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김호림 특별기고
(흑룡강신문=하얼빈)결말부터 말한다면 그는 무명인이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미스터리의 인물이라는 얘기이다. 시골마을에 몸을 숨겼던 그는 묘비명에 비로소 진실한 신분을 드러냈다. '정삼품(正三品)의 통정대부(通政大夫)', 그러고 보면 그는 어전(御前)회의에 참석할 수 있던 유수의 고위 관원이었다.
옥수수를 수확하고 있는 농부들, 뒤에 보이는 산비탈에 통정대부의 무덤이 있다.
"우리 마을에는 본래 할아버지의 후손들만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홍촌(洪村) 부락이라고 불렀다고 하지요."
통정대부의 손녀 홍귀숙(洪貴淑, 1945년 출생)을 화룡(和龍) 근교의 홍촌 부락에서 만났다. 홍귀숙은 통정대부 홍씨의 현존한 유일한 3대 후손이라고 한다. 홍씨의 후손은 증손과 고손, 현손을 이어 내손(來孫)의 세대로 번창하고 있었다.
"(5대) 8촌이 일가(一家)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12촌, 13촌이나 되니…"
하필이면 울타리의 너머 줄줄이 늘어선 봉우리가 겨끔내기로 시야에 달려오고 있었다. 이야기의 도중에 헤어보니 꼭 다섯 봉우리였다. 마을 사람들은 남쪽의 이 산을 오봉산(五峰山)이라고 부른다고 홍귀숙이 말한다.
웬 일인지 통정대부가 묻힌 마을 동쪽의 산은 오봉산처럼 지명이 없었다. 거친 산비탈의 이 산은 그저 무명의 뒷산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홍씨 가족이 살고 있던 홍촌 부락 역시 오래 전에 잊힌 지명이다. 홍귀숙의 말을 빈다면 토박이들만 홍촌 부락이라는 옛 이름을 알고 있을 뿐이다. 지방문헌인 《화룡현(和龍縣) 지명지(地名志)》에는 다른 지명인 원화동(元化洞)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사실상 원화(元和)는 지명이 아닌 연호로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당(唐)나라 헌종(憲宗, 802~820)의 연호인데, '원화중흥(元和中興)'의 성황으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헌종의 재위기간 잠시적인 통일이 실현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연호가 어찌하여 연변 오지의 마을 이름으로 다시 출현하고 있는지 무척 궁금하다.
홍촌 부락 아니, 원화동은 여타의 마을과 달리 동북쪽의 무덤을 뒤에 업고 서남쪽의 무연한 산등성이를 앞으로 바라고 있었다. "서남쪽으로 벗을 얻고, 동북쪽으로 벗을 잃는다.(西南得朋,東北喪朋)" 역경(易經)을 읽은 사람이라면 곤괘(坤卦)에 나오는 이 말귀를 저도 몰래 머리에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홍씨의 선조가 기어이 이 오봉산의 기슭을 주거지로 선택한 것은 뭔가의 까닭이 있는 것 같다. 화룡 현성의 동쪽으로 겨우 4리 정도 떨어져 있지만 산과 산 사이에 숨어있는 작은 동네이다. 공화국 창건(1949) 후 한때는 화룡진의 환성구(環城區), 환성향(環城鄕)에 속했다고 하니 실은 현성 마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통정대부의 손녀 홍귀숙이 인터뷰를 받고 있다.
정말이지 알 듯 말 듯 하면서 또 뭐가 아닌듯한 그런 이야기를 기술하는 것 같다. 아무래도 홍씨의 통정대부 품계부터 설명해야 하지 않을지 한다.
