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정말 소주 마시러 갈가?”
“그러자는거야, 여기 누가 소주 마시러 갈 사람 또 없어요?”
구금자가 술상에서 일어나며 소리친다. 그런데 독한 소주마시러 귀빈식당으로 간다하니 다들 도리머리를 젓고 있다. 신선한 바깥이 훨씬 좋은데 공기가 탐탁한 식당안으로 왜 가냐 하는 눈길들이다. 하긴 소주군들인 비아바이와 김성만이가 있었더라면 두말없이 따라나섰겠지만 그들 둘은 시내에 나가 다른 재미를 보느라고 이 자리에 없었다.
구금자와 대머리가 호텔 귀빈식당에 들어서니 저녁에 먹다 남은 음식상은 수절하나 다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개장국에 소주로 1차가 끝나 동창들이 우르르 우등불놀이를 떠날 때 이제 밖에서 놀다가 또 와서 먹을수 있으니 음식상은 다치지 말라고 구금자가 특별히 식당복무원들에게 부탁해 놓았던것이다.
구금자와 대머리가 귀빈식당에 들어서자 휴식실에서 밤늦도록 특별히 대기하고 있던 복무원들이 달려나왔다.
“사모님 오셨네요. 가마에 있는 개장국을 다시 덥히고 새로 술안주 몇접시 만들어 올릴가요?”
“그래주면 고맙겠어요. 밤도 깊었는데 그것만 해주고는 모두들 돌아가 쉬세요.”
“예! 고맙습니다.”
복무원들은 구금자가 북방사범대학 부총장의 부인인줄 알고 저마다 깍듯이 인사를 올리며 열성을 보였다. 그들은 지저분하던 저녁 음식상을 말끔히 거두고 새로 음식들을 올려왔다.
구금자와 대머리는 둘이 마주앉아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술이 몇잔 목으로 넘어가자 구금자는 눈이 풀리고 머리가 흐리멍텅해 지는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하려 해도 혀가 잘 돌아가지 않고 채소를 집는다는것이 저가락이 자꾸만 빗나갔다.
“야, 수길아 세월이 정말 꿈만 같지?...”
“그럼, 그냥 꿈이였으면 좋겠다.”
“그말 참 좋다! ‘그냥 꿈이였으면 좋겠다’ 히- 술이란 물건이 좋긴 좋구나. 너네 남자들은 이 멋에 술을 마시는거겠지?”
“그래, 개떡 같이 헛짚은 인생이 가끔은 귀찮아 질땐 이 술이란 물건이 제일 좋은 약이야.”
“호호, 개떡 같이 헛짚은 인생? 넌 소설가니까 말을 해도 아주 형상적이구나.”
둘은 정신없이 술을 그냥 입에다 퍼 넣는다.
“수길아, 이 식당은 우리 두 사람만 앉아 술을 마시기엔 너무 커서 휑 하지 않니?”
“좀 그렇기는 하다.”
“그럼 더 아담한 곳에 가서 마실가?”
“그런 곳이 또 어데 있냐?...”
“히- 넌 그런델 모르지?”
“우리가 투숙하는 3층 호텔에?...”
“아니야, 여기 1층에도 조용하고 아담한 방 하나 있어!”
“그래? 하하... 그거 재미 좋다. 그럼 이 식당에서는 3차를 끝냈구 이번엔 4차로 움직이는거네.”
“내가 술병만 들고 먼저 가 있을테니 넌 조금 있다가 여기 안주를 들고 1층 복도에서 제일 동쪽까지 가서 북쪽으로 문이 있는 방으로 들어오너라. 알았지?”
취기가 오른 구금자는 세상이 녹두알만해 지는것 같았다. 그녀는 몸을 비칠거리며 술병을 들고 귀빈식당에서 나갔다
호텔 1층 제일 동쪽에 있는 그 방 하나는 어제부터 동창들의 후근일을 책임지는 교육심리학원 반공실 왕주임이 쓰는 방이였는데 구금자는 젊은 사람을 관심해서 밤에는 시중들 일도 별로 없으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던것이다. 그래서 어제 저녁에도 그랬고 오늘 저녁에도 왕주임은 시내에 있는 자기 집으로 가면서 방 열쇠를 구금자에게 주었던것이다.
