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김호림 특별기고--
(흑룡강신문=하얼빈)마을을 눈앞에 두고 다리 위에 갑자기 돌무지가 나타났다. 길을 새로 닦기 위해 아예 통행을 차단했던 것. 그러고 보니 위성진(衛星鎭)은 마을 이름처럼 그렇게 하늘로만 통해야 할 것 같았다.
기사는 무작정 택시를 돌려 세우려고 했다. "여봐요, 손님은 마을까지 남은 8리 길을 걸어가야 할 것 같은데요."
아닌 게 아니라 '위성진' 자체가 그 무슨 엉뚱한 '위성'을 쏘아 올리고 있는 듯 했다. "위성을 쏘다"는 중국의 보도 역사에 생긴 특유한 어휘이다. '대약진' 시기인 1958년, '인민일보'는 어느 마을의 밀 소출이 무당 2105근(약 650㎏)이라고 터무니가 없는 허위 소식을 실었다. 이 보도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위성' 보도가 시작되었으며, "위성을 쏘는" 거짓 만들기의 경합이 도처에 일어났다.
흑룡강성(黑龍江省) 수화현(綏化縣)의 '위성' 인민공사는 바로 이 무렵에 생긴 것이다. 훗날 인민공사는 향으로 개명했고 다시 진(鎭)으로 되었다.
위성향(진)의 박가툰(朴家屯) 역시 '위성'처럼 출현한 박씨 마을이다. 하필이면 '위성'이라는 이 이름을 눈앞에 떠올린 원인이 있다. 박씨의 족명(族名)이 조선족이 아니라 엉뚱하게 한족(漢族)이기 때문이다. 이 일은 예전에 대륙을 날린 허위 소식인 '위성'이 아니라 진실한 기문(奇聞)이었다.
그러나 기문의 마을은 길이 막혔다고 해서 당금 '위성'을 타고 날아갈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위성진은 언제 도착하고 또 박가툰은 언제 만날까… 두발로 타박타박 길을 재는데 오토바이 한 대가 부르릉 하고 바로 곁에 멈췄다. 마을에서 만남을 약속했던 박문룡(朴文龍, 53) 씨가 고맙게도 미리 마중을 나온 것. 박문룡 씨는 박가툰의 족보를 만들고 있는 사람으로, 위성진 중학교에서 교원으로 있는 등 박씨 마을의 흔치 않는 수재였다.
박가툰 남쪽 호란하 기슭의 조선족마을 일경.
"우리 박가툰과 동명의 마을이 다른 곳에도 있다는 걸 올해에 처음 알게 되었지요." 박문룡 씨는 이렇게 길가에 화두를 꺼내고 있었다.
어찌 보면 박문룡 씨는 자칫 조선족으로 착각할 수 있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그는 우리말을 단 한마디도 할 줄 몰랐다. 그가 말하는 동명의 박가툰 역시 한족 족명의 박씨 마을인 길림성(吉林省) 서란(舒蘭)의 박가툰을 이르고 있었다. 박문룡 씨는 또 얼마 전부터 요녕성(遼寧省) 본계(本溪) 박보(朴堡)의 박씨와 연락을 취하고 있다고 했다. 서란의 박가툰과 본계 박씨 마을의 박씨는 모두 한 계열의 돌림자를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통신매체가 발달하면서 박씨들은 위쳇에 따로 모멘트를 만들었고 한 사람 두 사람 건너 박씨의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실제 위성진 박가툰의 이름은 박씨들의 모멘트에 가입했던 지인이 일부러 기자에게 알려주었다.
박문룡 씨는 누군가 한족 박씨의 연원을 조사한다고 해서 약간 의아했다고 한다. "나중에 이해가 되던데요, 우리 박씨는 중국 백가성(百家姓)에 없는 성씨가 아니겠어요?"
박씨 10대손 박홍신이 집에서 인터뷰를 받고 있다.
박씨가 중국의 한족 성씨가 아니라는 것은 일찍부터 알려지고 있었다. 박문룡 씨는 어릴 때 늘 친구들에게 놀림조로 고려방자(高麗梆子)라고 불렸다고 한다. 고려방자는 연변치(연변사람) 등과 같은 의미이지만, 항간에서는 대개 폄하의 낱말로 쓰인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박문룡 씨는 지금도 족명을 조선족으로 바꾸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한다.
"우린 동성의 박씨가 서로 결혼할 수 없다는 게 한족과 다를 뿐이죠, 그리고 한족과 다른 특별한 음식이나 습관이 따로 없습니다."
길림성과 요녕성에 그들처럼 박씨 마을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불과 몇 년 전이라고 한다. 박씨가 조선반도 고유의 특이한 성씨이며, 본계 박보의 박씨는 족명이 조선족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도 늦게야 알게 되었다.