통정대부는 조선시대 문신 정삼품 당상(堂上)의 문관 품계이다. 정상품의 상계부터 당상관(堂上官)이라고 하며 하계 이하를 당하관(堂下官)이라고 했다. 당상관은 조정에서 정사를 볼 때 대청(堂)에 올라가 의자에 앉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을 가리키는데서 나온 용어이다. 통정대부의 벼슬은 6승지, 6조의 참의, 대사간, 성균관의 대사성, 직제학, 지방관으로의 목사, 절제사 등인데 지금의 직급으로는 차관급이나 1급 공무원의 관리에 해당한다. 옛날에는 당상관 이상의 벼슬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홍귀숙은 통정대부의 조부가 옛날에 무슨 관원이었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저의)큰 오빠라면 혹시 알지 않겠어요? 저는 할아버지가 세상을 뜬 후 태어났습니다."
홍귀숙의 큰 오빠 홍창수(洪昌洙)는 조부가 사망되기 전인 1925년 경 홍촌 부락에서 출생했다고 한다. 현재로선 홍창수도 그의 부친과 조부를 따라 홍촌 부락 뒷산의 어느 한 무덤의 주인으로 되고 있었다.
미구에 홍귀숙의 안내를 받아 마을의 뒷산에 올랐다. 달구지 길이 비뚤비뚤하게 산비탈을 타고 있었다. 무덤 떼는 중턱의 옥수수 밭을 지나자 문득 눈앞에 나타나고 있었다. 뒷산의 홍씨네 선산에는 홍씨 가족의 무덤이 약 20기 있었다.
이야기를 하는 순서가 조금 바뀐 것 같다. 홍귀숙은 솔직히 뜻하지 않게 만나게 된 사람이다. 답사지의 옛 마을 옛 사진이 신문 등에 오르면서 허씨 성의 지인이 옛 통정대부의 묘비를 제보했던 것. 허씨를 통해 허씨의 친구, 다시 허씨의 친구를 통해 종국적으로 통정대부의 손녀 홍귀숙과의 우연한 만남이 이뤄졌다.
아니, 우연과 우연의 만남이라면 필연이라고 하겠다. 얼마 전 화룡 동북쪽의 연길(延吉)에서도 통정대부의 묘비가 발견되었다. 웬 등산객의 낯선 발길에 산등성이에 있던 '통정대부'가 숨은 얼굴을 드러냈던 것. 차씨(車氏) 성의 이 통정대부는 현지 문물관원에 의해 청나라 정부의 관원으로 추정되고 있었다. 그러나 청나라 정부의 봉금(封禁) 후 연길에는 3품 이상의 관원이 임직된 적이 없다. 와중에 또 하나의 통정대부가 연길 근처의 화룡에 유성(流星)처럼 문득 나타난 것이다.
홍씨 선조의 통정대부는 분명히 강 이쪽 연변의 토착민이 아니었다. 홍귀숙의 기억에 남고 있는 가족의 옛 고향은 바로 반도의 한 귀퉁이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릴 때 들었는데요, 할아버지는 명천(明川)에서 (이민을) 왔다고 합니다."
통정대부의 무덤은 홍씨 선산의 제일 높은 곳의 왼쪽에 있었다. 홍귀숙은 묘비가 예전과 달리 오른쪽으로 옮겨졌다고 밝혔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몇 년 전 조부의 무덤은 감쪽같이 도굴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제관을 찾아 산신(山神)에게 설전하고 고축(告祝)한 후 파묘(破墓)하여 개장(改葬)을 했다는 것.
홍씨 성의 통정대부의 무덤, 누군가 이 무덤도 도굴했다.
묘비도 자리를 옮겼지만 더는 옛 묘비의 원상이 아닌 듯 했다. 언제인지 누군가 비석 뒷면의 명문(銘文) 일부를 남몰래 지우고 있었다. 또 오자로 보이는 글자가 일부 있어서 더구나 판독이 어려웠다. 그래서 묘비의 명문은 나중에 한국의 전문인에게 의뢰하여 판독을 하게 되었다.
