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文 ·English ·Партнеры ·
 
전체기사  |  흑룡강  |  정치  |  경제  |  사회  |  동포사회  |  국제  |  진달래 작가방  |  톱 기사  |  사설·칼럼  |  기획·특집 PDF 지면보기 | 흑룡강신문 구독신청
您当前的位置 : 조선어 > 사회 > 옛마을 > 옛마을 새마을
제26편 여섯 신을 섬긴 본계의 박씨
//hljxinwen.dbw.cn  2018-03-20 09:51:00

베이징 김호림 특별기고

  (흑룡강신문=하얼빈)"말씀을 조심하세요, 저분이 당신의 육성을 녹음하고 있잖아요."

강 양쪽에 걸쳐있는 박보, 다리 아래에 빨래하는 여인이 있다 .

  솔직히 인터뷰를 받는 박씨보다 그의 아내가 긴장을 하는 것 같았다. 도중에 얘기를 함부로 하지 말라고 박씨에게 연신 귀띔을 한다. 아내는 인터뷰에 응한 남편을 따라 기어이 현소재지 중심에 있는 호텔까지 대동하고 있었다.

  난방시설이 잘되어 있었지만 객실에는 갑자기 한겨울의 냉기가 몰려들 듯 했다.

  요녕성(遼寧省) 본계(本溪)는 청(淸)나라 옹정(雍正) 12년(1734)에 시내 북쪽의 작은 호수로 생긴 이름이다. 호수가 서우(犀牛)의 뿔 모양 같다고 해서 서호(犀湖)라고 불리다가 본계라고 작명했다고 한다.

인터뷰를 받고 있는 박씨의 제12대 박명욱.

  박씨의 세조(世祖)는 지명보다도 훨씬 먼저 본계에 자리를 잡았다고 박명욱(朴明煜, 1952년 출생)이 밝히고 있었다. "그 동네가 현성 남쪽으로 10리 되는 곳에 있었는데요. 박씨들이 세운 마을이라고 해서 박보(朴堡)라고 불립니다."

  문자기록으로 박씨의 세조가 처음 세간에 등장하는 것은 1625년경이다. 후금(後金) 천명(天命) 10년(1625), 태조 누르하치(努爾哈赤)의 한 손자가 본계에 말뚝을 박고 장원(莊園)을 설립한다. 이 손자가 훗날 화석경근(和碩敬謹) 친왕으로 된 인물이다. 이때 흥경(興京)에서 양홍기(鑲紅旗)와 친왕의 장원에 보낸 장정(壯丁) 가운데는 박보 박씨의 세조가 된 박응강(朴應强, 맏이)과 박영권(朴英卷, 셋째), 박영영(朴英榮, 넷째), 박응원(朴應元, 다섯째) 형제 4명의 이름이 들어있었다. 그러나 친왕의 소작농과 토지 명부에 둘째 박응조(朴應祖)는 등장하지 않는다. 박응조가 전쟁 난리판에서 사망했거나 어디론가 실종되었을까… 실제로 후금은 포로들을 왕공귀족의 포의(包衣, 노복)로 파견했는데, 그 시기 흥경에는 조선과의 전쟁으로 갑자기 조선인이 대량 출현하고 있었다.

제5대 박자본 등이 기부하여 만든 청나라 때의 사찰의 구리종.

  1619년, 사르후(薩爾滸) 전투에서 후금에 대항하던 명(明)나라와 조선의 군대는 크게 패했다. 미구에 포로병들은 후금의 도읍인 흥경에 압송되었다. 참고로 사르후 전투는 명나라와 후금의 전략적인 결전이었으며 뒤이어 후금은 만주 지역을 차지했다. 박씨의 세조가 포로였다면 그 전장은 이 사르후 전투일 가능성을 쉽게 점칠 수 있다. 일각에서는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이나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과 연결시키지만, 후금(청)이 조선을 침입한 이 전쟁은 본계에 친왕의 장원이 나타난 후 비로소 생긴 사건이다.

  우리 일행이 박명욱을 만났을 때 박씨의 후손은 제16대에 이르고 있었다. 한 세대를 25년으로 계산하는 관습에 따르더라도 박씨의 가계는 옛 명부의 기록과 일치하며 모두 400년의 세월을 잇고 있는 것이다. 맏이 박응강에게 아들이 있어서 가계를 이었다면 박씨의 후손은 제17대나 제18대에 이르며 가계의 역사는 더 길어진다. 본계 박씨의 세계(世系)는 대륙에서 17세기가 아니라 이보다 더 이른 16세기부터 시작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어느 박씨의 집에 모신 가계도, 섬긴 신 여섯의 사진이 유표한다.

