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강신문=하얼빈)= 안중근의사는 조국의 독립과 아시아의 평화를 위하여 할빈역두에서 일본의 조선침략원흉 이토히로부미를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하여 세계를 진감했다. 안중근의사가 1906년 10월 22일부터 11월 1일까지 10박 11일간 할빈에 남겨놓은 행적을 정리하여 독자 여러분께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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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2일: 안중근의사 할빈에 도착
1909년 10월 21일 오전 8시 50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역을 떠난 우편렬차는 778km를 달려 22일 저녁 9시 15분에 할빈역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승객들은 개찰구에 몰렸다. 피끓는 조선청년 셋이 개찰구에 나섰다. 그들이 바로 안중근, 우덕순, 류동하였다. 안중근(安重根, 21살)의사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을 지냈고 의병 300명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경흥에서 일본경찰서를 쳐부셨고 회령에서 일본 수비군대 부대와 치렬한 격전을 하였다. 그후 러시아 하리에서 결사동지 11명과 함께 모여 손가락을 잘라 피로서 태극기에 '대한독립' 넉자를 쓰고 조국과 민족을 구하기로 하늘과 땅에 맹세했다.
안중근의사는 때마침 일본의 이토히로부미가 러시아 대장대신 코코프체프와 만나 동양정책을 협의하려고 할빈을 시찰한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나라와 겨레의 원쑤를 갚을 때라고 원흉을 없애려 할빈에 온것이다.
우덕순(禹德淳)은 안중근보다 두살 우다. '단지동맹'의 동지는 아니지만 이전부터 안중근이 신뢰하는 사람이다. 서울시내에서 잡화점을 경영하던 우덕순은 량친과 안해를 남겨두고 러시아 연해주에 와 의병투쟁에 몸을 던져 안중근이 지휘하던 회령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웠다. 그후 담배행상을 하며 연해주 각지를 돌면서 동포를 상대로 계몽운동을 펼쳤다. 조선인들에게 '대동공보'의 우편 구매를 권장하고 있었다. 우덕순은 대동공보에서 안중근을 만났다. 안중근이 이토히로부미를 사살할 계획과 협력자가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찬성의 뜻을 표하고 자신도 권총 한자루를 소지하고 있다고 하면서 안중근과 같이 대사를 결행할것을 약속하고 할빈에 온것이다.
류동하(劉东夏)는 18세 어린 나이였다. 안중근과 우덕순 두 사람 다 러시아말을 전혀 몰라 대단히 불편함을 느꼈다. 그러던차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할빈까지 오는 기차가 수분하에서 1시간 9분이나 정차되여 있었다. 이 틈을 리용하여 안중근은 역 앞에서 병원을 차리고 있는 의사 류경집을 찾아갔다. 류씨는 그전에 안중근의 병도 봐주고 의금도 헌납한적이 있는 서로 가까운 사이였다. 안중근은 가족을 맞이하기 위하여 할빈으로 가는데 러시아말을 몰라 답답하니 통역 한사람 구해줄수 없겠는가고 부탁했다. 류씨는 마침 약재를 구입하러 아들을 할빈에 보내려던 참이였다며 잘됐다고 하면서 아들 류동하를 보내겠다고 했다. 류동하도 그전부터 안중근의 이름을 듣고 그를 존경해오던 터라 안중근, 우덕순과 동행하여 할빈에 오게 된것이다. 기차에서 내린 안중근 일행은 포장마차를 타고 레스나나야가28호(지금의 도리구 삼림가) 김성백(金成白)의 집을 찾아갔다.
32살에 김성백은 러시아 국적을 가지고 있고 건축 청부업을 직업으로 삼고 있었으며 할빈 '한국민회' 회장으로 동포사회에 열성을 보내는 사람이였다.
김성백의 넷째 동생 김성기와 류동하의 두살 아래 녀동생 유안나가 약혼한 사이니까 김성백과 류동하는 사돈간이였다. 그러므로 류동하는 김성백의 집에 숙박할것이요 안중근도 그전에 프로라니치야(수분하)를 방문할 때 류경집의 댁에서 김성백을 만나 안면이 있는 처지라 3인이 함께 김성백 집에서 숙박하자고 기차안에서 이미 합의되였다.
안중근 등이 탄 마차가 레스나나야가에 도착하자 그들은 차에서 내렸다. 28호를 찾아 들어갔다.
김성백은 어디로 나가 집에 없고 그의 안해가 문을 열어주었다.
손님이 왔다고 소식을 전해주었던지 김성백이 인차 집으로 돌아와 뜨겁게 맞아주었다.
안주인이 차린 저녁을 배불리 먹인 다음 잠자리도 펴주기에 일행은 다음날 행동을 위해 그날 밤을 푹 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