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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고찰의 뒷골목에서 살던 고려인들 [제4편]
//hljxinwen.dbw.cn  2015-12-09 11:42:00

  베이징 김호림 특별기고

  (흑룡강신문=하얼빈) 천주(泉州)는 옛날 엄나무라는 의미의 '자동(刺桐)'으로 더 잘 알려진 고장이다. 엄나무 '자동'은 원산지가 인도와 말레이시아로, 당나라 때부터 복건성(福建省) 천주에 옮겨져 번식되었다. 이 '자동'을 10세기의 5대10국(五代十國)부터 골목마다 심었다고 해서 천주는 일명 '자동성(刺桐城)'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옛 이름에서 드러나듯 천주는 일찍부터 인도양 등 서토의 해안을 연결한 대륙 동남연해의 중심 항구로 되고 있었다.


중화로 부근의 옛 고려항, 약 100미터 길이의 작은 골목이다.

  그런데 반도의 신라인이 천주의 절도사로 있었다니 여간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삼국사기(三國史記)•신라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가 후당(後唐)에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하는데, '천주 절도사'라고 하는 왕봉규(王逢規, 생몰일 미상)도 후당에 사람을 보내 방물(方物)을 바쳤다는 것이다.

  절도사는 당나라 때부터 생긴 군정장관의 관직 이름이다. 실제로 '자동'이라는 이 식물을 심도록 명령을 내린 인물이 바로 유종효(留從效)라고 하는 천주 절도사였다.

  당나라 때 외국출신의 사람이 절도사로 있은 사례는 적지 않다. 와중에 안서(安西) 절도사가 고구려 후예인 고선지(高仙芝)였고 또 삭방(朔方) 절도사 역시 고구려 출신의 이회광(李懷光)이었다. 그러한즉 천주의 절도사가 신라인이지 말라는 법은 없다. 더구나 당나라에는 신라인이 자치적으로 관리하던 신라소(新羅所)까지 있지 않았던가.

  그러나 천주의 절도사가 신라인이라는 기록은 중국 문헌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이 직함은 실은 해상 호족 왕봉규가 자칭한 '명예직'으로, 그가 천주를 통해 후당과 자주 왕래한 까닭이 아닐지 한다.

  아무튼 당나라 때 천주에는 외국의 이런 사절을 접대하는 역참이 없었던 것 같다. 관부가 천주에 역참을 설치하고 전문 외국 사절을 접대한 기록은 당나라 후의 북송(北宋) 말에 비로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때 일부 외국인들은 천주의 남부 일대에 집거하여 '번인(蕃人)' 골목을 이루고 있었다. '번인'은 옛날 중국인들이 이국 사람이나 이족(異族)을 이르던 말이다. 번인들이 살던 이 골목은 거개 사람들의 단체기억에서 사라지고 문헌상의 기록으로만 남아있다.


고려항 골목의 잡화점 그리고 고려항의 토박이 황씨 노인.

  고려인들이 살던 동네 '고려항(高麗巷)'은 명청때부터 '규하항(奎霞巷)'으로 지명이 바뀌어 있다. 규하항은 천주의 서쪽에 위치하는데, 별자리(星宿)의 규성(奎星) 방위에 대응하며 아침이면 햇볕이 골목 구석까지 비춘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규성은 문장을 관할하는 별이다. 실제로 이 때문에 옛날 장서각(藏書閣)에 규성의 이름을 넣는 경우가 많았다. 역대 임금의 글을 모아 보관한 서울 종정사(宗正寺)에 규장각이라는 현판을 달게 된 데는 그런 의미가 깃들어 있다.

  그러나 규하항은 주택가로 되어 있었으며 장서각이라곤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번화가의 중화로(中華路)에 붙어있는 이 골목은 낡은 주택들이 올망졸망 늘어서 있었다.

  "여기가 '고려항(高麗巷)'이 맞아요." 골목 어귀에서 기름떡을 팔던 방(方)씨 성의 아줌마는 그게 뭐가 대수이냐 하는 기색이었다.


인파가 붐비는 천주 개원사의 앞골목, 조금 더 나아가면 고려항이 있다.

  방씨의 떡 난전은 골목 어귀에 안내소처럼 버티고 서서 기름 냄새를 물씬물씬 풍기고 있었다. 어쩌면 안쪽의 한산한 골목에서 오래 묵은 책의 냄새를 맡을 것 같았다. 방씨는 그녀가 이 골목에 시집을 온 외지인이라고 하면서 일행의 묻는 말에 머리를 흔들었다.

  "저는 잘 몰라요. 저 할아버지랑 물어보세요. 이 골목의 토박이거든요."

  방씨가 턱짓으로 가리키는 저쪽 가게의 문어귀에 웬 노인이 앉아 있었다. 알고 보니 노인은 황(黃)씨 성으로 가게의 주인이었다. 그는 한여름의 더위 때문에 아예 윗동아리를 활 벗어버리고 있었다.

