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빈시 도외구 정양대가와 19도가 교차로에 회색 2층 건물이 있다. 이곳은 저명한 교육자이자 할빈동화학원 창설자인 등결민의 옛집이다.
등결민은 1912년 할빈 빈현에서 태여났다. 남개중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면서 주은래의 동학으로 되였으며 1914년, 일본와세다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하기 시작했다. 와세다대학에서 등결민은 리대소를 알게 되였다. 둘은 모두 정법을 배우고 있는데다 중화일본류학기독교청년회 기숙사에서 함께 지내면서 지향이 비슷한 둘은 형제처럼 사이가 좋았다. 등결민은 교육구국을 주장했다. 그는 할빈에서 동화학원을 창설해 실제행동으로 공산주의사업을 지지함으로써 중국공산당의 조기 건설과 혁명활동에 큰 공헌을 했다.
등결민
할빈동화학교 옛주소
청년시기의 등결민
할빈시 도외구에 위치한 등결민 옛집
1918년 4월 1일, 교육구국의 념원을 품은 등결민은 주은래의 협조하에 할빈에서 동화학원을 창설했으며 학교를 중학부와 소학부로 나누었다. 교수과정설치, 학교관리와 학생활동 모두 남개중학교를 모방했으며 교직을 맡으려는 수많은 선진지식인들이 학교로 찾아왔다. 그들이 새로운 사상을 홍보하고 새로운 문화를 전파하며 혁명활동을 전개함으로써 동화학교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전파함에 있어서의 중요한 진지로 성장했다.
"동화의 인문을 육성하여 인민들이 동화에 대한 주목을 끌자. 현재 교육으로 기반을 다지고 인재를 육성하며 훗날 기업의 발달을 추진하고 날따라 개발개척하며 사회를 개진하고 정치를 쇄신하는 등 이를 적극 발전시킬 생각이다." 동화학교 '서언' 중의 구절은 등결민의 교육구국사상을 고스란히 설명해주고 있다.
군벌통치의 험악한 환경속에서 등결민은 동화학교를 빌어 수많은 혁명지사들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홍보하도록 엄호함으로써 할빈이 조기에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전파하는 중요한 진지로 되게 했다. 1920년 8월, 리대소의 소개를 거쳐 출옥한지 얼마 되지 않은 혁명 선구자 마준이 동화학교로 왔다. 동화학교에 있는 동안 주말마다 학교를 찾아 강연회, 변론회를 조직하였을 뿐만 아니라 학생들을 상대로 혁명을 홍보하고 5.4운동과 국내외 혁명정세를 소개했다. 마준은 동화학교를 통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전파하고 공산주의사상을 홍보함으로써 동화학교에 공산주의활력을 불어넣었다. 할빈진광신문 기자 한질생이 그때의 과거사를 회억하면서 "마준이 할빈으로 오면서 동화학교는 진보인사가 발을 붙이는 곳으로 되였다."고 말했다.
동화학교는 러시아 10월혁명 이후 설립되였다. 당시 할빈이 '홍색통로'의 중요한 역으로 되면서 동화학교도 국내혁명지사들이 소비에트 러시아로 향해 학습하고 고찰하는 련락소 역할을 하게 되였다.
1920년, 주은래가 두번째로 할빈에 왔다가 등결민네 집에서 두주일가랑 머물렀다. 그 기간, 주은래는 학교를 방문하여 고찰하고 연설을 발표해 학생들에게 5.4운동의 경과와 중요한 의의를 소개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10월혁명을 칭송하고 동화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할 것을 격려하면서 사회진보에 도움이 되는 인재가 되기를 희망했다.
1921년 1월, 공산국제 극동국으로 업무를 보러 갔던 장태뢰가 할빈에 도착했을 때 리대소의 추천장을 들고 동화학교를 찾아갔다. 등결민은 그를 위해 식사와 숙소를 마련해주고 출국려권수속을 대행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엄호해주기도 했다. 1924년, 리대소가 공산국제 제5차 대표대회 참석차 소련으로 향발하던 중 할빈을 거쳤다. 그는 할빈에 있는 동안 사촌형 리상년의 딱친구 왕방전이 도외구에서 차린 '굉창모' 잡화가게에서 머물렀다. 할빈에 머무르며 다른 동지들을 기다리는 동안 리대소는 등결민이 창설한 동화학교 주소를 특별히 탐방하기도 했다.
동화학교는 중국혁명을 위해 대량의 신예부대를 육성해냈다. 학교 사생들은 중동철도 및 할빈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전파해 선동역할을 일으킴으로써 중동철도 로동자운동, 할빈 당조직 건설에 막대한 공헌을 했다. 동북지역 첫 공산당조직-중공할빈조직이 건립될 때 그중 장소덕, 류천우 등 2명 성원 모두 동화학교의 교원이였다.
1922년, 등결민은 할빈시 대표로 중동로 밭 문제를 교섭하려고 북경으로 갔다가 동북당국의 지명수배를 받게 되였다. 1923년, 사립북평국제대학을 창설했으며 훗날 가명을 쓰고 천진에서 은거생활을 했다. 1926년, 등결민은 질환으로 천진에서 서거했다.
/동북망 조선어채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