 전신인 연변정치간부학교에서 진수를 마치고 그해 10월에 연변일보사에 배치되였다. 1960년 11월 29일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정년퇴직 할 때까지 40년동안 줄곧 연변일보사에서 교정조 교정원, 부조장, 연변일보사 인쇄공장 당지부서기 겸 지식청년공장 당지부 서기, 기관당위 부서기 겸 규률검사위원회 서기, 경리처 처장 등 직을 력임했다.

  1991년 중국인민지원군 참전 40주년을 맞으면서.

  선친은 우수한 출판사업일군일뿐만아니라 연변조선족자치주 문구(게이트볼)운동의 창시자이며 연변 문구운동의 개척과 보급 그리고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1994년부터 정년 퇴직후 연변의 문구운동에 참가하였는데 20여년동안 연변문구팀의 선수, 감독, 심판원으로 활약하였다.

  모택동선집 조선문판 출판에 공헌

  연변일보사 교정조에서 사업하는 10여년 동안 선친께서는 뛰여난 실무기능과 높은 책임감을 지니고 신문의 정확성을 위하여 특출한 기여를 하였다. 특히 국내외 중요한 기사가 신문에 실릴 때마다 직접 책임지고 교정함으로써 10년동안 한 번도 사소한 오차가 발생하지 않게 하였다. 그후 검사조에 파견되여 교열을 책임지는 동안 여러차례 오차를 미연에 방지함으로써 동료들로부터 “올빼미 눈”이라고 불리우기도 했다.

  이 같이 뛰여난 실무능력과 까근함으로 선친은 세번이나 북경에 가서 조선문문헌 출판발행 교열사업에 참가했으며 1954년에 소집된 제1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 참가한 조선족대표들에게 나누어 줄 조선문 자료를 교정하는 임무도 훌륭히 완수했다.

  북경 천안문앞에서 부인과 기념사진을.

  1959년 중국공산당 제8차 전국대표대회에 참가한 조선족대표들을 위해 번역, 출판되는 조선문 문건 교열사업에 참가하여 한글자의 오차도 나타남이 없이 임무를 출중하게 완수하였다. 북경에서 사업하는 기간 대회 사업일군의 신분으로 국경 10돐 기념경축활동에 참석하였고 당시 국무원 비서장이였던 습중훈동지의 초청으로 일행과 함께 국경절 기념대회 관례대에 올랐으며 저녁에는 천안문 꽃불야회에까지 참석했다.

  또한 1970년에는 북경에 가서 모택동선집 조선문판제4권 출판, 제1-3권 재출판 및 발행을 위한 교열사업에 참가하여 책임교열을 맡았으며 약 1년간의 시간을 들여 한 글자의 오차도 없이 책 출판의 임무를 훌륭히 완수하였다.

  선친의 특징은 말이 적고 부지런했다. 당시 연변일보사를 보면 배구활동이 아주 활발하게 진행되였는데 선친은 이 면에 남다른 정력을 몰부었다

  해마다 일보사내의 배구경기는 물론 연길시 종업원경기라던가 연변 주 로인배구경기가 펼쳐질 때마다 선친의 그림자가 나타났으며 선수들이 맹활약하는데 드팀없는 힘을 실어주었다 그리하여 좋은 성적을 따내는데 마멸할 수 없는 역할을 놀았다며 선수들마다 엄지손가락을 내들었다.

  

  1964년 연변일보사 배구선수들.

  

  80년대의 연변일보사 배구팀선수들.

  연변주문구사업의 창시자로 활약

  1994년에 정년퇴직한 선친은 원래 운동을 즐겨하던지라 그때 연변에 처음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게이트볼(이하 문구)운동에 각별한 관심을 돌리셨다.

  그는 퇴직하기전부터 문구가 로인들의 건강에 좋은 종목이라고 하시면서 본격적으로 문구활동에 참가하였는데 그후 20여년동안 선수, 감독, 심판원 그리고 연변주 직속문구협회 주요책임자로 활약하면서 연변문구운동의 발전과 보급을 위해 특별한 기여를 했다.

  때로는 경기 비용을 서슴없이 자부담까지 하면서 길림성과 연변을 대표해 중국과 한국에서 펼쳐진 네차례의 국제경기에 참가하기까지 하였다.

  당시 경기에는 일본, 한국, 싱가포르, 미국, 중국 대만 등 나라와 지역에서 온 150여개 팀이 참가하였는데 이토록 중요한 대형경기에서 선친이 이끈 팀은 전무후무하게 네차례나 우승을 따냄으로써 길림성과 연변을 위해 영예를 떨쳤다.