박홍신 가족사진, 약 20명의 가족으로 늘어났다.
박문룡 씨는 위성진의 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7,8리 떨어진 회이촌(會二村)에 살고 있었다. 이 마을의 옛 이름은 워낙 은혜 혜(惠)를 쓰는 혜이촌(惠二村)이라고 한다. 왜서 지명을 모일 회(會)의 이름자로 고쳤는지는 몰라도 마을은 정말로 이 이름자처럼 500여 가구나 줄레줄레 모인 큰 동네였다.
뜰에서 소에게 여물을 주고 있던 박문룡 씨의 부친이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았다. 부친 박홍신(朴洪信, 80) 옹은 회삼촌에서 태어난 토박이었다. 박홍신 옹의 가족처럼 회삼촌에서 살고 있는 박씨는 7가구 된다고 한다. 위성진 부근의 5,6개 마을에는 박씨가 80명 정도 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혜삼촌과 이웃한 위성진 박가툰에서 분가, 이주하고 있었다.
박홍신 옹은 그때가 1947년 무렵이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박가툰은 시초에 식솔이 60,70명이 되는 한 집안이었지요. 토지개혁 때 여러 마을에 일일이 분가를 한 거지요."
박홍신 옹의 집은 동북의 여느 한족처럼 입구에 부엌을 두고 있었고, 내실은 반은 온돌, 반은 바닥 모양의 구조였다. 바닥의 걸상에 앉아 박홍신 옹 부자와 인터뷰를 했다.
박가툰의 박씨 돌림자는 도합 20자였다. 둘째 할아버지가 박씨 가문에 구전으로 전하는 이 돌림자를 박문룡 씨에게 전수하면서 마음 깊이 기억하라고 신신 당부하더란다. 박문룡 씨가 인제는 세상에 눈이 뜬 18,19세 때의 일이었다.
"돌림자는 모두 이름의 가운데에 쓰는데요. 마지막 자리에 놓지 못한다고 하지요."
얼마 전 박문룡 씨는 위쳇을 통해 박씨의 돌림자를 서로 전하고 비교를 했다. 종국적으로 본계 박씨는 물론 서란 박씨의 돌림자와 첫 글자부터 똑 같았다. 그러나 세 곳 박씨에게 전승하는 돌림자에서 서로 다른 곳도 발견되고 있었다.
박문룡 씨가 흰 종이에 검은 글씨로 위성 박씨의 돌림자를 적었다. "응천대충국/자덕금부옥/문명희성세/진유훈태청(應天代忠國/自德金富玉/文明希盛世/振維勛泰昌)" 등 20개 글자였다. 본계 박씨의 돌림자는 20개가 아닌 30개이며 또 세 번 째 글자가 큰 대(大)이고 다섯 번 째 줄의 글자는 "복위진태창(復偉震泰昌)"이다. 서란 박씨의 돌림자는 열한 번 째 글자까지 위성 박씨의 돌림자와 동일하지만 현존하는 돌림자는 13개 뿐이다.
와중에 이상한 일이 있었다. 제10대손이라고 하는 박홍신 옹의 이름자에는 20자의 돌림자가 들어있지 않았다. 제10대손의 돌림자는 분명 옥의 옥(玉)인데, 이 항렬의 박씨는 모두 박홍신 옹처럼 큰물 홍(洪)을 쓰고 있다고 한다. 선인은 박씨 가문에서 하늘처럼 따르던 돌림자의 글자를 웬 일인지 급작스레 바꾼 것이다.
일행 중 누군가 그의 어림짐작을 내놓았다. "자료를 보니 마을 남쪽의 호란하(呼蘭河)가 예전에는 해마다 장마철이면 홍수가 졌다고 하던데요, 그때 박씨 선조들은 이맘때 크게 해를 입은 홍수를 기억에 담고 이름자에 넣은 게 아닐까요."
호란하는 만족어로 굴뚝이라는 뜻이라고 '흠정성경통지(欽定盛京通志)'가 좌증(左證)한다. 청나라 때 북방에서 비롯되는 침략을 막기 위해 호란하 기슭에 늘 병사를 주둔했으며, 병사들이 밥을 짓는 굴뚝이 수풀처럼 일떠서서 속칭 '굴뚝의 수림'을 만들었던 것이다. 예전에 장마철인 7,8,9월이면 늘 큰물이 졌으며 마을은 드문드문 물난리를 겪었다.
옛날의 이런 기억은 박홍신 옹의 해묵은 목궤에 하나 숨어 있었다. 민국(民國, 1912~1949) 연간의 옛 가계도(家系圖)를 박홍신 옹이 소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못한 듯 족보는 먼지를 풀씬 날리고 있었다.
