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강신문=하얼빈)답사팀이 창립되여서 이어지는 네번째 답사길, 우리는 거의 두시간 비속을 걸어 길림성 룡정시 승지촌에 이르렀다. 포장도로 오른편 작은 언덕에 “15만원 탈취사건”기념비가 보였다. 10년전보다 터를 많이 가꾸었다. 바위로 앞부분을 높게 쌓았고 주변은 세멘으로 처리되고 오르는 계단도 만들었다. 15만원 탈취사건 지점에 대해 여러가지 설이 란무하지만 룡정3.13기념사업회(회장 최근갑)는 여러 사료를 종합, 분석한 토대에서 거사기념비를 세웠다. 사건발생 정확한 위치라 할수는 없으나 대략 범위는 가늠할수 있는 곳이다.
사건경위에 대해서도 각이한 기술이 있지만 해삼위에 건너간 4명 의사중 유일한 생존자 최봉설씨가 구쏘련에서 연길에 와 와룡동에 두고 간 맏아들과 상봉하면서 사건의 진상은 진실에 한걸음 가까와졌다. 1919년 간도지역 유지들이 군자금을 모아 당시 국민의회 김하석군사부장과 신민단 김규면단장에게 로씨야군 총 2000여자루와 수십만발의 탄약 구입을 의뢰했으나 수송도중 로씨야의 한 섬에서 배가 침몰하는 불행을 당했다. 김하석은 같은 해 9월 철혈광복단 최봉설에게 빠른 시일내 군자금을 마련할것을 지시했다. 이것이 15만원 탈취사건발생 배경이다.
사건의 주인공은 7명 영웅이다. 윤준희는 서전서숙 출신으로 영신학교 교원, 임국정과 최봉설은 와룡동 창동학교 출신으로 라자구 군관학교를 같이 다녔다. 최봉설은 명동중학교에도 다녔다. 명동에 이주한 4대 가문중 한분인 김하규 장로가 최봉설의 장인이니 문재린(문익환목사의 부친)과 최봉설은 동서가 된다. 박웅세는 명동학교 출신, 한상호는 명동중학교를 졸업후 라자구 군관학교를 다녔다. 그는 문병규 장손인 문치헌의 맏사위이며 문재린에게는 륙촌매부가 된다. 결혼날자까지 받아놓고 거사에 가담했다. 전홍섭은 조선은행 회령지점 룡정출장소 직원으로서 웃 5인에게 정보를 제공한 사람. 김준은 출신학교가 불명하나 거사 당일 호위순사를 저격하고 돈을 빼앗는데 참여한 일원이다.
처음에 영웅들은 룡정은행을 치려고 계획했다가 전홍섭의 건의를 받아들여 계획을 바꾸었다. 회령에서 돈이 각처로 배정되면 룡정으로 오는 도중 손을 쓰기로 했다.
최봉설과 한상호가 내놓은 송아지 두마리로 이들은 해삼위에 가 권총 여섯자루와 탄약 그리고 수류탄 몇개를 샀다.
회령으로부터 1920년 1월 4일에 길회선(길림과 회령을 잇는 철도) 부설비용 30만원을 호송한다는 소식이 왔다. 동량리어구 사건지점에 도착한것은 저녁 8시쯤, 11마리의 말을 탄 호송대, 4마리 말 등 량쪽에 가죽가방이 걸쳐있었다. 습격에 성공한 윤준희와 최봉설이 가방을 찬 말을 하나씩 타고 떠났고 임국정과 한상호가 나머지 두마리를 맡았으나 총소리에 놀란 말이 용을 쓰는바람에 올라타지 못하고 급기야 놓치고말았다. 이 두마리에 실려있던 돈이 15만원이였다. 30만원 거사가 될번했었다.
돈을 지닌 네 사람은 나중에 해삼위에 도착했고 무기구입을 위해 임국정이 이전부터 알던 독립지사 엄인섭과 련락했으나 엄씨는 이미 변절자였다. 1920년 1월 31일 밤, 일본헌병 1개 소대가 이들 숙소에 덮쳤다. 최봉설만이 결사적으로 뛰쳐나와 도망에 성공했다. 어깨와 발꿈치에 총상을 입었고 맨발에 동상까지 입으면서 겨우 피신했다.
세명의 의사는 1921년 8월 25일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당시 윤준희는 30살, 임국정은 27살, 한상호는 23살의 젊은 나이였다.
당시 일화 15만원이면 5000여자루 소총을 살수 있었다고 한다.
15만원 탈취사건 5개월 뒤 봉오동전투가 있었고 그후 4개월 뒤 청산리대첩이 있었다. 30만원 탈취가 성공했더라면, 한발 물러나 15만원 탈취로 무기구입이 성사되였다면 만주의 반일무장투쟁은 전반 조선민족 항일무장투쟁의 판도를 바꿔놓았을것은 물론이고 당시 설립 9개월 남짓한 상해림시정부 항일정책기조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을것이며 이로 인해 무장투쟁이 주된 로선으로 채택되고 상해림시정부를 만주에 옮기지 않을것이라고 그 누가 장담하랴?!
력사는 이렇듯 무정하고 간발의 차이로 뒤바뀌여지는 법이다.
한편 엄인섭은 장사라고 불렸던자로서 원산에서 손영극이란 사람과 랭면을 같이 먹으며 힘자랑을 하다가 권투깨나 하는 손씨의 주먹 한방에 복부를 맞고 그것이 원인이 되여 병들어 죽었다. 손씨는 “너, 이새끼 왜놈 앞잡이지”하는 괘씸한 생각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때렸다 한다. (《동북지역 독립운동사》, 동북동지회 엮음, 코람데오, 2009. 105페지)
교수대의 이슬이 되여 사라진 7명 영웅중 세 사람의 시체는 서울교회 은평면 신사리 위사래골 산기슭에 가매장되였다. 1963년 세의사에게 건국 공로훈장 단장이 추서되였고 1964년 12월 세 의사 유해는 애국자묘지에 모셔졌다. /연변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