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림성 도문시 량수진 정암촌 촌민들의 휴대폰에는 박일봉 의사의 전화번호가 저장되여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밤낮을 불문하고 촌민들의 전화 한통이면 박일봉 의사는 한달음에 달려온다.
“지난 8년 세월을 저는 촌민들과 한 가족처럼 함께 지내왔습니다.”
향촌의사 박일봉(56세)은 언제나 촌민들을 따뜻하게 대했으며 의사로서의 책임을 다했다.
2015년, 박일봉 의사는 량수진위생원으로부터 정암촌위생실로 파견되여 의사 인생의 새로운 려정을 시작했다.
정암촌은 도문시에서 차로 달려 40분 거리에 있는 전형적인 조선족마을로서 로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마을 로인들은 박일봉 의사가 있으면 마음이 든든하다고 한결같이 말했다.
“한번은 제가 급성위장염에 걸렸는데 새벽에 갑자기 구역질이 나고 설사가 났습니다. 자식들이 모두 외국에 나가있기에 나 홀로 120에 전화를 걸어 병원에 갔습니다. 병원에 도착했지만 한어를 잘하지 못해 의사와의 소통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이때 박선생이 머리에 떠올라 그에게 전화했습니다. 그는 저의 전화를 받자 즉시 병원으로 달려와 통역, 접수, 검사 등 전반 과정을 도왔으며 친아들처럼 저의 병세가 호전될 때까지 저와 함께 있다가 또 저를 차로 집까지 호송해줬습니다.”
주정자 할머니(77세)는 감동을 금치 못했다.
“촌민들이 병이 나면 저는 한시라도 지체할 수 없습니다. 특히 로인들에게 신경을 많이 써야 합니다. 로인들이 건강하기만 하면 저는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매번 로인들이 감사의 뜻을 표할 때마다 박일봉 의사의 간명하고도 소박한 말은 촌민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준다.
1년, 2년… 8년 세월이 흐르면서 박일봉 의사와 촌민들의 감정은 날로 깊어만 갔다. 박일봉 의사가 환자들에 대한 첫번째 치료는 ‘관심’이였다.
“나이 들면서 탈도 많아 고혈압, 요추간판탈출, 무릎관절염에 혈압도 통제가 잘 안돼 머리가 어지럽기도 하고 걷기도 불편합니다. 병이 도질 때마다 박선생한테 전화하기만 하면 인츰 달려와서 약을 챙겨주고 물도 끓여줍니다.”
김영선 로인(72세)은 매우 감격하며 박일봉 의사가 평소 자기의 집에 자주 와서 농사일도 도와준다고 말했다.
“의사인 제가 촌민들의 건강을 돌보는 것은 응당 짊어져야 할 책임입니다. 마을에 로인들이 많기에 최선을 다해 그들을 돌보는 것이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박일봉 의사는 겸손하게 말했다.
2020년 그믐날, 그는 장인댁으로 설을 쇠러 가던 길에 마을의 환자 가족의 전화를 받았다. 휴대전화에 뜬 전화번호를 보고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장기간 병상에 누워있던 중환자 가족으로부터 온 전화였던 것이다. 통화를 끝내고 박일봉 의사는 거의 다달은 장인댁을 바라본 후 머리를 돌려 운전석 옆에 앉아있는 안해를 보고는 즉시 방향을 돌려 마을로 달려갔다.
“리해합니다. 마을로 돌아가지 않으면 당신이 안심하지 못할 테니 함께 갑시다.”
안해의 한마디 말에 박일봉 의사는 미안함과 함께 고마움을 깊이 느꼈다.
“몇년간 저는 가족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빚졌습니다. 명절에도 그들 옆에 있어주지 못했건만 모두가 저를 리해해주고 격려해주었기에 그것이 큰 동력이 되였습니다.”
의료사업에 종사한 38년 동안 박일봉은 항상 솔선수범했고 성실하게 맡은 바의 의무를 다했으며 동료들의 좋은 본보기로 되였다.
박일봉 의사는 평소 직업소양을 끊임없이 제고하고 의료전문 기능을 꾸준히 향상시킴으로써 대중들의 한결같은 호평을 받았기에 그는 길림성 제2기 ‘가장 아름다운 향촌의사’라는 영예칭호를 수여받았다.
“조직에서 저에게 수여한 영예에 저는 기쁨과 함께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영예는 저에게 있어서 격려이자 편달입니다. 정암촌은 저의 두번째 집이고 마을사람들은 저의 가족입니다. 저는 이 성스러운 일터에서 은퇴할 때까지 끝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박일봉 의사의 말은 단호했고 힘이 넘쳤다.
출처:연변일보
편집:김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