  실제로 세조가 전투에서 포로로 된 박씨일지 아니면 세조 자체가 요동(遼東)에 살던 박씨의 후손일지를 누구도 모른다. 세조의 흔적이 묘연하여 고증할 길 없다고 박씨의 선인(先人)들은 족보를 만들면서 한탄하고 있었다.

  박씨의 세조가 그들이 후손에게 남긴 것은 항렬의 돌림자 10자이다. 순서대로 "응천대중국(應天代仲國)/자덕금부옥(自德金富玉)"이다. 이 돌림자는 대답할 응(應)이 꽃부리 영(英)으로 쓰이는 등 세조의 돌림자부터 일부 글자가 비슷하거나 전혀 다른 글자로 되어 있다.

  본계 박씨의 가문에 확실한 기억으로 유존되는 선인은 제5대부터인 것으로 알려진다. 이때 박씨의 이름은 구전이 아닌 명문(銘文)으로 확실하게 등장하고 있었다. 건륭(乾隆, 1736~1796) 연간 본계 현소재지에 있던 영녕사의 종에 지명 박가복(朴家卜)과 인명 박자본(朴自本)이 명문으로 나타났다. 박자본 등 마을의 유지인사가 사찰의 기부자로 되고 있었던 것이다.

박보의 촌민 박문붕, 조선족으로 신분증에 기입되어 있다 .

  박가복(朴家卜)은 광서(光緖, 1875~1908) 연간에 박가보자(朴家堡子)로 개칭했고 민국(民國, 1912~1949) 연간에 이름을 줄여서 박보로 되었다. 이런 중국말의 지명에 앞서 옹정(雍正, 1722~1733) 연간의 옛 공문에는 다른 지명을 적고 있었다. 이에 따르면 박보는 또 만족말로 심산의 골짜기라는 의미의 '합리마화라(哈蜊螞火羅)'라고 불리고 있었다.

  박자본은 스스로의 자(自)를 항렬의 돌림자로 쓰고 있으니, 분명히 본계 박씨 가족의 제5대 인물이다. 항렬 돌림자의 10자가 박씨의 가족에 대대로 전승되면서 비로소 밝힐 수 있는 많지 않는 내용의 일부이다.

  어찌됐거나 본계 박씨의 족보에는 본관이 적혀 있지 않았다. 옛 문헌에 의하면 박씨는 314본이나 되지만, 본계 박씨에 문자나 구전으로 전하는 본관이 없다. 오직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를 순수한 혈족으로 이어온 성씨라는 그 하나만 판정할 수 있을 뿐이다. 기어이 그 무슨 본관이라고 한다면 본계가 그들의 본관으로 되고 있는 것이다.

산성자, 앞쪽 산기슭에 박보가 위치한다.

  본계에 나타난 박씨의 세조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되고 있을까…

  현지의 만족과 한족은 옛날부터 박씨를 "고려가 뿌린 씨앗"이라고 지칭하고 있었다. "고려인이 조선으로 돌아갈 때 남은 고려인의 후대이지요."

  1988년 박보 지역을 답사했던 연변의 사학자들은 '중국조선족이주사 논문집(1989)'에 이 방문기록을 적고 있다. 이에 따르면 박씨의 선인들은 일찍 고려의 구리 그릇과 숟가락, 대야 등을 사용했으며 또 당(唐)나라 때의 고구려 토기를 발굴한 적 있었다고 한다. 박보 박씨들의 조선족 족명(族名)을 회복할 데 대한 공사(公社, 향)의 청시보고에도 박보에 고구려의 토기 등이 잔존한다고 적고 있다.

  "박씨가 당나라 때 벌써 여기에 있었다는 건 고증된 바 없어요." 박명욱도 이렇게 칼로 자르듯 말하고 있었다.

  실제로 본계 정부의 문물부문 역시 그들은 이런 유물을 발견한 적 없으며 귀로 들은 적도 없었다는 것을 밝혔다고 논문집의 방문기록은 덧붙이고 있다.

  이때 박씨에게 채근을 하듯 아내고 또 "여보세요"를 외우고 있었다. 그럴 법 했다. 한때 한국인이 박씨 마을과 박씨를 늘 찾아오고 이런저런 설이 난무했다. 얼결에 발설한 말 한마디가 박씨 가족사의 또 다른 설을 만들었다. 본의든 자의든 그 출처의 진원지가 된 박씨들은 번마다 해석을 하느라고 혼쭐을 내야 했다고 한다.