"하마트면 까맣게 잊고 내놓지 못할 뻔 했는데요, 이 족보는 9대손 할아버지 때 전승했다고 합니다." 박문룡 씨는 부친의 허락을 받아 가계도를 객실에 옮겨간 후 우리 앞에 쭉 펼쳐놓았다.
"후대에게 전하는 소중한 족보이지만요, '문화대혁명' 때 화근이 될까봐 많은 박씨 집안에서 불살라 버렸대요."
가계도는 제1대손인 응당 응(應)의 돌림자의 시조부터 시작하여 제9대손인 넉넉할 부(富)자 돌림자의 선인까지 이르고 있었다. 제9대손은 가계도를 만든 후 새로 늘어난 사람의 이름을 빨간 조각의 종이에 써서 따로 붙이고 있었다.
박가툰을 만든 선조는 돌림자 덕의 덕(德)을 이름자에 쓰고 있는 7대손이었다. 그러나 가계도만 보아서는 7대손이 어떻게 되어 대륙 북쪽의 이 오지까지 찾아왔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본계 박보의 박씨처럼 확실히 한 뿌리를 두고 있으며 역시 박보의 박씨처럼 명나라 말, 청나라 초에 만주 8기의 일원이었다고 유추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실제 박문룡 씨도 박가툰의 박씨는 남쪽의 요녕성에서 건너왔다는 것을 구전으로 들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위성 박가툰이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잘 모른다고 하면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일행은 함께 돌림자의 항렬에 따라 연대를 추정했다. "한 세대를 25년으로 잡으면 19세기 중반쯤 이 고장으로 온 것 같은 데요."
마침 이 무렵부터 일명 '틈관동(闖關東)'이라고 하는 동북 개척이 시작되고 있었다. '틈관동'은 청나라 (同治, 1862~1875) 연간부터 민국 시기까지 장성 남쪽의 백성들이 생계를 위해 동북에 진출한 것을 말한다. 그때 박씨가 남쪽 지역의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대륙의 이 북쪽 지역까지 진출한 것 같다는 얘기이다.
미구에 쑥대밭에 묻혀 있던 북림자(北林子)에 청(廳) 소재지가 들어서고 '수화'라고 이름을 짓게 된다. '수화'는 일명 '상스럽고 안전하며 순조롭다'는 뜻이며 또 만족말로 쑥대라는 뜻이라고 해석된다. 지명에서 볼 수 있듯 개척민이 찾는 그런 최적의 땅이었다.
흑토의 땅은 그처럼 남쪽의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있었다. 박가툰은 특이한 박씨 마을이었지만 그렇다고 흑룡강성에 나타난 유일한 한족 박씨의 마을은 아니었다. 동쪽 천리 밖의 밀산시(密山市) 승자하향(承紫河鄕)에도 동명의 박가툰이 나타나고 있었다. 10년 전에 박가툰을 답사, 조사했던 밀산시 전 부시장 맹고군(孟高軍) 씨에 따르면 박씨의 두 형제가 1925년경 하남성(河南省)의 신향(新鄕)에서 밀산으로 이주했다. 그들은 위성 박가툰의 박씨처럼 한족말만 할 줄 알았고 예의나 음식, 풍속 등 어디서나 조선족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이 두 형제 역시 오랜 옛날 대륙에 이주해서 살았던 박씨의 후손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 그러나 족보나 구전되는 가족사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선조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미스터리로 되고 있었다.
거두절미하고, 7대손에서 시작된 박가툰은 마을 부근의 저지대에 박씨들의 무덤을 만들고 있었다. 선조의 옛 무덤은 박씨 가문의 장손이 무덤지기로 있다고 한다. 박문룡 씨의 말에 따르면 현재 이 장손은 12대손으로 밝을 명(明)의 돌림자를 이름으로 쓰고 있었다. 기왕 말이 났으니 망정이지 현재 박씨는 돌림자 성할 성(盛)의 돌림자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박문룡 씨의 안내를 받아 박가툰 현지를 찾았다. 점심나절인데도 마을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박씨의 집에는 아예 큰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농사철이라서 다들 밭에 나가 있는 것 같다고 박문룡 씨가 나름대로 추측을 했다.
그러면서 박문룡 씨는 뭐가 맹랑한지 땅바닥에 한숨을 길게 떨어뜨렸다. "우리 박가툰에 박씨 집안이라곤 현재 이 집밖에 남지 않았지요."
한적한 마을에는 한여름을 재촉하는 듯 7월의 땡볕이 쨍쨍 내리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