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김호림 특별기고
(흑룡강신문=하얼빈)동명의 천태산(天臺山)은 중국 대륙에 십여 개나 된다. 제일 유명한 천태산은 항주(杭州)의 남쪽에 위했한다. 이 천태산은 주(周)나라 때 자미성(紫微星)을 지키는 상, 중, 하 삼태성(三臺星)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정말로 주성(主星)을 수호하듯 산봉우리들이 연꽃잎처럼 주봉을 에워싸고 있다.
산이 크니 골이 깊었다. 옛날 많은 은사(隱士)들이 산속에서 수행을 했다고 전한다.
"이런 산속에 살면 수행을 하지 않아도 은사가 될 수 있겠지요?" 일행을 안내했던 택시 기사가 물음조로 하는 말이다.
여행가 서하객이 세번이나 걸었다는 천태산의 옛길.
산기슭부터 오불꼬불한 산길이 주봉까지 기어가고 있었다. 이따금 급격한 굽이돌이가 나타나서 저도 몰래 손에 땀을 쥐었다. 뭔가 물으려던 것도 깜박깜박 돌덩이처럼 길가에 떨어뜨렸다.
"예전에는 산속에서 살면서 시내 구경조차 하지 못한 촌민들이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난 세기 7,80년대까지 현지에서 있었다고 하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였다. 이런 현대판 '은사'들의 은거 이유는 금방 알 것 같았다. 산중에 있는 마을 석량(石梁)에서 10여㎞의 산길을 내려 다시 현성까지 두발로 닿으려면 하루 나절의 시간을 허무하게 길에 널어놓아야 했던 것이다.
말 그대로 범속의 세계를 떠나려는 수련자의 첫손 꼽히는 도장이였다.
기실 천태산은 산수의 경치로도 빼어났다. 봄에는 두견화가 산을 울긋불긋 물들이고 겨울에는 설경이 그림처럼 펼쳐진다고 한다. 석량이라는 마을 자체는 바로 폭포가 쏟아져 내리는 골짜기에 바위가 대들보처럼 얹혀있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천태산은 당(唐)나라 때 벌써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전당시(全唐詩)》에 나오는 2천여 명의 시인 가운데서 이백(李白), 두보(杜甫) 등 3백여 명이 천태산을 다녀갔다고 전한다. '천고의 기인'이라고 불리는 명나라 때의 여행가 서하객(徐霞客)은 일생동안 세 번이나 천태산에 올랐으며 천태산 하나를 두고 두 편의 여행기를 남겼다.
지금도 천태산에는 봄부터 구경 나들이로 산을 오르는 인파가 붐빈다고 한다. 아니, 차 때문에 천태산의 산길이 미어질 지경이란다. 그러나 우리가 산을 오르는 시기가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하다고 기사가 말했다. 눈이 녹아서 없고 꽃도 아직은 피지 않아 구경거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겨울 막바지의 주봉 화정봉(華頂峰)으로 오르는 산길은 한적하기 그지없었다. 오히려 가속 페달을 밟는 내는 기사에게 속력을 줄이라고 자주 소리를 질러야 했다. 자칫하다간 산정의 고찰에 이르기 전에 온몸을 공양물로 올리게 될 것 같았다.
화정사의 굳게 닫힌 문을 돌사자가 지키고 서있다.
화정봉 정상의 화정사(華頂寺)는 후진(後晉) 천복(天福) 원년(936)에 설립된 것으로 전한다. 원래 '화정원각(華頂圓覺) 도장'으로 불리다가 송(宋)나라 치평(治平) 3년(1066)에는 선흥사(善興寺)로 개명했고 민국(民國, 1912~1949) 때 화정강사(華頂講寺)로 불렸다. '문화대혁명' 시기 극좌운동의 충격으로 훼손되었고 근년에 다시 개축했다고 한다.
사찰의 풍경소리를 귀에 듣기도 전에 먼저 '시주'를 해야 했다. 화정사는 '천태산 화정국가삼림공원'의 일부로 되고 있었으며, 따라서 인민폐 50위안을 내고 입장권을 구매해야 했던 것이다.
정작 화정사에는 부처에게 보시를 하는 불자들이 없었다. 사찰은 보수를 하고 있었고 승려가 없는 불전에는 인부들이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화정봉은 실은 사찰보다 일명 '모봉(茅蓬)'이라고 하는 초막으로 소문이 났다. 통상 불도를 수행하는 큰 곳은 '절'이라고 하며 작은 곳은 '암자', 이보다 초라한 곳은 '모봉'이라고 한다. 옛날 화정봉에는 승려들이 재(齋)를 행하면서 기거하던 모봉이 수십 채나 있었다고 전한다.
고승 지의(智顗, 538~597)가 바로 화정봉의 모봉에서 실상의 깨달음을 크게 얻었으니, 그가 창시한 천태종(天台宗)처럼 유명한 '화정개오(華頂開悟)'라는 단어가 이로써 세상에 등장한다.