  박명욱을 일행에게 소개한 박모는 나중에 그의 이름자를 밝히는 자체를 거부했다. 이 박모는 박명욱 등과 더불어 몇 해 전에 본계의 박씨 족보를 새로 작성했던 주인공이다.

  본계의 박씨 족보는 일찍 1870년에 최초로 작성되었다. 그때 박씨 가문의 좌장들은 한 자리에 모여 족보를 작성하였으며 또 "문명희승세(文明希勝世)/준위진태창(俊衛振太昌)/시서기홍업(詩書起鴻業)/공유강무량(功猷康茂良)"의 항렬 20글자를 새로 만들었다.

  박명욱은 이 새로운 항렬자의 두 번째 글자인 밝을 명(明)을 이름에 쓰고 있었다. 그보다 한 세대 위의 글월 문(文)을 쓰고 있는 제11대의 박씨가 아직도 몇몇 생존한다고 했다.

  뒤미처 일행이 박보 마을에서 만난 박문붕(朴文朋, 1934년 출생)은 바로 그 항렬인 문(文)의 주인공이었다. 길가에서 만난 박보의 한 촌민은 박씨의 항렬의 제일 연장자를 찾는다고 하니 대뜸 박문봉을 안내하고 있었다.

  박문붕은 아버지의 항렬 돌림자인 구슬 옥(玉)부터 제20대의 돌림자인 인간 세(世)까지 얼음에 박 밀 듯 외우고 있었다. 단지 거기에 그치고 있었다. 박씨 가문의 족보가 없었고 없고 또 가족의 가계도도 없었다.

  "어릴 때부터 들은 돌림자인거든. 그 나머지는 몰라. 또 필요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되지. 돌림자를 알고 있는 박씨가 마을에 많거든."

  박씨 족보는 극좌운동인 '문화대혁명(1966~1976)'을 전후로 박보에서 거의 다 소실되었다고 한다. 오히려 박보를 떠나 타지로 이사했던 박씨들이 향수(鄕愁) 때문에 그들의 뿌리를 잊지 않기 위해 족보나 가계도의 필사본을 적지 않게 남기고 있었다.

  박씨의 가계도도 박보 부근의 구재욕(久才峪)에서 최초로 발견되고 있었다. 구재욕 출신인 제11대의 박문충(朴文忠)은 그의 증조부인 제7대부터 유전된 가계도라고 전했다.

  "가계도에 남다른데 있습니다. 신두(神頭) 즉 섬기는 신이 여섯이나 되거든요."

  다섯 신은 화신(火神), 호신(虎神), 낭낭신(娘娘神), 나으리신(老爺神), 오도신(五道神)으로 분명 만족이 섬기는 신두이다. 그러나 제일 오른쪽의 신두는 갓 모자를 쓰고 있는 고려인이다. 1980년대 말, 본계 현지(縣志)판공실의 주임 박명범(朴明範)은 이 고려인 신두가 1930년대 비로소 첨부한 것이며 그 전에는 없던 것이라고 그를 방문한 사학자들에게 밝혔다. 박명범의 증언을 특별히 언급하는 것은 대개 그의 가문에서 전하는 필사본의 20자의 돌림자를 본계의 박씨들이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족의 신두를 섬긴 것은 본계의 박씨가 친왕의 포의 신분인데 연유한 것이다. 그들은 만주 8기(八旗)의 양홍기로 되고 있었지만 농업합작화(合作化, 1949~1953) 전후에 거개 한족으로 족명(族名)을 바꿨다고 한다. 박씨가 조선인 후예라는 것이 인정되면서 1984년 본계현 정부는 박보의 박씨가 조선족으로 족명을 바꾸는데 동의했다. 부근의 산성자(山城子)의 박씨도 조선족으로 족명을 회복했다. 산성자는 실은 함께 박가복으로 불리던 마을이다. 이웃한 소협하(小夾河)와 북전자(北甸子), 구재욕에 살고 있던 박씨의 후손들도 선후하여 조선족으로 족명을 개명했다.

  그러나 청나라 말과 민국(民國, 1912~1949) 초년을 선후하여 길림성(吉林省)과 흑룡강성(黑龍江省)에 각기 이주, 박씨 마을을 형성했던 본계 박씨의 후손은 종국적으로 그냥 한족으로 되고 있다.

