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꽹과리 소리는 하늘을 울리고 북소리는 땅을 진동시킨다. 긴 세월, 그 안에서 우리는 삶의 에너지를 얻고 공동체의 뉴대감을 확인해왔다. "
조득현이 창작한 조선족농악무.
가을바람이 선들거리는 날, 마을의 너른 논밭에서 꽹과리, 징, 장구, 북소리가 울려퍼졌다. 흥겨운 가락에 맞춰 상쇠의 지휘 아래 열두발 상모 등 다양한 기예가 펼쳐지고 농부들의 고된 삶과 풍요로운 소망이 담긴 몸짓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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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에서 유일하게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민간무용, 조선족농악무의 한 장면이다.
“농악무의 모체는 농악놀이이며 농악무와 농악놀이는 농악에 속합니다. 농악은 농부들 사이에서 행하여왔던 옛날부터 농촌에서 전하여온 우리 민족 특유의 향토음악입니다. 농악무는 우리 민족의 무용예술 가운데서 력사가 가장 오래고 민족특점이 가장 짙은 대표적인 민속무용입니다.”
10여년 전, 당시 조선족농악무 관련 자료를 수집, 정리하고 있던 민속학자 천수산을 만난 자리에서 그는 우리 농악의 뿌리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고대 조선반도에서 기원한 농악, 그 연원에 대하여 학자들은 흔히 ‘삼국지·마한전(三国志马韩传)’에서 그 뿌리를 찾고 있다.
1954년,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 회의 소집을 경축하는 왕청 서위자농악대.
“마한사람들은 매년 5월달에 파종이 끝나면 귀신에게 제사를 올리는데 무리를 지어 노래를 하고 춤을 추며 술마시기를 밤낮으로 쉴새없이 한다. 그 춤은 수십명이 함께 일어나 서로 따르고 땅을 구르며 몸을 낮추었다 높였다 하면서 손발이 서로 장단을 맞춘다. 절주는 중국의 탁무와 비슷한 데가 있다. 10월에 농사일이 끝나면 역시 이렇게 한다.”
마한사람들이 5월과 10월에 거행했던 이런 행사는 농신에게 감사를 표현하기 위하여 지내는 제천행사이다.
조선반도의 삼국시기에도 마찬가지로 제천행사는 끊이지 않았다. 신라에서는 매년 정월 초하루날에 ‘일월신’에게 제사를 지내며 백제에서는 일년 사계절의 중월에 ‘오제지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러한 제천행사에는 마한사람들이 농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와 마찬가지로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그것은 고려시기에도 모든 대형 축제에서 노래와 춤을 빼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고시기 제천행사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던 것이 농악의 연원이 되는 것이다.
그 옛날, 마을에서 농민들이 농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행해지던 농악무는 어떻게 오늘의 유네스코 무형문화재에 등재됐을가?
“농악은 중국에 류입된 후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자연과 인문 환경이 바뀐 데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으로 사회제도가 바뀌면서 조선족농악은 더 이상 조선반도 재래의 농악에 머물러있지 않았습니다.”
연변대학 민속연구소 소장 최민호는 그 궁금증을 명쾌하게 풀어준다.
농악을 통해 우리는 민족의 흥과 얼을 느낀다.
농악은 몇천년의 변천과정에서 무속, 불교, 군사적인 요소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북과 춤으로 이루어진 소박한 형태의 기원농악, 김매기나 모심기의 작업능률을 위한 두레농악, 마을의 공금이나 절의 징수금을 위해 쌀과 돈을 걷는 걸립농악, 관람자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예농악 등의 네가지 류형으로 변화, 발전해왔다.
“농악은 19세기 후반에 시작된 조선인의 대규모적인 중국이주와 더불어 중국에 간헐적으로 류입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1930년대를 기점으로 연변을 포함한 동북3성의 조선족집거구역에 일정한 규모를 갖춘 농악대가 대량으로 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중국땅에 농악문화의 꽃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최민호 소장은 “해방 전에 동북지역에는 우의 네가지 농악이 모두 류입되여있었고 그 진입경로도 다양했습니다. 조선반도의 경우 농악은 지역마다 강한 특수성을 보이고 있으나 중국의 경우 조선 각지의 이주민들이 섞여서 살았던 관계로 지역성이 선명하지 않습니다.”라고 설명을 보탠다.
1910년대를 기점으로 동북지역에 이미 조선족마을이 대거 형성되기 시작했고 노래와 춤을 즐겼던 우리 민족에게 낯선 땅에서 밭을 일구고 농사를 짓는 과정에서 춤과 노래가 곁들여지고 거기에 꽹과리와 북이 등장했다는 사실은 의심할 바 없는 당연한 사실이였다. 실제로 이주 당시 조선인들이 꽹과리와 북 등 타악기를 가지고 중국땅에 들어왔다는 기록을 흔히 볼 수 있다.
최민호 소장은 “초기의 농악은 대체로 밭머리에서 또는 마을 공터에서 농민들이 휴식을 즐길 때 연행되였습니다. 그러나 사물을 겸비한 일정 규모의 농악대는 그 당시까지 아직 조직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라고 말했다.