산문 밖에 버림을 받고 있는 화정사의 옛 유물.
지의 대사는 화정봉에서 10년을 수행했다. 아름다운 풍경과 마음에 일어나는 번뇌의 싸움을 겪은 이 시기를 '천태의 은거'라고 말한다. 그가 고행을 하던 어느 날 새벽 어디선가 신승(神僧)이 문득 나타났다. 이 신승의 계시를 받고 지의 대사는 '화정개오'의 깨달음을 크게 얻으며 마침내 실상을 체달(體達) 했다고 전한다.
역대 고승을 적은 화정사의 비문에 지의 대사는 세 번째 순위로 적혀 있었다. 일찍 동진(東晋, 317~420) 시기부터 화정봉에는 벌써 고승이 기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상 화정봉의 수련 역사는 이보다 더 이르다. 동한(東漢, 25~220) 말년, 도인 갈현(葛玄)이 화정봉에서 수도를 했다. 갈현은 도교 유파의 4대 천사(天師)의 한 사람으로 존숭을 받는 인물이다.
불교가 전래되기 전부터 수행자들은 모두 깊은 산속에서 수련했다. 단군(檀君) 같은 고조선의 옛 성현들도 그러했다. 세속의 소란함을 떠나 한적한 산속에 머무르면 원력(原力)을 더 굳게 세우고 체달의 깨달음을 얻기 쉬웠던 것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화정봉의 도인과 승려는 차탁에서 함께 만난다. 차는 산속의 수행에 지친 몸을 닦고 수마(睡魔)와 피곤을 쫓을 수 있었다. 사실상 차를 심고 마시는 과정도 하나의 수행이었다. 초기의 수행자 갈현이 화정봉에 차를 심고 마셨고 훗날의 승려들이 화정봉에 차를 심고 마셨다. 화정산의 운무(雲霧) 속에서 만들어진 차는 나중에 천태산의 특산물이요, 전국의 명차로 거듭난다.
각설하고, 화정사의 비문에는 천태종을 전수 받은 반도의 승려가 나타난다. 고구려의 승려 반야(波若, 또는般若라고 적는다)이다. 반야는 범어(梵語) 'prai'를 음역한 한자를 다시 옮긴 우리말로 '지혜'를 뜻한다. 이 이름은 지의 대사의 수제자를 제치고 바로 지의 대사의 뒤에 적혀 있다.
역대 고승을 기리어 화정사 불전 앞에 세운 비석에 반야의 이름이 적혀있다.
반야가 언제 어디서 출가하였는지는 잘 알 수 없다. 《불조통기(佛祖統紀)》, 《속고승전(續高僧傳)》은 이에 대해 반야가 고구려인이며 속성이 상商씨라고 밝히고 있을 뿐이다. 이런 문헌의 기록에 따르면 반야는 남진(南陳, 557~589) 때 금릉(金陵, 지금의 남경)에 와서 지의 대사의 설법을 들었다. 반야는 지의 대사의 설법을 듣고 그 이치를 깊이 이해했다고 한다. 지의 대사가 금릉에서 《법화경(法華經)》을 강설한 때가 585년이니, 유추하면 반야의 이때의 나이는 20대 중반이었다. 그 후 반야는 대륙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계속 불법을 익히다가 596년 다시 지의 대사를 찾아간다. 지의 대사의 심오한 강설은 그의 가슴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 지의 대사는 천태산에서 머물며 교화를 펴고 있었다. 나중에 그는 선법을 전해주길 청하는 반야에게 천태산의 최정상인 화정봉에 올라가서 두타행(頭陀行)을 수련하도록 지시한다. 두타행은 출가 수행자가 세속의 모든 욕심이나 속성을 버리고 몸과 마음을 깨끗이 닦으면서 참기 어려운 고행을 참고 행하는 것을 말한다. 모름지기 지의 대사는 혹독한 두타행을 이겨낼 수 있는 반야의 뛰어난 근기를 읽은 것 같다. 또 그 자신이 바로 6,7년간 화정봉에서 홀로 두타행을 하면서 큰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 아닐지 한다.
드디어 반야는 석장 하나에 의지한 채 홀로 화정봉으로 향한다. 돌로 만든 계단의 좁은 길이 산기슭에서 화정봉으로 구불구불 가파르게 이어지고 있었다. 반야의 화정봉의 수행도 이 산길처럼 어려운 고행이었으리라. 그때부터 반야는 장장 16년 동안 산 밖의 세상에는 그림자도 얼씬하지 않았다.
