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마을 특성상 밭 소유권 다툼부터 자질구레한 갈등까지, 힘겨운 일들이 끊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늘 묵묵히 견대냈다."
왕청현 대흥구진의 작은 마을 홍흥촌, 이곳에 들어서는 길은 반듯하게 닦여있고 밤이 되면 어김없이 가로등이 환하게 불을 밝힌다. 이 평온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낸 이가 촌당지부 서기이자 촌민위원회 주임인 김인옥(65세)이다. 남자도 감당하기 힘들다는 촌민위원회 주임직을 그녀는 수십년간 묵묵히 지켜왔다.
그녀의 삶은 깊은 슬픔을 겪어야 했다. 40여세의 나이에 남편을 간암으로 떠나보낸 데 이어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 뿐인 아들마저 병으로 앞세웠다. 혈혈단신, 세상에 홀로 남겨진 고독은 그녀를 짓눌렀지만 그는 그 슬픔을 그러안고 마을사람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정력을 이웃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쏟아붓기 시작했다.
김인옥(가운데)은 모든 정력을 이웃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쏟아부었다.마을 주민이 세상을 떠나면 그녀는 떠나간 자의 마지막 길을 손수 준비했다. 마치 자신의 가족을 떠나보내듯 수의를 직접 구입하여 입히고 마지막까지 곁을 지켰다.
그녀는 “가족을 잃은 슬픔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마지막 가는 길만은 외롭지 않도록 따뜻한 ‘배웅’을 해주고 싶었습니다.”고 말한다.
누군가 생활고로 어려움을 호소하면 촌장으로서의 책임감을 넘어 사비를 털어 적지 않은 돈을 지원하는 등 주머니를 아끼지 않는 ‘인정’을 베풀었다. 오랜 시간 그녀를 곁에서 봐온 지인인 옆마을 촌민 유해숙은 “김인옥 촌장의 존재는 홍흥촌 주민들에게 단순한 행정가가 아닌, 가장 깊은 곳을 헤아려주는 따뜻한 가족과 같습니다.”고 털어놓는다.
촌장으로서 그녀가 겪어야 할 어려움은 산더미 같았다. 촌마을 특성상 밭 소유권 다툼부터 자질구레한 갈등까지, 녀성이 감당하기에는 힘겨운 일들이 끊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늘 묵묵히 견뎌냈다.
김인옥의 노력은 홍흥촌의 력사를 바꾸어놓았다. 그녀가 마을에 시집왔을 때 걷던 질척한 흙길은 주민들의 오랜 골치거리였는데 그녀의 수많은 발품과 노력 끝에 마을 진입로는 반듯하게 포장된 길로 바뀌였다. 단순한 포장이 아닌, 수십년간 주민들의 삶을 불편하게 했던 고통의 길을 희망의 길로 다듬어낸 것이다.
또한 마을의 낡은 배수시설은 우기 때마다 주민들을 괴롭혔다. 그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관련 부문와 정부를 직접 찾아다니며 호소하고 설득했다. 그 간절한 노력 끝에 형편없던 시설은 현대적인 배수 시스템으로 새로이 구축되였고, 마을에는 밤의 안전을 책임지는 가로등이 설치되였다.
그런가 하면 그녀는 홀로 남은 마을 로인들이 아플 때면, 자식 된 마음으로 직접 병원에 모시고 따뜻하게 돌봤고 주민들의 메마른 여가생활에도 활력을 불어넣었다. 명절이면 주민들을 이끌고 진에서 열리는 문예공연 무대에 오르고 마을 잔치를 직접 열어 주민들의 흥을 돋우는 역할을 자처했다.
수십년간 홍흥촌을 위해 헌신해온 그녀는 몇년 전, 거처를 시내로 옮겼지만 여전히 마을 촌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마을에 급한 일이 생기면 곧장 달려가지만 그외의 시간은 도시의 새로운 공동체를 위해 사용하고 있다. 가족 없이 고독하게 시간을 보내는 시내 로인들을 모아 광장에서 춤을 가르치고 공연 무대에 오르는 것이 그녀의 새로운 일과가 되였다.
로인들에게 활기 차고 의미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일념으로, 그녀는 스스로 사비를 들여 장구를 배웠다. 그리고 이 장구 연주를 광장에 나오는 로인들에게 무료로 가르치며 문화 향유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음향 설비를 비롯한 모든 활동 경비 역시 사재를 털어 해결하는 등, 시내에서도 그녀의 헌신은 멈출 줄 모르고 있다.
이러한 묵묵하고 지속적인 노력 끝에 김인옥은 왕청현 우수 당원간부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고 그녀가 일구어온 홍흥촌은 왕청현에서 ‘아름다운 향촌’이라는 미명을 얻게 되였다.
인터뷰에서 만난 김인옥은 시원시원하고 당당한 인상이였지만, 그녀의 눈빛 깊은 곳에는 가족을 먼저 떠나보낸 깊은 슬픔이 고여있었다. 그 지울 수 없는 고독이야말로 그녀가 이웃의 외로움을 그토록 헤아리고 모든 정력을 공동체에 쏟아부은 헌신의 근원이였는지 모른다.
출처:연변일보
편집:김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