대머리는 구금자가 나간 뒤 혼자 앉아 담배 한대 피우고는 상에 있는 안주며 수절까지 한아름 안고 구금자가 알려주던 방으로 쫓아갔다.
두 사람의 그림자
“야, 키다리 둘이 걷는 모습 볼만하네.”
“원래는 저래 둘이 짝을 무었더라면 더 볼만했겠다. ”
“저 좀 보렴, 사람이 크니까 그림자도 저렇게 길구나!”
불빛이 환한 수영장쪽으로 걸어가는 백일호와 최윤희를 바라보며 동창들이 떠든다. 두 사람의 몸체가 가로수의 광선을 가리우며 뒤에다 긴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다. 마치도 두 손으로 엿가락을 쥐여 늘구듯 두 사람의 그림자는 길게, 길게 늘어나고 있다.
밤이라 조용한 수영장의 언제우엔 주인 없어 졸고있는 참대의자들이 줄지어 있었다. 백일호가 그중의 의자 하나를 골라 앉자 최윤희는 빈 의자를 두개 지나 간격을 띄우며 앉는다. 대학시절 벌리현의 깊은 산속에서 단 둘이 이런 자리가 있어보고는 26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백일호와 최윤희는 거울같이 맑은 수영장의 수면우에 초롱초롱 내려앉아 알롱달롱 재롱부리는 별무리를 얼마간 말없이 내려다 보고 있었다.
“윤희!”
“예?”
“우리 대학에서 석사공부를 하는 박화란 처녀애를 알고 있지?”
“예, 알고 말고요. 저의 사촌오빠네 딸애인데요.”
최윤희는 이쯤은 벌써 짐작을 하고 방금 걸어오면서도 할말을 준비하고 있었던 터여서 백일호의 입에서 말이 나오기 바쁘게 얼른 받아넘긴다. 그도 그럴것이 낮에 태양도 유람을 할 때 강현수가 백일호한테서 박일화와 쌍둥이처럼 같게 생긴 박화의 사진을 보았다고 했을 때부터 머리를 때리는 무서운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 그 애의 능력으로 보아선 이번에 국가에서 공비로 독일에 파견하는 박사류학생 명액안에 당당히 들 앤데 그렇게 되지 못해 나도 가슴 아프오.”
“호- 그게 어디 반장 탓인가요. 그 애가 운이 나빠서 못간거겠지요.”
어제 오후, 최윤희가 비밀리에 송화강공로대교 바로 남쪽에 있는 망강호텔에 가서 박화를 만나고 온것도 바로 그 애의 출국류학 일이 근심되여 그랬다. 얼마전에 박화한테서 전화가 왔었는데 우리 성에서 3명을 공비류학 보내는데 시험에 2등을 했다고 전했던것이다. 그런데 어제 오후, 그 애는 운이 나빠서 류학을 가지 못하게 되였다고 최윤희에게 알려주었던것이다. 그래서 최윤희는 그 애가 말하던것처럼 “운이 나빠서”란 말이 얼른 나왔다.
“내 오늘 그 애를 만나보았소.”
“오늘? 걔를?”
최윤희는 소스라쳐 놀란다. 아무리 속으로 준비했어도 단도직입적으로 백일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줄은 미처 몰랐다.
“그렇소. 동창들이 모두 태양도 풍경구로 유람을 간 그 틈에 그 애를 단독으로 만나고 왔소.”
“그럼 류학을 못 가게 된 그 일로 만난거예요?”
“그 일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일도 알아보려고.”
“더 중요한 일이라니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최윤희는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눈앞이 아찔해 난다.
강현수의 말을 들은 후부터 이상하게 느껴지던 불길한 예감이 현실로 안겨오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도 벌건 입을 짝 벌린 집채같은 고래가 오그라드는 한몸을 당금 집어 삼키는것만 같았다.
“그리고 방금전에 호텔에서 교수님도 만나고 오는 길이요.”
최윤희는 ‘앗!’하고 목에서 비명이 올라오는것을 가까스로 누른다. 하루 아침에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지듯 그렇게 수십년간 숨겨오던 비밀이 백일호가 눈 깜빡할 사이에 알아냈음을 뼈속까지 스며들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귀가 멍멍 해진다. 동쪽으로 멀지 않은 야식장에서 동창들이 떠들던 소리도 이제는 들리지 않는다. 당장 아무데고 도망가고 싶어도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지고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땅을 딛고 바로 설것 같지도 못하다.