  이밖에1994년 서안시에서 펼쳐진 전국문구선수권대회에 길림성을 대표해 참가하여 7등을 따냈고 1996년 장춘에서 펼쳐진 전국종업원경기대회 문구경기에서 3등했을뿐만 아니라 개인 품격상을 수상했다. 2000년 상해에서 펼쳐진 제3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5등을 따냈고 2003년부터 련속 4년간 길림성 군인리퇴직 문구경기에서 감독의 신분으로 참가하여 세차례 우승컵을 안아왔다.

  연변주문구운동의 “문구 전문가”칭호를

  문구운동에 참가한 이래 선친은 연변문구운동의 발전과 제고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20여년동안 연변주문구협회에 자금이 부족하고 설비가 구전하지 못한 상황에서도 서슴없이 나서서 연변주문구운동의 발전과 제고를 위해 자신의 모든 정력을 기울였다.

  1994년 한국 태평양게이트볼 경기에서의 선친 3번.

  2006년 구태에서 펼쳐진 길림성문구경기에서 우승을 한 연변팀.

  선친이 이끌던 연변주문구협회는 현, 시, 가두, 사회구역 등 범위내에서 경상적으로 각종 활동과 경기를 폭 넓게 진행할수 있는 경기체계를 건립하여 연변주문구운동의 정규화, 체계화, 과학화의 길을 구축했다.

  선친은 1992년 문구운동에 참가한 이듬해 연변주직속 문구협회 부비서장, 비서장으로, 1994년에 연변주직속 문구협회 상임부주석 겸 비서장으로 선출되였다가 그해 10월에 연변주문구협회 부비서장, 비서장, 상임부주석을 담임하였다.

  2002년에 연변주문구협회 주석으로 당선되고 2006년에는 연변주로인체육협회 부주석으로 당선되였다. 2010년 2월에 연변주 로인체육협회 부주석 및 문구협회 주석 직에서 물러난 뒤 주문구협회 명예주석 겸 연변주직속문구협회 주석으로 사업하다가 2012년에 모든 직에서 물러났다.

  그사이 선친은 우수선수, 우수감독, 우수심판원으로 국가체육총국으로부터 선진집단과 군중체육 선진사업일군으로 뽑혔으고 1997년과 2009년 사이 길림성 로인체육협회 및 연변주체육총회로부터 선진사업일군과 특수기여상을 수여받았다. 1998년부터 2005년 사이 연변주직속 당사업위원회와 연변일보사 기관당위로부터 우수공산당원 칭호를 여섯차례나 수여받았다.

  선친이 받으셨던 상장과 상패들.

  선친께서는 농민의 아들로부터 지원군전사로, 다시 출판사업일군으로 성장하면서 언제 어디서나 맡은 바 임무를 훌륭히 완수하였으며 사업터와 사회에서 인정을 받는 훌륭한 공산당원이였으며 가정에서는 언제나 자애롭고 엄한 아버지역을 잘하시였다.

  키골이 크고 몸집이 거쿨지지만 항상 우리 네남매의 성장에 대해서는 그렇듯 자상히 관심을 돌려주고 사랑을 주셨다.

  어릴 때 학교까지 자전거에 태워주던 아버지의 너부죽한 등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또한 맏이지만 딸이라고 얼마나 예뻐하였는지 모른다. 일찍 연변사범학교를 졸업하고 30여년간 인민교원으로 활약하면서 우수공산당원, 우수교원으로 표창받을 때마다 아버지는 늘 자기일처럼 기뻐했으며 단위와 동네에서 자랑을 하군 하셨다.

  선친의 사랑속에 큰 남동생이 포두강철학원을 졸업하고 공정사로 되였으며 둘째 남동생(이미 우리곁을 떠났음)은 연변일보사 우수 보안일군으로, 막내동생은 선친의 뒤를 이어 인민해방군에 참군하였다가 현재는 길림신문 스포즈 기자로 활약하고 있다.

  막내동생이 참군할 때 부대에서는 항상 남보다 빨리 일어나고 모든 일에서 서로 도와주면서 공산당을 따라 배워야 한다고 가르치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하다.

  청명전야에 나는 선친의 생전 사진을 바라보다가 사진속 부친의 자애로운 눈매와 때묻지 않은 미소를 보고 부친이 마치 살아계시는 것만 같았다.

  비록 선친은 우리곁을 떠났지만 우리들에게 돌려준 지극한 사랑과 연변주문구운동사에 남긴 크낙한 발자욱은 영원히 우리의 마음속에 정신적유산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청명을 맞으며 이 글을 선친의 령전에 삼가 올린다.

  /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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