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강신문=하얼빈) = 중국의 많은 유지인사들은 안중근의 의거는 중국인민들에게 경성(警醒)작용을 이르킨 큰 사건으로 보고 있으며 안중근 의사를 중국청년들이 따라 배워야 할 본보기로 삼고 있다.
베이징에서 발행한《정종애국보》는 논설 '일본 이토공작의 피살사건을 논함'에서 "청천벽력이 울리니 우리나라 사람들 꿈속에서 놀라 깨어났다"고 묘사했다. 장사의 정육이 집필한《안중근전》맺음말에는 "아! 우리중국에 어찌 안의사와 같은 뜻과 의분을 가진 자가 없겠는가? 어찌 이소식을 듣고 분연히 일어나지 않겠는가?"고 중국 청년들에게 깨우침을 주었다.
'안중근, 이토를 사살', 연극으로 창작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의 안중근 의거가 있은후 1910년에 런톈즈
(任天知)등 우수한 연극 인재들로 구성된 진화단이 안중근 의거를 '안중근, 이
토를 사살'이라는 연극으로 창작해 중국 전역에서 순회공연하면서 전국을 진
감했다. 사진은 이 연극 한 장면.
당시 안중근의 의거는 청나라 정부를 뒤집고 민국을 건립하려고 하는 민주혁명당인들의 "몸을 죽여 인을 이룩한다"( 杀身成仁 )는 본보기로 되었다. 지식인 라남산( 罗南山 )은 박은식저 《안중근전》서문에서 "우리 중국의 지사들은 '그 작은 한국에 일대 호걸이 나타났는데 유독 우리 나라에 그런 인물이 없을 수 있으랴’'고 하면서 흥분을 금치 못하였다. 그런 후 얼마 지나자 않아 지사들이 황화강(黄花岗)을 피로 물들였고 , 무창에서 봉기하여 우리민족의 주권을 회복하였다. 그렇다면 안씨의 의거가 우리들에게 정신적인 도움을 주었다고 할 수도 있으니 이것 역시 우리들이 감격해 마지않는 또 하나의 원인이다"라고 안중근의 의거가 신해혁명에 직접적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특히 "5 . 4운동"전후 안중근의 의거 내용을 소재로 삼은 화극이 무대에서 공연되었다. 중국의 현대 화극 활동가 임천지(任天知 )는 1910년 연말 상하이에서 중국의 제일 처음 나온 화극직업단체인 진화단을 성립하고 화극 《안중근이 이토를 사살》이란 화극을 꾸며 상하이 , 무한, 장사 등지에서 연출하였다. 천진 남개학교에서도 화극 《안중근》을 연출하였다. 이 극에서 등연초가 안중근의 역을 하고 주은래가 지도했다. 1937년 항일전쟁이 폭팔된 후 주은래와 곽말약의 지도하에 중국의 저명한 히극가 전한(田汉)이 이끄는 남사(南社)에서도 무한, 장사 등지에서 안중근의 화극은 연출하여 영웅을 구가하고 민중의 반일정서를 환기시켰다.
1931년 일본 침략자들이 "9 . 18사변"을 일으켜 전 동북을 점령한 후 동북의 각 항일유격 지구에서는 《안중근 애도가》가 널리 유행되었다. 동북 항일연군 노전사 리민은 이 노래를 《동북항일연군 가곡 선집》에 넣으면서 리조린 장군이 심양에서 혁명활동을 할 때 이 노래를 청년들에게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국가가 위기에 처해있는 중국은 안중근 의거로부터 일본의 침략자와 대항 하려면 반드시 한국과 연합전선을 결성하여 항일의 공동투쟁을 전개해야 된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의 독립운동을 성원하고 지지할 것을 호소했다. 증용(曾镛 )은 박은식《안중근전》서문에서 "오늘도 삼한의 지사들은 속속 중국으로 오고 있다. 우리들은 정의를 받들어 그들을 도와줌으로서 앞으로 삼한 옛 땅에 또 하나의 공화국을 건립하여 우리 나라와 함께 동아에 일어서도록 하여야 한다. 그래야만 안군의 공업(功业)에 보답할 수 있으며 또 그래야만 안군의 넋으로 하여금 하늘에서 웃음짓게 할 수 있을 것이다"고 썼다.
《민우일보》는 소식보도에서 "일본의 모 신문은 '우리 나라는 이와 같은 큰 타격을 받았다. 오늘 이토 한 사람이 죽었지만 이 후 700만 이토가 재생할 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한국인을 대신하여 이 말을 이으련다. 한국은 안중근 한사람이 죽었지만 이 후 700만 안중근이 재생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700만 이토를 대항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한국의 항일투쟁을 성원하였다.
/서명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