“왜 그런 고통과 아픔을 혼자 감내한거요? 왜?”
“... ...”
“정말 미안하오! 이 백일호란 인간은 최윤희의 인생길에 너무나 무거운 짐을 얹어주었소. 후- 난 여태 윤희가 그런 짐을 한어깨에 메고 오는 줄도 모르고 두 다리를 쭉 뻗치고 편하게 살아왔구만.”
“... ...”
“윤희! 왜 버럭 성을 내지 않소? 왜 두 손으로 이 머리카락을 잡아끌면서 행패를 부리지 않는거요? 지금 나는 눈에서 불이 번쩍 일게 귀쌈을 얻어맞든가 윤희의 발길에 이 가슴팍을 멍이 들게 채웠으라면 오히려 마음이 후련해질것 같소.”
언제 들어도 점잖고 웅글지던 백일호의 목소리는 피줄기가 온 몸에 쭉쭉 뻗치는듯한 흥분으로 떨리고 있다.
오래도록 침묵이 흐른다. 수영장 수면우에 내려앉은 무수한 별들도 숨을 한껏 죽이고 빛나는 눈들만 깜빡거리고 있다. 언제 그 속에 끼여 들었는지 등을 꼬부린 상현달도 쪽배처럼 물우에 떠 까닥 움직이지 않고 있다.
“제가 만약 숨겨오지 않았다면 어쩌겠어요?”
갑자기 백일호한테 비수같은 날카로운 질문이 들어온다. 그사이 어느 정도 차분한 마음을 되찾은 최윤희다.
“당시 제가 임신을 한 사실을 알렸더라면? 그랬어도 반장은 몸에서 노린내가 난다는 저를 안해로 받아들였을가요?”
“아마 반갑지는 않았겠지만은 량심의 가책을 받아서라도 어쩔수 없이 그런 선택을 했을거요.”
“울며 겨자먹기로 그랬을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그렇게 찡그리는 모습을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평생 어찌 마주보며 산단 말인가요?”
“그럼 후에라도 알렸어야 하는게 아니오?”
“아이를 낳은 후에 알린다고요? 반장이 그러면 구금자와 리혼을 하겠어요?”
“그럴리는 없었을거요.”
“그것도 아니라면 그 애를 데려가 키우려고요?”
“그러지도 않았을거요. 만약 그렇게 하고 싶어도 윤희가 동의하지 않을건 불보듯 번연한 일 아니겠소?”
“그렇다면 숨겨오나 안 숨겨오나 반장한테 무엇이 다른가요?”
“무엇이 다른가구?...내가 만약 이 사실을 언녕 알았더라면 절대 회피하지 않고 내 안해 금자한테 솔직히 털어놓았을거요. 그래서 금자와 둘이서 윤희 혼자 몸으로 겪는 고통과 부담을 함께 나누려고 노력했을거요.”
최윤희는 머리 들어 백일호를 찬찬히 뜯어본다. 세월이 흘러 26년만에 이렇게 가까이에서 찬찬히 볼수 있는 얼굴이다. 실로 이 남자와는 이루다 형언할수 없이 특별한 인연으로 끈끈히 이어놓은 사람이다. 구척같은 키에 육중한 이 몸으로 처녀의 정조를 빼앗아 가고도 그 자리에서 싫다고 나눕는 남자, 그래서 스스로의 한몸에서 숱한 눈물을 짜내게 했던 남자, 그런데 이 남자는 도대체 어떤 존재이기에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렇게 멀리하려고 애를 써도 멀어지질 않고 그렇게 미워하려고 바득바득 애를 써도 좀처럼 미워나질 않는가 말이다. 참으로 이 남자와의 인연은 ‘숙명’이란 두글자를 내놓고는 풀이할수 없는 괴상야릇한 일이 아닐수 없다.
“오늘 그 애를 만났다고 했지요?”
“그랬소!”
“그러면 그 애가 반장을 아버지라고 부르던가요?”
최윤희는 백일호의 얼굴에서 눈길을 떼지 않고 있다.
