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이 강대해지는 과정을 한획 한획 기록해
44권의 일기는 세월의 긴 두루마리처럼 천천히 펼쳐진다.
항일로전사이며 북해함대 97세의 리직휴양간부인 정영방은 1942년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하여 83년 동안 견지했다.
누렇게 바랜 종이장들에 씌여진 글씨는 가장자리가 벌써 희미하게 번져있었다. 그의 조국에 대한 사랑과 파란만장했던 세월은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며 마치 그가 금방 붓을 들어 기록한듯 생생하게 다가왔다.
아침해살 속에서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은 정영방의 가슴에 단 훈장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는 한무더기의 일기책 묶음띠를 풀어 펼쳐보고 되새기며 이야기했다—
“조국을 위해 적들을 죽일 수 있다면 희생되여도 영광스럽다.”
—1945년 2월 기록
1945년, 17살 나는 정영방은 조국의 산천이 파괴되고 백성들이 살곳을 잃고 떠도는것을 목격하고 태항련합중학교를 갓 졸업하자마자 의연히 입대했다.
“나의 담임선생님은 늘 ‘오직 공산당만이 중국을 구할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의 불길은 그 때로부터 정영방의 마음속에서 활활 타올랐다. 그는 당의 령도 아래 승리의 서광이 바로 눈앞에 있다고 굳게 믿었다—“조국을 위해 적들을 죽일 수 있다면 희생되여도 영광스럽다.” 그의 일기장에는 청춘의 뜨거운 피가 기록되여있었다.
정보참모로서 정영방은 수많은 전투에 참가하여 전우들의 영용무쌍함과 생사를 돌보지 않는 모습을 목격했다. “우리의 등뒤에는 바로 조국의 강산과 수천만 동포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말했다. 당시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생각만을 가지고 있었다—“차라리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 죽을지언정 한걸음 뒤로 물러서 살 수는 없다.”
혁명의 결심과 적을 소멸하려는 의지는 종이장을 뚫을 듯한 일기장 속의 필적으로 되였다. “나는 혁명사업에 뛰여들어야 하며 평생 혁명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1945년 12월, 정영방은 소원을 이루어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인민정치협상회의가 소집되였다. 이 소식이 어찌 사람을 흥분시키지 않겠는가… 거리의 사람들은 기쁨에 들떠 24시까지 잠들지 못했다.”
—1949년 9월 기록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투항했다. “소식이 전해지자 나는 흥분하여 큰소리로 웨쳤습니다. 부대 지도원이 나를 비판하며 말했습니다. ‘일본이 비록 투항했지만 우리는 결코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됩니다.’” 그날 저녁 정영방은 일기에서 앞으로 반드시 두뇌를 명석하게 유지하고 교만함과 조급함을 경계해야 한다고 반성했다.
평화의 희망은 금방 깨졌다. 항전승리후 국민당반동파가 일방적으로 ‘쌍십협정’을 파기하자 정영방은 또다시 부대를 따라 남정북전했다… 1949년 9월 하순, 부대가 호북에서 휴식정돈할 때 정영방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차 전체회의가 성공적으로 소집되였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날 저는 흥분하여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정영방은 회억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를 위해 분투했던 목표가 마침내 실현되였습니다! 전사들의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왔습니다.”
1949년 10월 1일 건국대전. “중국인민은 마침내 일어섰다!” 부대를 따라 작전중이던 정영방은 크게 분발했다. “모두들 투지로 넘쳐있었고 새로운 승리로 새 중국 창건을 경축할 것을 맹세했습니다!”
“평화는 쉽게 오지 않는다. 나는 끊임없이 자신을 충실히 하고 기량을 높여 조국을 수호해야 한다.”
—1951년 11월 기록
1950년 조직의 배치에 따라 정영방은 해군에 전입되였다.
해군업무에 대해 전혀 몰랐던 정영방은 처음부터 대수, 로어, 항해, 기상 등 지식을 열심히 학습했다.
“나날이 쌓고 달마다 루적했더니 마침내 문턱에 들어섰습니다.” 일기 속의 매일 반복되는 학습계획을 들춰보며 정영방은 감개하여 말했다. “부지런히 배우고 꾸준히 련마하는 것외에 다른 비결은 없었습니다.”
정영방의 몇몇 자녀들도 선후하여 태여났다. “생활이 비록 좀 어려웠지만 전쟁의 습격을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평범하고도 행복했습니다.” 정영방은 온힘을 다하여 힘써 학습하고 사업에 정진했는데 이는 “작은 가정의 행복을 위한 것이자 또한 국가의 번영을 위한 것이였다.”
정영방은 해군 청도기지에서 항해업무장, 훈련처 부처장, 연구원 등 직을 담당했으며 선후하여 3급해방훈장과 중국인민해방군 독립공훈영예장을 수여받았다.
