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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룡(金龍)의 가사를 입은 산중의 승려[제6편]
//hljxinwen.dbw.cn  2016-01-06 11:35:00

  베이징 김호림 특별기고

  (흑룡강신문=하얼빈) 1,300년 전에 생긴 일이다. 복건성(福建省) 녕덕(寧德) 북쪽의 곽동산(霍童山)에 신라의 승려가 찾아왔다. 그의 법명은 원표(元表)였다. 원표는 훗날 반도에 선종(禪宗)이 처음으로 들어가서 자리를 한 연기(緣起) 설화로 유명한 승려이다. 《송․고승전(宋․高僧傳)》의 기록에 따르면 원표는 천보(天寶, 742~756) 연간 당(唐)나라에 왔다가 인도에 가서 성인의 유적을 예배했다. 이어 그는 곽동산의 석굴에 와서 화엄경을 독송하며 그 진수를 깨쳤다고 한다.


지제산 입구

  그때 원표는 《화엄경(華嚴經)》의 보살주처품(菩薩住處品)을 보고 곽동산을 찾았다고 한다. 《화엄경》은 부처의 깨달음의 경지에서 보이는 우주를 묘사, "진리의 연꽃의 경전"이라는 의미의《법화경(法華經)》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대승경전이다. 이 《화엄경》에 일렀으니, "동남방에 지제산(支提山)이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옛적부터 여러 보살의 무리가 그곳에서 머물고 있었다. 지금도 천관(天冠) 보살이 머물고 있으며 그의 권속의 1천 보살의 무리와 늘 있으면서 설법을 강연하고 있다…"

  여기에서 이야기는 잠깐 다른 가닥으로 이어진다. 지제(支提)는 토석이 쌓인 무더기라는 의미로 부처의 복덕이 쌓여 이뤄진 것을 이르는 말이다. 사리가 있는 것은 탑파(塔婆), 사리가 없는 것은 지제라고 부른다. 실제로 인도의 남부에 지제산이 있는데, 산에 10여 채의 폐탑(廢塔)이 있다고 해서 불리는 이름이라고 전한다.


나라암 사찰 입구에 세운 신라국 승려 원표 기념비.

  곽동산은 아흔 아홉 봉우리가 높이 솟아있고 청(淸)나라 때까지 산기슭에서 바닷물이 철썩이고 있었는데, 그 모양새가 말 그대로 연화장(蓮花藏)세계의 축소판이었다. 연화장세계는 《화엄경》에 나오는 말로, 연꽃 중에 있는 무량한 공덕과 광대하고 장엄한 불국(佛國)이다. 《화엄경소(華嚴經疏)》(권47)가 지제산은 중국 남부 즉 곽동산에 있어야 마땅하다고 지적할 법 한다.

  곽동산의 자락에서 원표가 수련하던 석굴까지 30㎞나 떨어져 있었다. 구불구불한 산길에 내리는 한여름의 보슬비가 차창 앞에 일부러 그 무슨 장막을 드리우고 있는 것 같았다. 멀고 가까운 산봉우리는 모두 하얀 운무 속에 형체를 감추고 있었다.

  아스란 벼랑이 보이는 산기슭에서 차를 세웠다. 돌층계가 산허리를 감돌면서 벼랑 쪽으로 구렁이처럼 기어가고 있었다. 오솔길은 마치 숨바꼭질을 하듯 수림 속에 꽁꽁 숨었다가는 장난을 하듯 불쑥 나타나군 했다. 어디선가 경문을 읽는 소리가 은은히 들리더니 오솔길의 끝머리에 웬 건물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산중턱의 후미진 석굴 속에 잠룡(潛龍)처럼 몸을 숨기듯 서있는 고찰이었다.

  정말이지 시냇물이 돌돌 흐르는 골짜기에 세외도원의 그림이 그려지고 있는 듯 했다.

  산속까지 동행한 택시 기사는 뭐가 놀라운지 연신 감탄을 하고 있었다. "옛날에 스님들은 이토록 깊은 산속에 석굴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고 들어왔을까요?"

  기실 원표가 심왕(心王) 보살의 인도를 받아 이 고장으로 올 때 곽동산은 벌써 동천(洞天)으로 산지사방에 소문을 놓고 있었다. 동천은 도교 용어로 신선의 거주하는 곳을 이르던 말이다. 그 의미인즉 굴속에 별유의 천지가 있다는 것. 도사는 이곳에서 살면서 신선의 도를 닦는다.

  곽동산에는 일찍 3천 년 전부터 도교의 진인(眞人)이 나타난다. 《복건통사(福建通史)》의 기록에 의하면 "곽동은 주나라 때의 사람이며 곽림동천(霍林洞天)에 거주했다." 곽동산은 이로 하여 지은 이름이다. 당나라 때의 유명한 도사 사마승정(司馬承禎)이 곽동산에서 수련하면서 '천지궁부도(天地宮府圖)'를 서술, 천하의 '서른여섯의 동천'을 열거하는데 곽동산이 단연 첫 자리를 차지하였다.