“아니, 그 애도 그렇게 부르려고 하지 않았거니와 나도 그러기를 바라지 않고 있소. 하지만 명백한것은 그 애도 내가 누구라는것을 다 알고 있다는 그것이요. 그래서 우리는 마음과 마음으로 대화를 했소.”
“반장이 그 애도 안다는걸 어찌 알아요?”
“다른건 다 그만 두고 내 판단으로는 낮에 내가 그 애와 만난 사실을 절대 윤희한테 전화로 말하지 않았을거요.”
“?... ...”
“난 그 애의 눈빛에서 모든걸 읽을수 있었소. 그리고 그애도 내 얼굴에서 많은걸 읽어내려고 애썼을거요. 걔를 절대 어린애로 보지 마오. 곧 박사공부를 하게 되는 심리학 연구생이요. 내가 한가지 더 넘겨 집는다면 언젠가 그 앤 다른 녀학생하고 둘이 우리 집에 놀러 왔다가 우리 집 사진첩에 있는 옛날 우리 반 동창들의 졸업사진을 본적 있소. 그런데 우리 집에 놀러왔댔다는 그 사실도, 그리고 윤희네 집에 있는 사진과 꼭 같은 사진을 보았다는 사실도 윤희에겐 분명 이야기하지 않았을거요.”
“??... ...”
“그 애가 왜 윤희에게 말하지 않았을가?! 그 앤 자기 어머니의 얼굴을 가리우고 있는 이상야릇한 베일을 자기의 두손으로 벗기고 싶었던거요. 어제 오후에 윤희가 그 애를 만났으니 걔는 지금 우리가 이곳 태양도에서 동창모임을 가지고 있다는것도 다 알고 있지 않겠소. 하지만 나를 만나서도 그 애는 우리 모임에 관한 말은 아예 꺼내려고 하지도 않았소. 왜 꺼내지 않았을가? 윤희도 곰곰히 생각해보오. 나와 자기 어머니가 대학 동창생이고 오늘 태양도에도 함께 있다는걸 번연히 알면서도 말이오.”
“!... ...”
“피줄이란 지우려고 해서 지워지는것도 아니고 끊으려고 해서 끊어지는것도 아니요. 그것은 마치도 지금 우리 두 사람이 앉아있는 이 뒤에 드리운 그림자와도 같은거요. 우리 머리우에 광선이 있고 우리의 몸체로 이 광선을 가로 막고있는한 그래서 생겨난 저 두개의 그림자는 지울래야 지울수가 없소. 저 그림자 우에다 이 수영장의 물을 다 퍼다 부으면 지워질가? 아니면 산을 하나 옮겨다 꽁꽁 덮어놓으면 지워질가?”
“!!... ...”
“피줄이란 바로 그런거요. 한마디 더 한다면 마치도 윤희와 김만융교수님의 관계처럼.”
“어머! 그건 또 무슨 말이래요?”
최윤희는 갑자기 바늘에 찔린듯이 펄쩍 뛰여 일어났다. 한번 또 한번 백일호에게 깜짝 깜짝 놀라는 최윤희다.
“허허, 윤흰 내가 심리학전문가라는걸 몰랐소? 나의 판단에 의하면 김만융교수님은 윤희의 부친임이 틀림없소. 윤희가 스물여섯해나 숨기려고 모지름을 써왔던 그 애, 내가 그 애의 친아버지가 틀림없듯이...”
사랑은 아무나 하나, 눈이라도 마주쳐야지...
빛과 어둠이 뒤섞인 동쪽 야식장에서 강현수의 건드러진 노래소리가 들려온다.
만남의 기쁨도
리별의 아품도
두사람이 만드는거야
어느 세월에 너와 내가 만나
점 하나를 찍을가
사랑은 아무나 하나, 누가 그리 쉽다고 했나
...
사랑은 아무나 하나, 그리하는 얘기가 아니지
만나고 만나도 느끼지 못하면
외로운건 마찬가지야 ...
태진아라고 하는 한국의 가수가 들었으라면 기가 막혀 눈물을 왈칵 쏟을 강현수의 구성진 노래소리는 고요히 잠든 들녘을 놀래워 깨우며 멀리 멀리 밤하늘로 메아리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