  사실상 만족이든 한족이든 아니면 조선족이든 적지 않은 박씨에게는 다만 신분증명서에 덧붙인 하나의 이름에 불과했다. 박보의 좌장으로 되는 박문붕은 그의 족명에 별다른 흥심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조선족이라고 뭐 특별한 대우라곤 없어. 조선족이라고 하니까 조선족이 된 거야."

  박문붕의 아내 장씨도 1961년에 결혼을 할 때 신랑을 만족인줄로 알았다고 한다. 그즈음인 1964년 첫 전국인구전면조사를 할 때 본계 지역 조선족 인구는 12,938명이었다고 '본계시지(本溪市志)'가 밝히고 있다. 물론 이때 본계 토박이의 박씨는 조선족 인구 숫자에 아직 포함하지 않고 있었다. 박씨들이 조선족으로 족명을 바꾼 1985년 본계 지역의 조선족 인구는 무려 13,068명에 이르렀다. 본계현은 1964년 그 때 조선족이 단 305명에 불과했으나 1985년에는 8,005명으로 급증했다. 미구에 딸과 아들, 손자 모두 조선족으로 되어있지만 박문붕 부부는 여전히 족명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조선족 집거지인 연변은 몰라도 조상이 살던 한국은 잘 알고 있었다. 둘째 아들이 한국으로 노무를 나가면서 한국은 갑자기 가깝고 친숙한 나라로 다가오고 있었다. 박보와 산성자의 박씨들이 지난해부터 한국에 노무자로 진출하고 있었다. 기회가 생기면 손자가 조선말을 배우게 하고 싶다는 박문붕의 말도 실은 이 화두 때문에 나오고 있었다.

  와중에 가문에서 불문율로 지키는 게 하나 있다고 박문붕이 밝혔다. "손자가 처녀를 만났는데 박씨라고 해. 그래서 그것만은 안 된다고 딱 막아버렸지."

  문중에는 박씨라면 서로 통혼을 하지 못하게 되어있다는 것. 잔존한 조선족의 풍속이라면 그뿐인 듯 했다. 기실 같은 성씨가 통혼을 하지 못하는 것은 박씨만의 풍속이 아니다. 만족도 마찬가지이다. 만족은 옛날 동성이본이라도 통혼할 수 없었다고 한다. 동성의 통혼 불가는 박씨에게 전승된 조선민족의 풍속인지 아니면 만족의 풍속이 유전된 것인지 좀처럼 가려낼 수 없었다.

  작은 강의 저쪽 동네도 박보 마을이며 그 동네에도 박씨가 살고 있다고 했다. 강을 건너는데 다리 아래에서 웬 여인이 손빨래를 하고 있었다. 박씨가 아니라 송씨(宋氏)이며 한족이라고 했다. 박보 마을에는 다른 성씨의 한족이 반수 정도이며 촌장도 더는 박씨가 아니라고 한다.

  "박보를 아직도 박씨네 마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사람이 다 바뀌고 있잖아요?"

  정말로 인간이 바뀌고 세상이 바뀌고 있었다. 박씨의 옛 이야기는 아낙네들이 물가에 토닥토닥 흘리던 소리처럼 갈수록 역사의 뒤안길에 멀어지고 있었다.

· 아하조선족향 강남수진 오픈
· [아름다운 룡강을 가다] 흑하: 굽어본 오색산 풍경 러시아 유화 방불케해
· 귀주 진원, 다채로운 행사로 국제사진대전 맞이
· 국내 ‘조선족’ 이름의 1급 사회단체가 얼마?
· "평생 단 한 가지 일을 하겠습니다"
· 제2회 중국-아프리카 경제무역박람회 대중 개방일 맞아
· 연변인민출판사 창사 70돐 기념 좌담회 개최
· 다채로운 문예공연 박람회 관객들의 발목 잡아
· “한가족처럼 화목한 촌 만드는 것이 ‘꿈’입니다”
· 연변조선족자치주 중로년모델전시경연 진행…11개 대표팀 238명 선수 참가
회사소개   |   신문구독   |   광고안내   |   제휴안내   |    기사제보    |   편집기자채용   |   저작권규약
주소: 중국 흑룡강성 할빈시 남강구 한수로 333호(中国 黑龙江省 哈尔滨市 南岗区 汉水路333号)
Tel:+86-451-87116814 | 广播电视节目制作经营许可证:黑字第00087号
(黑ICP备10202397号) | Copyright@hljxinwen.cn.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