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동성 청도에서 남성 미발사 중 누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가 하고 물으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주저없이 ‘리철수’라고 말할 것이다.
고향이 연변 연길인 리철수(1969년생)는 18세 되던 해에 지인으로부터 미발학원에 가서 기술을 배우지 않겠는가 하는 제의를 받았다. 사회진출 후 특별히 할 일이 없었던 리철수는 그 길로 미발학원에 등록, 인츰 미발의 묘한 매력에 빠졌다.
“미발은 그냥 고객의 머리를 깎는게 아니라 하나의 조형물을 만드는 마음가짐으로 해야 된다.”는 스승의 가르침에서 리철수는 큰 인상을 받았고 똑같은 사람일지라도 헤어스타일에 따라 완연히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 신비감에 빠졌다.
“미발업에 종사할 팔자였나봅니다. 학교 공부는 하기 싫었지만 미발공부는 정말 재미났습니다.”
리철수는 그때 당시를 회억하면서 진짜로 즐기면서 한 일이 바로 미발업이라고 했다.
‘리론과 실천을 겸비한 미발사’로 이미지를 굳히게 된 리철수는 당시 연길에서 가장 인기가 높았던 신시대, 표방 등 유명 머리방에서 가위를 잡게 된다.
1990년대 중반 만 하여도 연길에는 한국에 가서 미발기술을 배운 사람이 거의 없었다. 당시 표방미용원의 원장은 한국의 유명 미발업소를 찾아가 미용미발 기술을 배우고 돌아온 사람으로서 연길에서 큰 인기를 모으고 있었다.
리철수는 표방미용원에 3년간 몸담고 있으면서 원장에게서 많은 최신기술과 노하우를 전수받았고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독립적으로 머리방을 차리게 되였다. 궂은 일 마른 일 가리지 않고 하면서 열심히 일한 덕분에 머리방은 성업을 이어갔다.
1997년 리철수는 기술 하나를 믿고 단돈 300원을 들고 혈혈단신으로 청도에 진출했다.
리철수의 헤어기술은 청도에서도 어김없이 통했다.
조선족과 한국인들이 많이 집결된 청도에서 그는 남들보다 3배 이상의 봉급을 받는 기능공으로 받들려 다녔고 기업을 운영하는 사장들은 리철수가 없으면 머리를 깎지 않고 돌아가기까지 했다.
리철수는 높은 인기를 빌어 리촌에 헤어방을 오픈, 대번에 리창구를 대표할 수 있는 헤어방으로 급부상했다. 기능공만 해도 여덟명을 두었고 하루 순수입이 5000원을 넘겼다.
“빨간 스포츠카를 몰고 다녔는데 웬만한 중소기업 사장을 초과할 만큼 인기가 대단했지요.”
리철수의 오랜 단골인 장사장이 말했다.
물질적인 풍요 앞에서 그의 ‘초심’은 조금씩 변색하기 시작했다. 머리방이 아닌 다른 곳에 눈길을 돌리는 시간이 늘어났고 결국 황당한 선택을 하게 된다. 한국인과 함께 절강성 의오에 가서 악세사리 회사를 차린 것이다.
“악세사리가 무엇인지 아무 것도 모르는 처지에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한국인의 유혹적인 말을 듣고 무작정 의오에 갔지요. 초심을 버린 죄로 인생수업 학비를 톡톡히 치렀습니다.”
리철수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일년간 아무 일도 성사시키지 못하고 몇해 동안 알심들여 모은 거금을 깡그리 날려버렸다. 떵떵 거리며 잘나가던 헤어방 사장으로부터 가위 하나만 달랑 남은 푼전없는 사람으로 변신한 처절한 신세가 되였다.
큰 좌절 앞에서 리철수는 가슴에 손을 얹고 초심이 무엇인지를 곰곰히 생각해보게 되였다. 한때 그의 인생을 빛내준 것은 가위였고 앞으로 그의 인생을 지켜줄 것도 역시 가위임을 알게 되였다. 그는 재기의 꿈을 꾸며 용기를 내여 조선족들과 한국인들이 집거해 살고 있는 성양구에 터를 잡고 ‘리철수헤어샵’을 오픈했다.
‘리철수헤어샵’은 인츰 성양구의 대표적인 헤어샵으로 부상했고 리철수 본인은 열심히 살아가는 전형으로 2012년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돐’을 맞으면서 한국 KBS 방송에 소개되기도 했다.
“몽땅 20여년 되는 단골손님들입니다.”
리철수는 20여년간 변치 않는 단골손님들의 마음에 감동을 받는다고 말했다. 자기가 가위를 놓고 곁눈을 팔 때 제일 반대했던 사람들도 단골들이였고 가위를 다시 잡자 제일 먼저 찾아온 손님들도 단골들이라고 강조했다.
기능공만해도 8명을 거느리고 한때 위세를 자랑하던 ‘헤어샵 사장’이 아니였다. 손님의 머리를 직접 감겨주고 머리를 말려주고 모든 일을 혼자서 하고 있었다.
“곁눈을 팔지 말고 자기가 잘하는 일을 꾸준히 하라고 권장하고 싶다.”면서 “초심을 되찾으니 인생의 가치가 보이고 보람찬 인생길이 나타났다.”고 리철수는 말했다.
좌절과 실패를 겪어본 그는 차분하게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와 어려운 사람을 도우려는 마음을 가지게 되였다. 한달에 한번씩 양로원과 고아원을 찾아 무료로 머리를 잘라주었고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올 때마다 몸을 사리지 않았다.
“가위를 잡을 수 있는 한, 양로원과 고아원을 위해 무료 봉사를 할 것입니다.”
지난 10여년간 단 한번도 거르지 않고 실천한 사람답게 그의 입에서는 ‘무료봉사’라는 말이 담담하게 흘러나왔다.
출처:연변일보
편집:김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