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동 문제는 어떻게 5.4 운동으로 이어졌을가?
무엇때문에 북경 학생들이 가장 먼저 운동에 뛰여들었을가?
운동에 뛰여든 청년들은 어떻게 민족 각성이라는 "희망의 불씨"를 지폈을가?
▲산동 특권이 일본 수중에 들어가면서 일본은 화북으로까지 세력을 뻗치며 수도를 위협했다
1919년 중국은 전쟁 승리국으로서 빠리 평화회의에서 "공리가 강권을 이겨내길" 희망했다.
그러나 렬강들은 산동에 대한 독일의 특권을 일본에 전부 교부할 것을 요구했다.
오랜시간 쌓여왔던 중국 인민의 분노는 이로써 한순간에 화산과도 같이 폭발했다.
▲북경대학 홍루
▲"북경학계전체통고"
북경의 학생들이 뛰쳐나왔다. "북경학계전체통고"에는 중국의 토지는 정복할 수 있어도 그대로 내여줄 수는 없습니다!
중국 인민은 살해당할지언정 머리를 숙일 수 없습니다! 나라가 위험합니다! 뛰쳐나와야 합니다!
▲5.4운동 로선
우리는 영원히 잊을 수 없다. 1919년 5월 4일 그날 3천여명 북경 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웨친 천지를 뒤흔든 그 함성을.
"청도를 돌려받자"
"산동 권리를 회수하자"
"매국노를 처단하자"
"빠리 평화회의의 서명을 거부한다"
"매국노를 제거하고 강권에 저항하자"
"중국은 중국인의 중국이다"
"'21조항'을 폐지하라"
▲"5.4운동" 유화
깊이 잠들어 있던 민족은 각성했고 5.4운동은 중국공산당 탄생을 위해 사상, 간부 토대를 마련했다.이는 100년전의 "90후" "00"후가 내린 선택이다. 5.4운동에서 가흥 홍선에 이르기까지 조국은 드디여 패기 넘치는 "소년 중국"으로 되였다.
열혈 청춘으로 악몽을 깨뜨렸다.그들의 청춘은그때 벌써 민족정신의일부분으로 되였다.백년 남짓이 지난 오늘에도5.4 정신은 당대 청년들에게특별한 의의를 가진다.
/중국조선어방송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