  어쩌면 도사 곽동이 수련할 때 거주하던 곳이 바로 이 석굴일지도 모른다. 석굴이 위치한 바위는 마치 입을 크게 벌린 사자의 머리 같은 형국으로서 적어도 수백 명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널찍했다. 산중에서 비바람을 피하며 수행을 하는 도장으로는 뛰어난 '별유의 천지'였다.

  아무튼 석굴은 더는 도교의 동천이 아니라 불교 용어의 이름인 나라암굴(那羅岩窟)로 불리고 있었다. 나라암(那羅岩)은 범어 'narayana'에서 온 것으로 우주 생명의 근본 주체라는 의미이다.

  석굴에 들어선 고찰은 목조 구조로서 위에 기와가 없는 게 특색이었다. 안쪽의 법전에서 승려가 경문을 독송하고 있었고, 바깥쪽의 공양간에서는 남녀 신도 몇이서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산기슭 어느 동네의 한 귀퉁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생활상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듯 했다.

  《송․고승전》이 서술하고 있는 석굴은 원체 이런 태평한 모양이 아니었다. 원표가 석굴에서 수련할 때 산에는 맹수와 독벌레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원표는 계곡의 물을 마시고 나무의 열매를 따서 먹으면서 별고 없이 산에서 지냈던 것이다.


산굽이에 있는 화엄 현문.

  원표는 석굴에서 그가 인도에서 짊어지고 온 80권의 《화엄경》을 숙습(熟習)했다. 이때 석굴에는 또 부근 보복사(保福寺)의 승려 목정(木淨)도 있었다. 《화엄경》은 훗날 목궤에 넣어져 석실에 깊이 보관된다. 이 때문에 《화엄경》은 당나라 회창(會昌, 841~846) 연간 불교경전을 수색, 불사르던 법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선종(宣宗, 841~859)이 계위한 후 칙서를 내려 불법을 회복하게 되자 일찍부터 옛 일을 들어서 알고 있던 보복사의 혜평(慧評) 선사가 승려들을 인솔하여 석실의 《화엄경》을 모셔 내왔다. 《화엄경》은 나중에 민부(閩府)인 복주(福州)의 사찰에 안치된다. 이때 어언 10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경본(經本)의 종이와 먹의 색깔은 여전히 새것과 다름이 없었다고 전한다.

  5대(五代, 907~960) 때 항주杭州영은사(靈隱寺)의 요오(了悟) 선사가 복건에 와서 천관보살 도장을 세운다. 송(宋)나라 개보(開寶) 4년(917), 오월왕(吳越王)은 '화엄사'의 편액을 하사하며 요오 선사를 국사로 봉했다. 화엄사는 또 '연화장세계', 일명 화장(華藏)세계의 이름을 따서 '화장사(華藏寺)' 혹은 지제산의 이름을 따서 '지제사(支提寺)'라고도 불린다.


지제산 사찰지에 글을 남기고 있는 승려.

  세간에서 전하고 있는 "원표의 개산(開山), 요오의 건사(建寺)"라는 이야기의 전말이다.

  그러나 산이든 사찰이든 나중에 세간에 이름을 날리게 된 것은 승려 원표나 요오가 아니라 승복을 입은 황제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지제산에 원표가 나타난 6백년 후에 비로소 생긴 일이다. 명(明)나라 개국황제 주원장(朱元璋)이 붕어한 후 황태자 주표(朱標)가 그에 앞서 죽었기 때문에 황태손 주윤문(朱允炆)이 즉위한다. 그가 바로 건문제(建文帝)이다. 얼마 후 연왕(燕王) 주체(朱棣)가 제위를 탈취하기 위해 북평(北平)에서 출병한다. 1402년 주체의 군사가 도읍 남경(南京)을 공략하였다. 연왕은 바로 즉위하는데, 그가 바로 성조(成祖)이다. 이때 황궁은 큰불이 일어나며 건문제는 행방불명이 되었다. 건문제가 삭발하고 승려로 분장하여 도망했다는 소문은 이때부터 생겼다. 또 주원장이 미리 황태손에서 닥칠 난을 예견하고 그를 위해 도첩(度牒)과 승복 등을 함에 따로 비치해 두었다는 설이 뒤따르고 있다.

  실제로 주체는 즉위한 후 령을 내려 건문제를 찾았다.《명사(明史)》, 《호영전(胡濙傳)》의 기록에 따르면 성조는 건문제의 죽음에 의심을 가지며 태감 정화(鄭和)를 파견하여 서양에 가서 건문제의 종적을 추적하며 중신(重臣) 호영을 파견하여 군과, 향, 읍에서 장장 16년 동안 건문제의 행방을 수소문하게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풀지 못한 미스터리로 남았으며 여러 문헌에는 "건문제의 행방을 모른다."고 주석하여 밝히고 있다.


현지에서 건문제 능이라고 전하고 있는 고분.