"은열(殷悅)은 31대의 비조(鼻祖)가 된다. 대대로 전해져서 16세(世) 진사공(進士公)은 이름이 이(㶊)로서 경성(鏡城)에 피신해 들어갔는데 처음으로 북쪽 사람이 되었다…"
홍씨 가문의 족보를 음각한 명문은 이렇게 서두를 떼고 있었다. 은열은 고려(918~1392)의 개국공신으로 남양 홍씨의 기시조(起始祖)이다. 남양 홍씨는 이 은열을 시조로 하는 당홍계(唐洪系)와 선행(先幸)을 시조로 하는 토홍계(土洪系)로 나뉜다. 참고로 당홍계는 당나라 때 영류왕(營留王, 618~642)의 요청에 의해 고구려에 입국한 8학사(學士)의 한 사람인 홍천하(洪天下)의 후손으로 귀화파이며 토홍계는 반도의 토착파로 서로 한 조상의 관계가 아니다.
홍씨 가문이 반도의 남쪽에서 북쪽의 함경북도 명천으로 이주한 것은 9세손인 만호(萬戶, 종사품의 무관직) 대남(大男)의 증손 재우(載憂) 때의 일이라고 명문은 기록한다. 재우가 바로 무덤 주인인 통정대부 홍씨의 5대조(五代祖)이다. 통정대부 홍씨는 을축(乙丑, 1865)년에 계언(啓彦)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경오(庚午, 1930년)년에 사망했다. 그는 늙어서 통정대부의 자리에 올랐다고 한다. 그는 사망 후 화룡 명신촌(明新村) 원화동의 동산 묘좌(卯座, 정동방 방위)의 언덕에 장사를 지냈다.
정작 홍씨의 가문이 언제 명신촌의 원화동에 이주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혹여 남양 홍씨의 첫 시조를 뒤쫓아 대륙으로 다시 이주했을까… '신원촌지(新元村志)'는 촌락이 1913년을 전후하여 생겼다고 기록한다. 홍씨가 신원촌 초기의 마을인 원화동에 시초의 동네 홍촌 부락을 만들었으니, 홍씨가 바로 신원촌의 첫 이주민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홍씨 가족은 촌지(村志)의 기록에 나오는 1913년 전후의 이주민이라는 얘기가 된다.
이에 앞서 1910년, 이른바 '한일합방'으로 백성들은 망국의 수치를 당하고 있었다. '한일합방'은 조선인의 간도(間島) 이주를 더욱 가속시켰다. 1910년 무렵, 간도를 포함한 만주에는 조선인이 무려 20만 명을 넘었다는 관방의 통계가 있다. 통정대부 홍씨의 이주시기가 '한일합방'을 즈음한 데는 미상불 특별한 이유가 깃들어 있었다. 그러고 보면 연길에 발견된 통정대부 차씨의 묘비명에 근거하여 차씨 혹은 그의 후손도 홍씨처럼 '한일합방'에 즈음한 시기에 강을 건넌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주장하는 설은 별로 이상하지 않다. 잠깐, 화룡 동쪽의 용정시(龍井市) 명동촌(明洞村)의 선박골에서도 통정대부의 무덤과 묘비를 만난 현지인이 있다. 왕을 면전에서 만나던 통제대부들이 이처럼 서로 강을 건넜으니 하물며 나라를 잃은 천하의 백성임에랴!
부모의 옛 사진을 내놓은 홍귀숙, 부친의 얼굴에서 조부의 옛 모습을 읽을 수 있을까.
통정대부의 홍씨 묘지명은 홍씨의 1천년 가족사와 더불어 조선인(족)의 1백년 이민사를 기록하고 있다. 와중에 홍씨의 묘비를 세우게 한 것은 통정대부의 숙부인(淑夫人)인이라고 손녀 홍귀숙이 어린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참고로 정삼품의 당상관의 처는 숙부인(淑夫人)이라고 한다. 임천(林川) 임씨(林氏)의 이 숙부인은 갑술(甲戌, 1874)년에 출생, 슬하에 4남1여를 둔 것으로 묘비에 기록되고 있다.
홍귀숙은 조모인 숙부인이 여든 세 남짓한 나이로 장수했다고 회억했다. "할머니는 1958년에 우리 마을에서 세상을 떴어요."
