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일에 바쁜 년령이기는 하나, 환갑이 거의 되면 가끔 지나간 세월을 돌이켜보게도 된다. 한국의 한 철학자가 인생 60에 철이 든다고 했다. 나도 그런 느낌이 든다. 옛날 부모님과 동생과 함께 살 땐 가진 것이 없어도 오붓했고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런 날이 영원할 것 같았다. 나이들면서 삶은 차츰 나아졌고 미래에 대한 꿈도 살아있었다. 부모님들 년세가 지긋해졌지만 그래도 그런 느긋한 날이 앞으로도 오래도록 지속될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님이 중풍으로 쓰러지시고 어머님 병시중을 들던 아버님이 암으로 진단, 한달도 안돼 돌아가셨다. 나는 전혀 마음의 준비가 돼있지 않았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아버님 장례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온 나는 장인어른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눈물을 흘렸다. 아버님을 갑자기 보내야 하는 아쉬움, 생전에 좀 더 잘해드리지 못한 미안함과 자책감, 거기에 병상에서 일어서지 못하는 어머님을 생각하며 나는 마음이 크게 아팠다. 내 인생에서 처음이자 아마 마지막으로 슬프게 소리내여 울어본 것 같다. 2년후 어머님까지 돌아가셨다. 자신의 무기력함이 실망스러웠고 나는 우울감에 빠졌다. 나는 인생이 크게 변한 느낌을 받았다. 이젠 아버님이 돌아가신지 5년, 어머님이 돌아가신지도 3년이 된다. 그간 옛날에 종종 느끼던 때론 마음속 깊이까지 다가오던 행복감도 만족감도 미래에 대한 꿈도 나에게서 사라졌다. 내가 소중하게 여기던 많은 것들이 부모님이 떠나가신 지금 의미를 잃고 퇴색된 것 같다.
지금은 남은 인생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를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각자의 인생에는 세개의 기둥이 있는 것 같다. 부모님이 내 인생의 하나의 기둥이요, 나자신이 하나의 기둥, 그리고 나의 자식들이 또 하나의 기둥이다. 세 기둥이 건전할 때 인생이 제일 안정적이고 행복한 것 같다. 부모님이 떠나고나면 내인생의 기둥 하나가 무너지는 것. 기둥 하나를 잃은 내가 인생을 다르게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 같다. 이제부터는 큰 흥분이 없을 남은 인생을 차분하게 보내는 것이 나의 본분인 것 같다. 그러나 내가 또 내자식들에게 하나의 기둥이 됨을 기억해야 할 것 같다. 내가 건강하게 좀 더 오래 사는 것이 나의 자식들이 좀 더 오래 그들에게 속하는 삶의 기둥들을 지키고 행복을 느끼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런면에서도 건강을 지키는 것이 우리세대에게는 하나의 의무이고 책임인 것 같기도하다. 후담이지만, 아버님의 장례를 마치고 직장에 돌아왔을때 유대인 지도교수의 첫마디가 “자책감이 들지”였다. 지금도 나는 꿈에서 부모님을 뵙고 깨여난후 효도를 못한 자책감과 아쉬움에 눈시울을 붉힐 때가 있다. 부모님에 대한 사랑과 부모님이 떠났을때 느끼는 아픔은 국가와 민족에 관계없이 차이가 없다.
집
젊었을 때는 집이란 가족이 함께 사는 건물이라고 생각했다. 후에 보니 집이란 개념이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았다. 내가 외국으로 공부하러 떠난 후에 나의 부모님은 마을 내에서 두번 이사를 했다. 내가 가끔 귀향을 할때면 건물은 생소해도 예상 밖으로 곧바로 정이 들었다. 그 많은 옛 추억들도 부모님과 함께 새집으로 옮겨온것 같았다. 뒤늦게 깨달았으나 건물에 관계없이 부모님이 계시는 곳이 집이였다.
