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희는 어릴적부터 아버지가 젊은 시절에 찍은 사진을 많이 보아 와 눈을 감고도 아버지의 얼굴이 환히 떠올랐다. 그리고 어머니는 키가 류달리 크지만 아버지는 키가 작다는것도 어머니에게 들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기가 다니는 대학교의 교수로 온 아버지가 조용히 자기를 찾아왔을 때 윤희는 아버지가 그렇게도 밉고 낯설어 보였던것이다. 그래서 태여나서 처음으로 아버지란 실물을 직접 마주 보게 되는 윤희였지만 그런 아버지에게 꺼낸 첫마디가 “저는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을래요!”이런 말이였고 두번째로 한 말이 “저와 당신의 관계를 영원히 비밀로 지켜주세요!”이렇게 모진 말뿐이였다. 그럴 때 딸애의 손을 꼭 잡고 놓을줄 모르는 김만융교수는 그냥, 그냥 머리를 끄덕이며 “네 마음을 충분히 리해할만하구나...그래, 그래, 남들에겐 영원히 비밀로 하자!”이러셨던것이다...
최윤희는 여기까지 생각하자 또 절로 웃음이 나온다. 참으로 그 당시는 유치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랜다. 그런데 아버지 김만융과의 이런 혈육관계를 백일호가 어떻게 알아냈단 말인가?
최윤희는 문득 옛날엔 백일호와 같은 대학동창생이지만 지금은 소학생이 대학생을 올려다보듯 백일호라는 인간은 자기와는 전혀 비교가 아니 되는 거룩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ㅁ)
여기 태양도 별무리호텔에서 이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는 사람은 또 한 사람 있었다. 그이는 다름 아닌 백발 로인 김만융교수였다.
로인은 오늘 저녁 제자 백일호와 나눈 이야기를 마치도 드라마 배우가 극본을 외우듯이 여러번이나 반복해서 한 대목, 한 대목 꼼꼼히 외워봤다. 그럴수록 흥분이 치솟고 감탄이 나왔다. 백일호라는 제자가 중국에서 심리학 권위라는 말만은 들어왔는데 오늘 저녁의 대화는 그 능력을 직접 시험쳐보는 순간으로 되였고 그래서 그 놀라운 실력을 몸소 육안과 마음으로 확인하는 기회로 되였던것이다. 실로 큰 거목으로 자란 제자였다. 그보다도 로인이 지금 이 제자에게 남달리 마음이 쏠리는 원인은 따로 또 하나 있었다. 이 제자가 딸 윤희와 관계가 있어 박일화란 외손녀가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도 그렇지만 그보다도 이 제자는 신통히 자기처럼 세상에 공개 못할 친딸을 두고있다는 꼭 같은 운명이 자석마냥 마음을 끄당겼던것이다.
하긴 옛날에도 이랬던것은 아니다. 금방 결혼한 안해를 통해 대학 다니는 윤희가 갑자기 임신한것을 알게 되였을때 배속의 그 애 애비되는 사람은 누구인가고 딸에게 따져 물었었다. 그런데 독하고 모진 윤희는 그 이름을 알려주려고 하지 않았다. 만약 그 당시 그 남자는 백일호라고 윤희가 말했더라면 김만융교수는 아버지로서 백일호를 찾아 이 사실을 말했을것이고 지어는 이런 마당에 어떻게 할것이냐고 백일호에게 숙제를 던져주었을 가능성도 있는 일이다. 그런데 딸 윤희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자 그저 너의 운명도 어쩌면 신통히 에미를 닮는구나 하는 불쌍한 생각밖에 들지 않았었다.