  "고려항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네. 이 이름을 부르면 우리 골목에서 살던 사람이지."

  노인은 아직도 규하항보다 고려항이라는 이름이 입에 더 잘 오른다고 말했다. 고려인들이 한데 몰려 살던 이 골목은 현지인들에게 천년이라는 시공간을 뛰어넘어 생생한 지명으로 남고 있는 것이다.

  문득 골목에서 상투 차림의 누군가 문을 떼고 나와서 수다를 떨고 또 물고기를 요리하는 비린내를 풍길 것 같은 각이 들었다.

  잠깐, 골목을 일컫는 거리 항(巷)은 중국말 독음(讀音)으로 응당 '샹'이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노인은 분명히 우리처럼 '항'이라고 발음하고 있었다. 또 노인은 물론 아줌마도 모두 황씨 성과 방씨 성을 거의 같은 독음으로 말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중국말에 익숙하지 않은 연변 조선족 노인들의 발음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솔직히 '규하항'이 실은 '고려항'의 민남어(閩南語)의 독음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떠오르는 대목이었다. 민남어는 천주에서 기원한 복건성 지역의 방언이다. 실제로 반도에서 천주에 전래되었다고 하는 '고려채' 역시 민남어의 독음과 무관하지 않다고 하는 설법이 있다.

  양배추는 원산지가 지중해 연안이다. 이 양배추가 먼저 반도에 전래되었으며 고려 때 다시 해로를 통해 천주 일대로 들어왔다고 전한다. 그래서 '고려채'라고 불린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현지인들이 시초에 그 모양에 따라 겹겹이 둘러싼 박이라는 의미의 '과라(裹蓏)'라고 이름을 지었으며, 이 '과라'의 민남어 독음이 '고려'이기 때문에 '고려채'는 곧바로 '과라채'의 변음이라고 주장한다.

  어쨌거나 '고려채'라는 이름이 만들어진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천주에는 반도에서 도래渡來한 고려인들은 여러 군체(群體)로 나타나고 있다. 서쪽의 영춘현(永春縣)에는 또 고려산(高麗山)과 고려촌(高麗村), 고려무덤이라는 옛 이름이 있다. 영춘현의 임(林)씨 족보의 기록에 따르면 임씨 선조는 고려인으로, 남송(南宋) 시기 난을 피해 천주에서 천입했다고 한다. 임씨의 고려인 선조도 기실 고려인의 동네인 '고려항'에서 살았을 수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임씨의 선조처럼 바다를 건너온 '고려채'의 첫 상륙지 역시 이 고려항이 아닐지 한다.


천주 개원사.

  천리 너머 이역이었지만 그래도 행복할 수 있었다. 고려인들에게는 식탁에서 향수를 달랠 '고려채'가 있었고 또 지치고 힘든 마음을 기댈 안락처가 있었다. 고려항에서 도보로 3분가량 상거한 북쪽에는 고찰 개원사(開元寺)가 자리한다. 사찰 뒷골목의 고려항의 위치가 이때 따라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천주 개원사는 당나라 수공(垂拱) 2년(686)에 지은 사찰로, 해내외에 이름이 있는 명찰이었다. 명승이 많이 배출되었고 또 탑과 석벽 등 유명한 경물이 있었다. 남송 시기의 대학자 주희(朱熹)는 특별히 개원사에 연구(聯句)의 시를 쓰고 이 사찰을 옛날에는 불국(佛國)이라고 불렀으며 거리에 성인(聖人)으로 넘친다고 했다.


도심에 있는 복주 개원사, 뒤로 아파트가 보인다.

  개원사의 앞 골목은 저녁 무렵인데도 말 그대로 인파가 흥성흥성하고 있었다. 현재 복건성에서 제일 큰 사찰이라더니 명불허전이었다. 물론 인파의 주역은 더는 성인이 아니라 가게와 좌판을 차린 장사꾼들 그리고 유람객이나 신도들이었다. 이에 비해 사찰에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사찰의 객당(客堂)에도 스님이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이튿날 다시 찾기로 작심하고 돌아서다가 마침 스님 한분을 만났다. 도신(道新)이라는 법명의 이 스님은 개원사에 입적한 지 3년 된다고 했다.

  "한국 스님이 드문드문 찾아옵니다만, 다른 사찰에 갔다가 들리는 경우이지요."

  도신 스님은 옛날 반도의 승려가 개원사를 찾아왔다면 천주의 개원사가 아닌 것 같다고 말한다. 옛날부터 천주 개원사에도 일부 외국 승려가 다녀갔지만, 정작 이런 일로 소문난 곳은 복주(福州)의 개원사라는 것이다.