1928년 왕청현 계관향 영벽촌에서 처음으로 농악놀이를 했다고 구전으로 전해진다.
“영벽촌 농민들은 봄에 밭갈이를 하거나 가을에 가을걷이를 할 때면 ‘농자천하지대본’이라고 쓴 농기를 밭머리에 꽂아놓는다. 휴식시간이 되면 누가 먼저 북이나 꽹과리를 울린다. 자기 밭에서 일하던 농민들이 이 소리를 들으면 자기가 갖고 있던 악기를 들고 나온다. 그들은 꽹과리, 징, 북, 새장고외에 바가지, 대야 같은 것을 들고 나와 두드리며 한바탕 춤을 추며 즐겁게 논다. 저녁식사를 마친 뒤에 사람들은 마을 복판의 넓은 장소에 모여 달빛 아래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농악소리에 맞추어 춤을 춘다.”
1957년 2월 14일, 북경에서 모택동 주석과 악수를 나누는 조득현(오른쪽 두번째).
그 뒤를 이어 1936년에 화룡현 투도농악이 있었고 왕청현에서 면전농악, 서위자농악이 나타났다.
왕청 서위자마을에서는 1944년부터 농악활동을 벌리였는데 마을사람들은 상모춤에 류달리 흥취를 가졌다. 그런데 상모는 어디 가서도 구할 수 없어 모두 자체로 만들어 썼다. 제각기 상모를 만들다 보니 삿갓모양, 대야모양, 솥뚜껑모양 등 각양각색이였고 어떤 사람은 상모를 미처 만들지 못해 머리카락을 상투모양으로 쪽지고 거기에 종이오리를 달아매고 상모를 돌리는 련습을 했다. 이 마을에 한수남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느 해 그의 집에 화재가 발생했고 그는 다급한 와중에 집안에 뛰여들어가 제일 먼저 들고나온 것이 벽에 걸어놓은 상모였다고 한다. 정말 울지도 웃지도 못할 이야기이다.
그 후 1945년 일제 패망을 전후하여 연길현 팔도촌에 농악대가 조직되였고 안도현 장흥향 신툰의 농악대는 1937년에 조선인집단부락이 이루어지면서 조직되였는데 1942년에 당시의 위만주국 수도인 신경(지금의 장춘)에서 20일간 농악놀이를 공연하기도 한다. 당시 장흥향의 농악형태는 ‘농자천하지대본’이라고 쓴 농기를 앞세우고 상쇠잡이의 지휘하에 부쇠, 징, 장고, 대북, 소북잡이들이 뒤따르면서 여러가지 대형으로 춤을 추다가 중간쯤 되여 전체가 신명 나게 춤을 추는 것으로 마무리된다.”고 알려져있다.
2023년 9월 3일에 열린 중국조선족농악무 대회.
연변 각지의 조선족마을에서 민간농악대에 의해 조직되던 농악무는 1951년 조득현에 의해 무대예술화한 ‘농악무’가 탄생하면서 중국 조선족농악은 새로운 방향으로 진로를 바꾸게 된다. 기존의 악(乐), 희(戏), 무(舞)의 요소를 두루 갖춘 종합놀이에서 ‘악’과 ‘희’가 점차 떨어져나가면서 상모춤을 중심에 둔 농악무로 변하게 된다.
최민호 소장은 “조득현의 무대예술화를 통해 농악의 주제가 새롭게 바뀌고 이와 더불어 새로운 기교 창조와 도구 개량 그리고 전승 주체마저 바뀌면서 결국 조선반도의 농악과는 전혀 다른 양상의 농악무가 주류로 자리를 잡게 되였습니다.”고 말한다.
1951년 9월 13일과 25일 《연변일보》 지면에는 조득현이 창작한 무용 <농악무>를 소개하는 기사와 연변문공단회의에서 조득현이 창작한 무용 <농악무>를 장려한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조득현과 함께 농악무의 발전에 큰 힘을 보탠 이가 하태일이다. 하태일은 그 당시 농악무에서 뛰여난 재능을 갖고 있는 민간예인중 한 사람으로서 조득현의 발탁으로 자기의 재능을 남김없이 발휘할 수 있었다. 이들의 운명적인 만남은 마당놀이였던 당시 농악무를 무대농악무로 변신을 꾀하면서 지금의 무형문화유산 등재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 후 하태일의 딸인 하찬숙은 <농악무와 나의 아버지>라는 글을 빌어 “31살의 아버지는 괴나리보짐을 등에 지고 살길을 찾아 정든 고향을 떠났다. 낯선 이 땅에서도 아버지의 춤자랑은 멈추지 않았다. ‘여보, 나 오늘 춤 자랑하러 간다니까.’ 무릎을 탁 치면서 신이 나 떠나신 아버지는 정월 대보름까지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농악놀이를 하면서 이 마을 저 마을을 누비셨다. 그러다 나니 그때 벌써 아버지는 ‘타고난 춤군’이라는 소문이 지역에 파다하게 퍼졌다.”라고 적었다.