환갑에 가까운 나도 물론 살고 있는 집이 있다. 그러나 지금도 내가 내집이라고 말할때는 부모형제가 오손도손 모여 살던 옛날 부모님 집을 의미한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이 나의 아이들에게는 지금도 장래에도 그들의 집일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옛날 부모님 집이 언제나 마음속에 내집으로 먼저 다가 온다. 내가 젊었던 시절 쉽지 않은 환경 속에서도 무리할 정도로 도전을 할수 있었던 것은 어려웠던 내집을 어떻게나 좀 더 나아지게 해보겠다는 집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집념은 피타는 노력으로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부모님을 바라 보면서 자란 나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밖에서 큰소리 하나 칠줄 모르는 평범한 나의 가족은 이렇게 한덩어리가 되여 어려움 속에서도 내집에서 오붓이 살아왔다. 이제 내집은 기억속에만 남게 됐다.
가끔 동료들이 이번 휴가에 집으로 다녀오느냐고 묻는다. 그러면 나는 돌아갈 집이 없다고 답한다. 우리 나이가 되면 그 뜻을 즉시로 알게 된다. 그렇게 답하는 나도 서글프기 그지없다. 이제는 꿈에도 그리던 고향에 다녀오기도 주저된다. 고향은 언제나 고마운 곳이다. 그러나 부모님처럼 나를 기다리고 반기는 사람이 이제 이 세상에 또 있으랴. 부모님집에 돌아갔을 때처럼 마음 푹 놓이는 곳이 또 있으랴. 호텔에 머물다 마을을 한바퀴 돌고 떠나야 한다면 돌아설때 느껴질 허탈감이 두렵기도 하다. 가지고 있을 땐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 잃고난 후에야 더 잘 알게 되는 인생 또한 야속하다는 생각이 드는건 나 혼자만이 아닐것 같다. 어려움 속에서도 가족이 하나가 되여 열심히 그리고 선량하게 살아온 그리운 그 나날들, 희로애락 우리네 인생사 담겨있는 곳, 부모님 집은 영원한 마음의 내집이다.
감사는 마음속 깊이에
내가 의과대학을 다닌 시절에는 졸업하면 국가에서 직장을 지정해주게 돼있었다. 그러나 돈이 있고 빽이 있으면 큰도시에서 좋은 직장을 얻을수 있었고, 나 같이 시골에서 와서 아무것도 가진것이 없는 졸업생은 대개 지방에 파견되게 된다. 이렇게 돼서는 가족에 도움을 주기도 어렵고 나 자신의 의술도 발전하기 어려울것 같았다. 젊은 시절의 다소 무모한 생각아래 나는 석사연구생 시험에 도전하게 된다. 그때는 외국 유학을 다녀와서 성공을 한 선배님들이 주위에 가끔 있었다. 나에게는 그 길이 그나마 자신의 노력으로 자신의 미래를 결정 할수 있는 가능한 선택지로 생각됐다. 실패할 확률은 물론 높았다. 그러나 석사과정에 합격되면 장래에 박사과정에 들어갈 가능성이 생긴다. 박사공부는 외국에서 하고 귀국해서 좋은 의사로 되자. 그래서 학부 졸업 2년전부터 나는 버스를 몇번씩 갈아 타면서 밤 학교와 주말 학교에서 외국어 공부를 추가로 했고, 졸업 일년전부터 의사 당직실에서 쪽잠을 자면서 때론 새벽까지 전공분야를 깊이 탐독했다. 덕분에 피부병학과 석사과정에 순조롭게 입학할 수 있었다. 그후의 나의 인생은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긍정적인 려정의 연속이였다. 나는 지금도 나를 도와 준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할빈의대에는 조선족 교수 몇분이 계셨는데 조선족 학생들을 친 자식처럼 대해주셨다. 그 덕분에 우리는 외롭지 않았고 마음이 항상 든든했다. 나의 집사람도 이비인후과 김덕균교수님의 사모님이 선을 놓아 주셔서 만나게 됐고 결혼에까지 이르게 됐다. 그때 조선족 교수님들과 학우들과의 추억은 나에게는 인생의 소중한 자산으로 남아있다.