  복주는 복건성의 소재지로 천주에서 북쪽으로 약 200㎞ 상거한다. 해상 실크로드의 지속시간이 제일 오랜 시발점 항구의 하나라고 전한다. 외국 승려가 빈번하게 복주를 드나들었기 때문에 중당(中唐) 이후 복주 개원사는 정부가 복건 지역에 오는 여러 나라 승려를 접대하는 곳으로 되었다.

  그러고 보면 삼국의 승려가 복건에 왔다면 천주가 아닌 복주의 개원사에 행장을 풀었을 법 한다.

  기왕 말이 났으니 망정이지 동명의 개원사는 대륙의 동서남북 여러 지역에 현존한다. 현종(玄宗)이 개원(開元) 26년(738) 조서를 내려 전국 각 주와 군에 일련의 사원을 짓고 보수하는데, 이런 사원은 모두 당시의 연호 '개원'을 사원의 명칭으로 삼았다. 지금까지 현존하는 개원사는 모두 대륙 불교계의 유명한 사원으로 되고 있다.

  복주의 개원사는 현존하는 제일 오랜 사원으로 일찍 황실의 사원이고 종묘였다고 한다.


복주 개원사의 천년 철불상은 10만근 이상의 철로 주조한 것으로 해내외에 이름이 있다.

  사찰은 복주의 도심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고층 아파트에 둘린 사찰은 별다른 운치를 자아내고 있었다. 산문부터 벌써 청아한 독경 소리가 날려 왔다. 이날 객당에 앉아있는 스님은 사찰의 감원(監院)으로 있는 영원(靈願) 법사였다. 사찰 역사를 숙지하고 있을 법한 그는 옛날 개원사에 인도와 일본 고승이 있었지만 신라 승려의 이름은 들은 적 없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실제상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928년 묵화상(默和尙)이 당나라에 가서 대장경을 싣고 왔다는 짧은 기록밖에 없다. 이 묵화상은 《고려사(高麗史)》에 나오는 같은 시대, 같은 사건의 주인공인 승려 홍경(洪慶)과 동일 인물로 보는 게 통설이다. 《고려사》는 태조 11년(928) 홍경이 후당(後唐)으로부터 대장경(大藏經) 1부를 얻어 배에 싣고 예성강(禮成江) 하구에 이르자 태조 왕건(王建)이 직접 마중을 나와 환영하였다고 전한다. 대장경은 경, 율, 논 삼장이나 여러 고승의 저서 등을 모은 총서를 말한다.

  《고려사》가 밝힌 홍경의 출발지는 민부(閩府)이며, 이에 따르면 홍경은 복주 개원사에 들렸을 수 있다. 민부는 복건의 소재지로 복주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곳집 부(府)는 원래 정부의 창고 또는 역소(役所)의 의미이며 당나라 때부터 지방 행정구획의 명칭으로 되었다.

  한 번 더 짚어서 홍경 역시 다른 외국 승려처럼 개원사에서 수학했을 개연성이 크다. 개원사는 승려들의 체류지 뿐만 아니라 참학(參學)의 유명한 도장으로 되고 있었다. 일본 천태종 5대조로 된 고승 엔친(圓珍)도 개원사에서 6년 동안 수학했다고 한다. 그때 복주 개원사의 명성을 듣고 찾아와서 수학한 일본 승려는 아주 많았다. 홍경은 생몰일 미상의 승려로 사찰의 옛 기억에는 무명의 승려로 되고 있는 게 아닐지 한다.

  아무튼 개원사는 반도의 삼국과 불연(佛緣)을 떨어뜨리지 못하고 있었다. 대륙 남부의 광동성(廣東省) 조주(潮州)의 동명의 고찰 개원사에는 삼국 승려의 족적이 남아 있다. 사찰 대전의 천년 향로에는 "선당(禪堂)의 향로를 영원히 공봉 하는 삼한(三韓) 제자 임국조(任國祚)"라는 한자가 새겨져 있다. 임국조는 당나라 때 조주 개원사에서 수학하던 신라 승려라고 전한다.

  그 무렵 복건성 지역에는 상인들의 발길도 적지 않게 닿고 있는 듯하다. 현지에서 옛날 '신라갈(新羅葛)'이라고 불렸던 참외는 신라에서 전래된 것으로 전한다. 식물 이름인 신라삼(新羅參)이나 신라송(新羅松)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러고 보면 바다 건너 해가 솟아오르는 반도는 '해상 실크로드'의 하나의 축으로 되고 있었던 것이다.

  훗날 고려인들이 이역의 천주에 나타나고 또 천주에 '고려채'라는 야채 이름이 생긴 이유를 비로소 알 것 같다.

  사찰을 나서는데 골목 어귀의 채소시장에서 흘러나오는 사구려 소리가 목탁소리처럼 귀맛 좋게 달려온다. 시장에 들어서면 금세 "오이소! 보이소! 사이소!" 하는 소리가 반겨 맞아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가게의 좌판에는 알아듣기 힘든 현지 사투리가 생선의 비릿한 냄새처럼 흩날리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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