현재로서는 반야가 깊은 산속에서 어떻게 홀로 살았는지, 또 수행의 경지가 어디까지 이르렀는지 알 길이 없다. 그가 산속에서 수행할 때 옷이나 음식은 어떻게 해결하였는지는 더구나 미스터리이다. 지의 대사는 25~30킬로미터 밖의 화정봉에 미리 옷이나 음식을 마련해두었지, 아니면 지의 대사의 경우처럼 신승(神僧)이 반야의 수행을 돕기 위해 화정봉에 화현(化現)을 했는지 궁금한 부분이다.
옛길 표시판의 '노객고로'라는 엉뚱한 우리글, 반야스님이 보았더라면 뭐라 하셨을까.
어찌어찌 해도 보석이라면 어디서든지 빛을 발하기 마련이다. 반야의 신이(神異)한 행적은 끝끝내 산밖에 그 정체를 드러낸다. 수(隋)나라 대업(大業) 9년(613) 2월, 반야는 홀연히 화정봉을 떠나 천태산 서남쪽의 불롱봉(佛隴峰)으로 내려왔다. 불롱은 산에 부처의 형상이 자주 보인다고 해서 불리는 이름이다. 불롱봉은 지의 대사가 이곳을 수행지로 정한 후 세운 사찰이 있었으며 황제로부터 수선사(修禪寺)라는 이름이 하사되었다.
옛 산길을 타고 걸어오는 반야는 더는 속세의 사람이 아닌 듯 했다. 반야의 뒤에는 하얀 옷을 사람 세 명이 옷과 발우(拔羽)을 받쳐 들고 뒤따르고 있었다고 한다. 절 앞에 이르자 이 세 명은 곧바로 오간데 없이 사라졌다.
《속고승전》은 이 기록 뒤에 산 밖에서 보인 신령함이 이러할진대 "산속의 신통과 이적(異迹)은 상고(相考)하기 어렵다"고 진술하고 있다.
반야는 수선사를 지나 산기슭의 국청사에 도착했다, 지의가 입적한 이듬해 수양제(隋煬帝)가 국청사(國淸寺)를 창건하여 천태산의 중심지로 삼고 수선사는 그 도장으로 되고 있었다. 국청사는 원래 산 이름을 따서 '천대사'라고 했다가 "절이 서면 나라가 맑아진다"는 글귀를 빌어 개명한 이름이다.
국청사에는 지의 대사의 수제자인 지월(智越)이 주지를 맡고 있는 등 지인들이 아직도 일부 있었다. 반야는 옛 승려들을 불러 만나 깜짝 놀라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절이 서면 나라가 맑아진다고 하는 국청사.
"나는 속세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네. 여러 스님들과 이별을 하고자 이렇게 산을 내려왔네."
며칠 후 반야는 52세의 나이로 입적하였으며 화정봉에 매장되었다. 반야의 장례식 날 승려나 신자는 물론 현지의 관리와 백성들이 구름처럼 모여왔다고 한다. 산중에서 16년 동안 오로지 수행에 전념했고 또 수선사에서 신이함을 보인 승려라는 소문은 벌써 동네방네 전해졌던 것이다.
반야는 고려 후기에 승려 일연(一然)이 지은 5권 3책의 사서 《삼국유사》에도 짤막한 기록으로 전하고 있다.
"고구려의 승려 반야는 중국 천태산에 들어가 지자(智者, 지의 대사를 이르는 말)의 교관(敎觀)을 받았다. 신이(神異)한 사람으로 산중에 알려졌다가 죽었다. 〈당승전(唐僧傳)〉에도 또한 실려 있는데 자못 영험한 가르침이 많다."
화정사의 비문은 바로 《삼국유사》의 이 이야기를 반증하고 있는 셈이다. 반야는 1천 4백 년 전 처음 천태종의 교학과 행법이 체계를 이뤘을 때 개산조인 지의 대사의 문하에서 직접 천태 교관을 전수 받은 반도의 첫 스님이었다. 그러나 반야는 국청사에서 적멸(寂滅)하면서 종당에는 천태종을 고구려에 전래하지 못했다.
천태종이 반도에 배를 타고 건너간 것은 그로부터 약 5백년이 지난 후였다. 고려의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 천태 교단의 중심지 국청사를 찾아오는 것이다. 의천은 국청사에서 수도한 2년 후 반도에 돌아가 천태종을 창시했다.
그때 의천은 송나라 상선을 타고 밀주(密州)에 상륙한 후 해주(海州), 명주(明州)를 경유하는 등 옛 실크로드를 따른 구법 노선도를 세상에 남기고 있다.
"'백마'가 아니라 '배'를 타고 온 왕자이네요." 저도 몰래 수긍하게 되는 소설 같은 이야기이다.
실제로 의천은 거짓 없는 왕자로, 고려 11대 문종文宗의 넷째 아들이다. 그런데 고려의 이 왕자는 왜서 '백마'가 아닌 배를 타고 왔을까? 천태산에는 이로써 《삼국유사》가 아닌 또 하나의 이야기가 화려하게 등장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