  와중에 건문제가 가사를 입고 녕덕 일대에 은닉했다는 설이 있었다. 그런데 지제사의 유물에서 명나라 때의 금룡의 가사가 발견되는 것이다.

  지제사는 산길에서 탑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이 화엄의 불국세계는 어느 계곡의 동천에 깊숙이 숨어 있는 듯 했다. 뒷이야기이지만, 지제사의 스님은 지제산의 아흔아홉 봉우리가 아흔아홉 떨기의 연화 모양이라면 사찰은 바로 아흔아홉 연꽃의 중심에 위치하기 때문에 연꽃의 화심(花心)에 이르지 않으면 고찰을 볼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산굽이를 몇 개 돌았는지 갑자기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사찰 밖의 마당에는 버스와 승용차가 빼곡했는데 저마다 빈자리를 찾느라 뱅뱅 돌아치고 있었다. 그제 날 역마가 무리로 들이닥쳤으면 이러했을까… 심산 속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풍경이었다. 지제사의 문물전(文物殿)에는 더구나 많은 인파가 북적이고 있었다.

  일부러 찾은 가사(袈裟)의 진열대에서 여행팀 가이드의 목소리가 연기처럼 날려 온다. "건문제가 황궁에서 도망할 때 입던 승복은 이 가사라고 하는데요…"

  사람들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가사는 위에 있는 금룡 때문에 범접하기 어려운 기품을 풍기고 있는 듯 했다. 들어보니 금룡은 아홉 올의 궁정 전문용 금실로 엮였다고 한다. 또 금룡의 발이 다섯이니 가사는 바로 구오지존(九五之尊)의 황제를 뜻한다고 할 수 있었다.

  건문제의 행방을 둘러싼 천년 미스터리는 마침내 산속의 이 고찰에서 속살을 드러내고 있는 듯 했다.

  결코 견강부회가 아니었다. 지제산에서 남쪽으로 약 10㎞ 상거한 필통산(筆筒山)에는 또 연호(年號)가 없는 승려의 무덤이 나타나 건문제의 녕덕 도피 설에 무게를 더해주고 있었다. 제위를 잃은 건문제로서는 그의 연호를 쓸 수 없었고, 그렇다고 제위를 찬탈한 성조의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승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무덤은 또 입을 다문 용 즉 폐취룡(閉嘴龍)의 조각물을 사용했는데, 명나라의 전반기에는 황제를 제외하고 누구도 사용이 불가한 장식물이라고 한다.

  물론 반론도 만만치 않다. 우선 금룡의 가사는 만력(萬曆, 1573~1620) 연간 황실에서 승려 대천(大遷)에게 하사한 성물(聖物)이라고 한다. 대천은 왜구(倭寇)에 의해 16세기 초 소각되었던 지제사를 중흥한 인물이다. 이 승려 대천이 건문제라면 2백 살의 신선 같은 인물이 되어야 한다. 필통산의 고분 역시 명나라 초 고승의 무덤이 맞지만, 실존한 다른 선사(禪師)의 무덤이라고 한다.

  그때 그 시절 원표 역시 건문제처럼 이변을 만나서 지제산을 떠났는지는 알 수 없다. 그가 왜서 인도에서 그토록 어렵게 갖고 온 《화엄경》 경본을 석굴에 두고 갔는지는 더구나 해독하기 어려운 미스터리로 되고 있다. 속설에 따르면 원표가 지제산의 석굴에서 수행하고 있을 때 홀연히 서기(瑞氣)가 뻗쳤으며, 원표는 그 빛을 따라 반도에 가서 보니 전라남도 장흥군의 가지산(迦智山)이 지제산을 빼닮고 있어서 보림사(寶林寺)를 세웠다고 한다. 보림사는 신라의 선문구산(禪門九山)에서 제일 먼저 개산(開山)한 가지산파(迦智山派)의 중심사찰이다.


보일듯말듯한 산길 그리고 그 길을 걷고 있는 승려.

  실제 장흥의 지제지(支提志)는 가지산 모양이 탑과 같아 지제라고 했다고 전한다.

  가지산에는 또 사계동천(四戒洞天), 영은동천(靈隱洞天), 청학동천(靑鶴洞天), 옥계동천(玉溪洞天), 연화동천(蓮花洞天) 단번동천(幢幡洞天) 등 지명이 있어서 도교 명승지이기도 한 대륙의 지제산과 별다른 인연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고 보면 화엄사상의 주처(住處)인 지제산은 원표를 따라 배를 타고 인도에서 대륙 연해로, 다시 바다를 건너 반도에 건너갔던 것이다. 서토(西土)와 중국 대륙, 반도를 하나로 잇던 옛 바닷길이 그 참모습을 은연히 드러내는 대목이다.

  이윽고 산을 내리는데 구름이 바람에 날려 와서 봉우리마다 하얀 연꽃을 피우고 있었다. 정말이지 산이나 나무, 인간은 물론이요, 과거와 오늘이 한데 어우러져 꿈같은 혼돈의 세계를 만들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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