그 뒤 조선족농악무는 ‘문화대혁명’을 겪으면서 주춤하다가 그 이후 다시 전성기를 맞는다.
풍년을 경축하는 시골 농악대.
배초구는 왕청현에서 서위자의 뒤를 이어 농악활동을 활발하게 벌린 마을이다. 이 마을의 농악무는 1980년부터 1990년대에 전성기를 맞았는데 해마다 6월부터 국경절 사이에 광장농악무콩클을 조직, 2001년에는 ‘상모축제’를 열기도 했다. 1987년 8월에 배초구에서는 제1차 농민문화주 활동을 벌려 1000여명이 참가한 광장농악무를 공연하여 크게 인기를 끌었고 주문화국에서는 이듬해 6월에 배초구진을 ‘상모춤의 고장’으로 명명했다. 1990년대 이후 왕청현의 농악무는 전 연변에서 선두역할을 하면서 농악무를 유네스코에 무형문화유산으로 신청하는 과정에서도 큰 역할을 하였다. 이 시기에 왕청현 농악무 보급과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주요인물들로는 박종규, 한동국, 김명춘 등을 꼽을 수 있다.
왕청현을 찾는 관광객들이 꼭 찾는 명소로 왕청현중국조선족농악무전시관이 있다. 2015년에 마무리된 전시관은 우리 나라에서 유일하게 조선족농악무를 주제로 하는 전시관이며 무료로 개방하고 있다.
왕청현은 2006년부터 조선족농악무 관련 다양한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학교와 향진, 사회구역, 마을, 민간예술단체에 40여개의 농악무강습지를 건립했다.
왕청현문화관 관장 손지강은 “현재 왕청현의 중국조선족농악무전시관은 단순히 농악무를 전시하는 공간을 넘어 다양한 문화교류의 장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전시관은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조선족문화를 알리고, 더불어 문화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다.”면서 우리 농악무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왕청현 뿐만 아니라 연길시, 안도현, 훈춘시, 도문시, 룡정시, 화룡시 등 기타 현, 시에서도 규모 부동한 농악무팀이 설립되였다. 1980년대 이후 연변 각 현, 시의 크고 작은 경축행사에서 농악무는 빼놓을 수 없는 공연종목으로 되였다.
1988년 4월 5일 《연변일보》 지면에는 이해 3월 25일에 안도현 장흥향 새마을에서 마을 설립 50돐을 경축하면서 대형 농악놀이를 벌린 기사가 실렸다.
기사는 “오전 10시 20분, 온통 마을 들썽 깨우는 요란한 징소리, 북소리와 함께 ‘새마을’이라고 새긴 붉은 바탕의 농기와 ‘농자천하지대본’이라고 새긴 농기 그리고 범아가리를 새긴 푸른 농기가 앞서고 그 뒤로 울긋불긋한 농악복 색들을 한 10여명 되는 남녀로소가 넓은 탈곡장으로 서서히 흘러들었다…”고 적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해마다 백종절, 추석, 보름맞이 명절축제무대에 조선족농악무가 빠짐없이 등장한다.
2010년 음력 7월 15일에 룡정시 개산툰진 하천평마을에서 농부절을 경축하면서 대형 농악무축제를 거행했고 2012년에 자치주 창립 60돐을 앞두고 제1회 중국조선족농악무대회가 연길에서 열렸는데 지금까지 2년에 한번씩 전국대회가 연변지역에서 열린다.
연변지역 크고 작은 명절 축제 때마다 등장하는 상모춤.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는 과정에 지금까지 여러 세대의 농악무 전수자들을 배출했는데 1세대에 조득현, 하태일, 2세대에 량태명, 박종규, 홍수천, 마문호, 한세호, 최호욱, 안재호, 3세대에 한동국, 강상범, 4세대에 김명춘, 김만준, 한상일 등 예술인들이 있다. 그리고 현재 성급 대표적 전승인으로 있는 이는 연길시문화관 관장 홍미선이다.
그녀는 젊은 세대가 농악에 관심을 갖도록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다. 학교 교육과 련계하여 농악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농악의 현대화와 대중화를 통해 젊은 세대의 흥미를 유발하는 프로젝트 개발에 누구보다도 앞장선다.
“농악은 우리 민족의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농악을 통해 우리 민족의 얼과 흥을 느끼고 공동체정신을 되살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홍미선은 농악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한다.
꽹과리 소리는 하늘을 울리고 북소리는 땅을 진동시킨다. 긴 세월, 그 안에서 우리는 삶의 에너지를 얻고 공동체의 뉴대감을 확인해왔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농악은 민족의 얼을 지키는 등불과 같았다. 피란길에서 만난 농악패들은 지친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웃음을 되찾아주고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도록 용기를 북돋우어주었다.
그래서 홍미선은 “농악은 단순한 예술이 아닌 민족의 정신을 지탱하는 힘입니다.”라고 말한다. 농악이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우리 민족에게 위안을 건네는 소중한 문화유산임을 다시한번 깨닫게 한다.
출처:연변일보
편집:김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