그때는 홍귀숙이 이미 세상사를 깨닫기 시작한 열셋의 나이었다. 그러나 묘비 명문에 왜서 조모의 기록 부분을 누가 왜서 언제 갈아서 없앴는지는 지금도 모르고 있었다. 묘비명의 서문 자체도 지웠는지 통정대부의 이름과 약력은 잘 밝혀지지 않고 있다.
어찌됐거나 통정대부의 묘비는 장자 순룡(淳龍)이 세웠다고 명문으로 밝히고 있었다. 순룡을 비롯한 순(淳)자 항렬의 네 형제 그리고 제3대의 표(杓)자 항렬의 6명 손자의 이름까지 묘비에 낱낱이 기록되고 있었다.
통정대부의 이런 후손들로 홍씨는 올망졸망 작은 동네를 이루고 있었다. 홍귀숙이 출생하던 1945년 그 무렵 마을에는 홍씨가 열대여섯 가구나 되었다고 한다. 연변은 강을 건넌 조선인(족)이 제일 많이 집거한 지역이다. 그러나 한 지역, 한 동네의 사람들이 집단이주하여 한곳에 모여 사는 마을은 많지만 이처럼 한 성씨의 한 가족으로 동네를 이룬 집성촌은 극히 희소하다.
"홍씨는 사내들이 모두 장대 같은 호걸이라고 하던데요. 이쪽의 동네에서 소리를 치면 저쪽의 시내에서 금방 소리가 들렸다고 하지요."
홍귀숙의 가문 자랑이다. 그녀의 부친은 그 세대에서 드물게 키가 구척이나 되었다. 가문의 어느 홍씨는 화룡 현성에서 씨름대회가 벌어지면 둘도 없는 일등이었다고 한다. 거짓말 같지 않았다. 옛날에는 웬만한 중국인들은 홍촌 부락에 감히 들어오지 못했다고 전한다.
그래서인지 홍귀숙은 '쿵개지팡'의 이름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에 담고 있었다. '쿵개지팡'은 우리말로 '공씨네 지방(孔氏地方)'을 뜻한다. 중국인의 공씨는 그토록 무서운 홍씨네 부락에 기어이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토지개혁(1947) 때 마을의 유일한 지주로 획분 되었다고 하니, 공씨의 부지런하고 영악한 성미를 누구라도 단번에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홍씨 부락에 쐐기처럼 박혀 살고 있던 공씨도 청산된 얼마 후 이 고장을 떠났다. 공교롭게 홍씨 부락이 해체되기 시작한 것 역시 이 무렵부터라고 한다. 홍씨 가운데 공씨처럼 부농이나 지주가 생긴 건 아니라고 홍귀숙이 거듭 말한다.
연길의 북부 산정에서 발견된 통정대부의 옛 비석을 문물일군들이 살펴보고 있다.
"우리 홍씨는 땅을 분여 받으면서 이집 저집 땅을 따라 이사를 했지요. 또 공부하고 직장을 따라 마을을 떠났습니다."
달이 지고 해가 뜨면서 홍촌 부락은 원화동으로 이어 신원툰의 일원으로 되었고 종국적으로 신원촌의 4,5대(隊, 촌민소조)로 되었다. 홍촌 부락은 새로 나타나는 마을 이름과 더불어 차츰 집단기억에서 사라졌다. 아니, 홍촌 부락 자체가 여타의 폐촌처럼 잠식, 소실되고 있었다. 어느덧 신원촌의 홍씨 가족은 출가외인의 홍귀숙까지 합쳐야 고작 네 가구밖에 남지 않고 있었다.
홍씨의 선산은 오랫동안 사람의 손이 가지 않은 듯 잡풀이 무성했다. 묘비가 없는 어느 무덤에는 팔뚝처럼 실한 나무가 키 넘어 자라고 있었다. 문득 통상대부의 홍씨가 무명인으로 되고 있는 원인을 깨달을 것 같았다. 정말이지 통상대부는 그의 후손들이 저마다 선조의 옛 고향을 떠날 슬픈 이야기를 미리 전부터 읽고 있은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