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호, 괜찮아요.”
“아니, 자네도 바쁘고 나도 바쁜 사람이네.”
“그러세요, 그럼 교수님 안녕히!”
박화는 방금 들어올 때처럼 허리를 곱게 굽혀 보이고는 백일호의 사무실을 조용히 나가려고 한다.
“자네, 잠간!”
그렇게 사무실을 나가려는 박화를 백일호는 다시 부른다.
“내 집사람한테서 들을라니 자넨 우리 아들 청아와 매일 이메일을 주고 받는다며?...”
“예, 청아는 정말 총명하고 웅심이 깊은 애래요.”
“그럼 그 애와 친구이상의 관계로 발전하고 싶은 생각은 없는가?...”
“호호 청아는 저보다 한살 어려요. 전 앞으로도 청아의 누나로 지내고 싶어요.”
“오- 그래?! 알았네 어서 가보게.”
백일호는 박화에게 그 어떤 부담감도 주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담화를 다 나눈척 하다가 슬쩍 이 말을 꺼내보았던것이다.
백일호가 박화와 마주앉아 담화를 나눈 시간은 거퍼 반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백일호는 충분히 만족했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딸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는 그 짜릿한 순간을 몸과 마음으로 체험했던것이다. 한편 그 짧은 사이, 심리학 전문가로서 역시 심리학을 전공하는 박화의 몸에서 적지 않은 수수께끼를 풀어냈고 해명했고 또한 박화도 분명 이 비밀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 이 모든 일이 꿈이 아닌 현실로 더 실감나게 안겨왔다.
백일호는 답답하던 가슴이 뻥 구멍이 뚫린것처럼 후련해졌다.
하면서도 아직도 수수께끼 하나는 풀리지 않았다. 그것은 박화의 키였다. 얼핏 눈짐작으로 보아 박화의 키는 최윤희의 어깨에 밖에 오지 않을것 같았다.
(하긴 박화가 키만 컸더라면 내가 언녕 벌써 최윤희와 련결시켜봤을거야. 나뿐만 아니라 구금자까지도 그런 생각을 했을런지도 모를 일이야. 그러니 어디에서 많이 본 것 같다는 인상만 받았을뿐 최윤희하고 모녀사이가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던것이 아니겠는가...)
백일호는 이런 생각을 굴리며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동창들이 태양도 유람을 마치고 돌아오기 전에 별무리호텔로 먼저 가 있어야 했다.
그는 서둘러 핸드폰으로 사무실 왕주임을 불렀다.
배놀이
‘한근짜리’ 김성만이와 ‘비아바이’ 박재동은 소형기차를 타고 얼마쯤 가다가 ‘러시아’란 역에서 내려버렸다. 이런 장난감 같은 기차야 코흘리개 어린애들이나 그런 애들을 데리고 온 부모들이나 타는 놀음이지 반백이 되여 가지고 그런 조무래기들 속에 끼여 앉아있자니 싱겁고 멋적기 그지없었다. 아까 강현수를 따라 러시아 소도시를 지날 때 어느 길목에선가 낚시대를 세준다는 간판을 보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서 어디가서 낚시대를 세내여 한두 시간이라도 낚시질을 하려고 둘이 약속했던것이다.
소형 기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낚시대 세주는 곳을 찾느라고 거리를 기웃거리고 있는데 눈앞에 문득 ‘러시아기념품상점’이란 간판이 나타났다.
“여기 들어가 러시아 물건이나 구경 좀 해볼가?”
“러시아 물건들은 우둔하게 만들었지만 든든 하다구.”
둘은 호기심에 러시아기념품상점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 상점안에서 김순애를 만났던것이다.
권총라이타 하나를 손에 든 김순애는 값을 흥정하느라고 매대주인녀와 옥신각신 하고 있었다.
“25원에 하나 줘요.”
“30원에서 28원으로 내려줬는데 이젠 더 못내려요.”
“그럼 26원!”
“안된다는데...”
“그럼 27원!”
“이거 참, 안된다는데 왜 이렇게 시끄럽게 구나? 돈이 없으면 만져도 보지 말거지...”
아까부터 1~2원을 가지고 싱갱이질 하는 김순애를 갖잖은 눈길로 흘겨보던 매대주인녀는 퍼러딩딩 해서 김순애가 손에 들고있는 권총라이타를 홱 나꿔채갔다.
“뭐, 어쩌고 어째?”
김성만이가 먼발치에서부터 표독스러운 매대 주인녀를 손가락질하며 김순애 곁으로 다가왔다. 비아바이도 뒤따라 왔다.
김성만이는 한근짜리 코를 벌름거리며 겨드랑이에 꼈던 검은 핸드빽 쪼르래기를 쫙- 당기더니 그 속에서 인민페 만원짜리 묶음을 하나 꺼내 매대우에 탕 소리나게 메쳤다.
“여기에 있는 라이타를 몽땅 줘!”
난데없이 나타난 김성만이가 고함을 지르자 그 매대 주인녀도 가만 있으려고 하지 않는다.
“내 지금 이 녀자와 말하는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야?”
“이 녀자? 이 녀자는 내 안해야?”
김성만이는 이번엔 젖먹던 힘까지 다하여 더 꽥 소리를 지른다. 그제야 그 주인녀는 기가 팍 꺾여 찍소리도 못한다.
“이러지 말아요. 성만이! 안 사면 그만이 아닌가요.”
“안 사기는 왜 안 사! 이렇게 덜돼먹은 간나새끼들은 혼을 좀 단단히 내줘야 해!”
성만이는 팔을 잡고 말리는 김순애를 한옆으로 밀어놓으며 주먹으로 매대 유리를 탕탕 두드린다.
“왜 이 돈만큼 달라는데 말이 없어?”
“그렇게는 물건이 없어요...정 사려거든 래일 오세요.”
“물건도 없으면서 큰 소리야? 그럼 여기에 있는 라이타가 모두 몇가지 종류야?”
“권총, 로케트, 땅크, 승용차...모두 스물한가지 종류래요.”
“그럼 같지 않은 라이타를 하나씩 사겠으니 얼른 계산해봐!”
매대 주인녀가 고개를 숙이고 돈을 계산하는 사이 김순애는 발을 동동 구르며 그냥 말린다. 그러는 김순애를 이번엔 비아바이가 곁에서 옷깃을 잡아당긴다. 김성만이는 돈 많은 기업인이니 이런것쯤은 너무 부담가지지 말라는 귀띔이다.
라이타 21개 값이 도합 530원이라고 했다. 김성만이는 만원짜리 돈 뭉치에서 백원짜리 다섯장을 뽑아냈다.
“전 세계에서 제1갑부인 빌 게이츠란 사람도 말이야, 상점에 가선 1전, 2전 다툰다는 소릴 들어봤겠지? 이 돈이면 덮어쓰고도 남을거네.”
성만이는 그 주인녀에게 5백원만 던져주고는 김순애와 비아바이를 데리고 상점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