살다보면 예기치 못한 일들이 찾아오는 경우가 있다. 석사공부를 하던 어느날 소아과 교수가 나를 찾아오셔서 일본 친구가 방문을 오는데 통역을 서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였다. 그래서 2-3일간 통역을 섰는데, 그 일본교수가 떠나기 전날 나에게 일본에 류학을 올 생각이 없느냐고 묻는 것이였다. 그때가 1991년, 내가 석사과정 2학년생일 때였다. 그때는 출국이 매우 어려운 시기였고 류학은 몇년 후에야 희미하게 나마 가능성이 있을 걸로 생각됐다. 내가 류학은 가고 싶지만 출국이 어렵다고 여쭈었으나 그분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것 같았다. 지인이 피부병학 교수이니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몇달 뒤 그 교수로부터 피부병학 교수가 중국을 방문하니 만나 보라는 련락이 왔다.
후날 나의 박사과정 지도교수로 되는 피부병학 교수는 만나서 십분도 안돼서 비자 서류를 보낼테니 석사과정이 끝나는대로 일본으로 오라고 권유했다. 1992년 나는 일본 땅을 처음으로 밟게 된다. 내가 예상했던것 보다 훨씬 빠르게 류학이 실현 된 것이다. 일일이 거명 할순 없으나 많은 분들의 고마운 도움이 있었기에 불가능에 가깝던 일이 가능해 질수 있었다. 5년후 일본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귀국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지도교수가 미국으로 가서 1-2년이라도 경험을 쌓은후에 중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며 자신의 미국 교수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 박사후 자리를 물색해 줬다. 나는 1998년에 미국 데트로이터의 웨인대학 의학부에 박사후로 도착하게 된다. 그러나 몇달후 박사후 지도교수가 나를 찾더니 미국 국가위생연구원에 박사후 자리가 생겨서 지인과 이야기를 해 놓았으니 거기로 자리를 옮기는것이 어떻겠냐고 묻는 것이였다. 자신은 몇년후에 은퇴할 계획이니 세계 최고의 연구소로 옮겨서 마음껏 해보기 바란다고 했다. 이것 또한 내가 예상치 못한 일이였다.
나는 결국 미국 국가위생연구원 로화연구소에 박사후로 들어오게 된다. 26년전의 일이다. 박사공부를 할때 일본 학자들로부터 미국 국가위생연구원이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 듣긴 했으나 내가 그런곳으로 갈수 있다고 상상도 해본적이 없었다. 나는 여기서 최고 수준의 연구시설과 연구수준을 체감하게 된다. 매일과 같이 세계적인 학자들과 머리를 맞대고 첨단의 연구를 한다는것은 쉽지는 않았지만 보람찬 일이 였다. 차츰 귀국 또는 대학으로 옮겨서 교수를 하려던 생각도 사라지고 나는 로화연구소에서 연구를 계속하기로 마음 먹게 된다. 이렇게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났다. 새로운 발견을 해 론문도 낼수 있었고 그간 연구 방향을 피부병학에서 로화학으로 넓힐 수 있었다.
지금은 미련방정부 직원으로 국가로화연구소에서 연구원의 신분으로 연구도 하고 강연도 하고 학생도 가르친다. 돌이켜 보면 어떤 큰 일은 이루지 못했으나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인생의 결정적인 고비고비에서 나는 국내외의 많은 분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이뤄진것도 많다. 아쉽게도 나를 도와주셨던 분들이 이제 이 세상을 떠나기도 한다. 하지만 전혀 보답을 못했다. 어쩌면 앞으로도 보답할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 내가 받은 도움과 은혜를 마음속 깊이에 간직하고 이 세상의 모든것에 감사하며 이 사회에 조금이라도 유익하게 남은 인생을 보내고 싶다. 그것이 내가 부모님뿐 아니라 나를 도와준 고마운 모든 분들께 보답하는 길일것 같다.
저자: 최창익 2024.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