윤희는 딸애를 밀산에 사는 외사촌언니네 집에서 데리고 온 썩 후에야 김만융교수에게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때는 백일호가 동창생 구금자와 결혼하여 이미 아들까지 낳은 뒤였다. 그래서 김만융교수는 최윤희의 생각처럼 백일호와 구금자가 이 사실을 영원히 모르고 살기를 바라기도 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수록 생각도 차츰 달랐졌다. 특히 외손녀 박일화가 백일호가 교수로 활약하는 북방사범대학에 붙은 후로는 어쩌면 자기의 친아버지를 곁에 두고도 모르고 지내게 한다는것이 어른들로서 명지한 처사가 못된다는 자책감이 들기도 했었다. 그래서 이제는 이 비밀을 외손녀한테도 알려주고 그 애의 아버지 되는 백일호에게도 털어놓아야 되지 않겠냐고 최윤희에게 몇번이나 귀띔했지만 최윤희가 한사코 반대했다. 태여날때부터 아버지를 모르고 자란 애인데 인제 와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있냐 하는 최윤희의 그 장대같은 고집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시집도 안가면서 혼자 고생하며 애를 키워온 녀자의 몸으로서는 그런 앙금 같은 고집이 가슴에 쌓일수도 있겠다는 안스러운 생각에 더 어찌 할수도 없는 일이였다.
그러는데 외손녀 박일화가 언제부턴가 이상하게 논다는 것을 로인도 눈치챘던것이다.
“할아버진 백일호란 분을 아세요?”
언젠가 산속으로 외할아버지를 보러왔던 박일화가 이런 질문을 하는 바람에 로인은 흠칫 놀랐다.
“그분도 옛날 목단강민족사범학원 졸업생이라고 하던데요. 할어버지가 가르친 제자 맞지요?”
“그래 내가 가르친 제자네.”
“그분은 대학다닐 때도 공부를 잘했어요?”
“잘하구 말구. 그 반에서 반장이였네라...”
“그럼 어머니는 그분하고 동창생이 아닌가요?”
“너 그건 왜 묻는거냐?”
“아니래요. 어머니는 그 분을 잘 모른다고 하시길래 이상해서 한번 물은것뿐이래요.”
그때부터 외손녀가 하는 짓이 심상치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겨울이 가면 봄이 오듯 때가 스스로 다가 오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였고 그런 기회가 절로 나타나기를 속으로 은근히 바라기도 했던 로인이다.
며칠전 강현수로부터 할빈에서 동창모임을 하는데 교수님을 특별 초청한다고 전화로 알렸을 때 로인은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러면서 어렴풋이 이번에 만나면 백일호가 무엇인가 눈치채지 않을가 하는 예감이 들기도 했었다. 그 통지를 받고 최윤희가 찾아왔다.
“저는 방학이라 해도 학교에 일이 많아 몸을 뺄것 같지 못해요. 아버지는 어쩌시겠어요?”
최윤희는 자기도 가지 않을뿐만 아니라 분명 로인도 가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을 내비쳤다. 했지만 로인은 도리머리를 저었다.
“이젠 북망산에서 데려갈 나이도 다 되였는데 이 기회에 제자들을 안보면 언제 기회가 또 있겠냐? 그러니 나는 혼자서도 가야겠다. 할빈에 가면 외손녀가 공부하는 대학에도 한번 찾아가 보고 싶구나.”
로인이 이렇게 나오자 최윤희도 하는수 없어 생각을 바꾸게 되였던것이다. 그래서 강현수에게 학교에 일이 바빠도 동창모임에 꼭 참가하겠다는 전화를 다시 했고 북방사범대학에 박화라는 조카딸도 있으니 할빈에 갔던 걸음에 그 애도 만나봐야겠다는 말도 꾸며 냈던것이다. 그런데 남들이 눈치 못채게 머리를 짜며 비밀을 더 빈틈없이 포장한다는것이 그만 뱀을 멋지게 그리려다 몸에 없는 발까지 그려놓는 격이 되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수십년간 숨겨왔던 비밀을 백일호가 눈깜빡할 사이에 밝혀내도록 환경을 지어준데는 이 백발 로인의 공로도 숨어있었다고 봐야할 일이였다.
김만융교수는 비온 뒤에 무지개를 보듯이 일이 교묘하게 안팎이 맞아떨어지면서 잘 터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투성이던 혹덩이를 툭 터치우고 그 속에서 오래동안 곪아있던 고름을 짜낸것처럼 가슴이 후련해졌다.
어느 사이 새날이 환히 밝아왔다. 뜬눈으로 밤을 팼어도 기분만은 상쾌했다. 로인은 주섬주섬 옷을 입고 아침 산책을 하려고 밖으로 씨엉씨엉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