1985년 1월, 정영방은 리직휴양했다. “얼마나 행운인가! 나는 인민해군이 한걸음 한걸음 발전장대해지는 것을 직접 보았다.”
“당의 11기 3차 전원회의 공보방송을 련속 두번 들었다. 나는 단호히 옹호하고 관철집행할 것이다.”
—1978년 12월 기록
1978년, 당의 11기 3차 전원회의에서는 당과 국가 사업의 중심을 경제건설에로 옮기고 개혁개방을 실행한다는 력사적 결책을 내렸다. 1984년, 정영방이 살던 도시 청도는 첫번째 14개 연해개방도시의 하나로 되였다.
“개혁개방 이래 청도는 하루가 다르게 변했고 백성들의 생활은 날마다 좋아졌습니다.” 정영방은 회억했다. 지난 세기 80년대에 집에서는 점차 랭장고, 채색TV 등을 구매했고 “아이들도 결혼한 후 모두 자기들의 집이 생겼습니다.”
최근 몇년간 정영방은 손자의 도움으로 컴퓨터사용법을 배웠으며 컴퓨터로 장기를 두는 것이 그의 취미로 되였다. 로부부는 또한 가끔 관광을 떠나군 했는데 그는 “지금의 고속렬차는 너무나도 빠릅니다. 과거 우리가 일주일간 행군하던 거리를 고속렬차는 1시간이면 주파합니다.”라고 말했다.
정영방이 휴대폰 속의 사진첩을 열자 그 안에는 아이들의 사진으로 가득했다. “아이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주 흐뭇합니다. 지난날의 로고가 가장 좋은 보답을 받은 것 같습니다.” 정영방이 말했다.
“중국공산당 창건 100주년 경축대회에서 한 습근평 총서기의 연설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배우고 또 배워야 한다.”
—2021년 7월 기록
“백년의 큰 당은 한창 생기로 차넘치고 있습니다. 나는 비록 나이가 많지만 총서기의 연설을 들으며 여전히 마음이 설레였습니다.” 혁명에 참가한 이래 정영방은 국가가 빈궁하고 락후하던 데로부터 번영창성으로 나아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력사는 중국공산당의 령도를 견지하는 것이 중국의 모든 일을 잘 처리하기 위한 근본전제라는 것을 웅변적으로 증명했습니다.”
“당의 양성이 없었다면 나의 오늘날도 없었을 것입니다.” 리직휴양후 정영방은 국방교육에 정력을 쏟았으며 부대 주둔지와 학교에 가서 선전강연했다. 최근 몇년 동안 그의 건강이 예전만 못해지자 집에 ‘작은 홍색교실’을 차리고 한권 한권의 일기로 방문온 장병, 학생들과 함께 포화가 흩날리던 세월을 회고했다. “나는 시종일관 간고분투의 기풍을 잘 견지하여 젊은이들에게 훌륭한 본보기를 보일 것입니다.”
97세 고령의 정영방은 여전히 매일 학습을 견지하고 있다. 올해 7월 1일 정영방은 신문에서 당중앙이 ‘기풍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재차 강조한 것을 보고 일기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자기혁명은 모든 당원의 책임이며 우리는 끊임없는 학습을 통해 사상경지를 높이고 당의 발걸음을 따라가야 한다.”
“항전승리 80주년을 기념하는 날, 나는 텔레비죤 곁을 지킬 것이다.”
—2025년 8월 기록
올해는 중국인민항일전쟁 및 세계반파쑈전쟁 승리 80주년이 되는 해이며 또한 정영방이 참군입대한지 80년째가 되는 해이다.
“9월 3일 오전, 북경 천안문광장에서 중국인민항일전쟁 및 세계반파쑈전쟁 승리 80주년 기념대회가 거행되며 부대검열도 있을 것입니다.” 얼마전 정영방은 텔레비죤에서 이 소식을 들은 후 마음이 줄곧 가라앉지 않았다.
“그날 나는 텔레비죤곁을 지킬 것입니다. 나는 전우들을 대신하여 새 세대 인민자제병들이 얼마나 위풍당당하고 씩씩한지, 우리의 무기장비가 얼마나 선진적인지 보고 싶습니다.” 정영방은 감격에 겨워 말했다. “수많은 영렬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아름다운 강산과 평화로운 세월이 있는 것입니다.”
해빛이 책상 우에 쏟아져 일기장 우의 큰 글자들이 더욱 힘있어보였다—“반드시 당의 말을 듣고 당을 따라야 한다!” 이 말은 정영방이 일기장에 여러번 썼던 구절이다.
“나는 전쟁의 포화 속에서 걸어나와 조국이 강대해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어 나는 아주 행운스럽고 또 아주 행복합니다.” 정영방은 “이 한생에 아무런 원망도 후회도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출처: 인민넷 조문판
편집: 전영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