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중학교 로 어문교원들이 소개한대로 산골마을 동천촌에 사는 성이 고씨라는 할머니는 확실이 보통 사람들이 모르는 어휘를 많이 장악하고 있었다. ‘열두대문 큰집’의 문만 해도 ‘솟을대문’, ‘평대문’, ‘일각대문’, ‘협문’, ‘이문’하며 들어도 못본 문 이름들이 입에서 줄줄 나오는가 하면 규수들이 사용하는 규방의 물건만 해도 ‘화초장’, ‘자개장’, ‘버선장’, ‘구리거울’, ‘빗접고비’, ‘화각’하며 각기 모양들은 어떻게 생겼고 어떻게 사용한다는것까지도 보는듯이 말해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결혼, 묘제, 장의에서 쓰는 말이나 어휘들까지도 백일호와 최윤희는 숱해 귀동냥을 했었다.
그렇게 그 고씨라는 할머니네 집에서 하루 밤 묵고 둘은 이튿날 아침, 현성으로 돌아오려고 했는데 고씨할머니와 셋이서 아침식사를 하다가 백일호의 입에서 이번에 다니면서 수확은 크지만 민간이야기는 별로 수집 못했다는 말이 나왔다. 그런데 민간이야기란 말에 그 고씨 할머니는 자기 집 령감은 민간이야길 할라치면 열흘 낮, 열흘 밤을 해도 했던 소리가 전혀 없이 그냥 새 옛말만 나온다는것이다. 이 댁의 바깥로인은 생산대의 인삼밭을 지키느라 마을에서 40리 떨어진 산속에 들어가 있다는것은 어제오후 이 댁에 들어설 때 벌써 들어서 아는 일이였다. 그렇지 않아도 이 할머니를 만난 일이 이번 길에선 대단한 수확이라고 흐뭇해하는 판인데 바로 이곳에 민간이야기 ‘고수’까지 있다고 하니 백일호는 호기심이 부쩍 동했다.
“어쩔가? 그 로인을 한번 만나러 갈가?”
“반장 마음대로 결정하세요. 저야 그저 반장 따라 다니기만 하면 되니깐요.”
“그럼 여까지 왔던 바에 그 로인을 찾아 가기오!”
그래서 아침을 먹고는 현성으로 떠나려던 백일호와 최윤희는 생각을 고쳐 민간이야기를 수집하러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기로 작심했다.
길에서 허기나면 먹으라고 할머니가 만들어주는 누렁지 두덩이에 삶은 감자 몇 알에, 또 산속에 있는 로인에게 드리려고 마을 합작사에 가서 산 근들이 소주 두병에, 그밖에 손전지며 낫이며 성냥이며 할머니가 가르치는 대로 두루두루 준비할 물건들를 다 챙기자 백일호와 최윤희는 길을 나섰다.
때는 박달나무도 얼어터지고 소대가리도 쩡쩡 갈라진다는 북방의 매서운 정월이라 병풍처럼 둘러싸인 산들에는 기승을 부리는 강추위에 발가벗은 앙상한 나무들이 몸부림치고 있었고 눈이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좁고 굽은 산길에는 칼바람이 마구 채찍질 하는듯 윙-윙- 아츠러운 소리를 냈다.
가죽털모자에 누런색 군대외투를 입은 백일호와 검은색 짧은 반외투에 빨간색 털실목도리로 눈만 내놓고 머리부터 온 얼굴을 꽁꽁 동인 최윤희는 나란히 그런 산길을 걷고 또 걸었다. 어느 사이 새하얀 성에가 두 사람의 눈섭마저 새하얗게 만들어 놓았다. 그렇게 반시간 남짓 걸으면서도 두 사람은 여직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그저 서벅서벅 눈이 발에 밟히는 소리만 들으며 묵묵히 걷기만 했다. 이제는 옹근 3년이나 한 교실에서 얼굴을 마주보며 같이 공부를 해왔어도 최윤희가 동창들과 휩쓸리려 하지 않고 늘 혼자서 외진 곳을 찾는 괴퍅한 성격이다 보니 반장인 백일호도 유독 최윤희 하고만은 반급의 사무적인 말밖에 일상의 다른 말은 거퍼 몇마디 주고받지 못한 사이였다. 그랬으니 벌리현에서 장흥으로 떠난 민철규와 리두성이도 최윤희를 무작정 백일호에게 떠맡긴것도 리해가 가는 일이였다.
갑자기 백일호의 왼쪽옆에서 한발 사이 두고 따라오던 최윤희가 키드득 하고 혼자 웃음소리를 낸다.
“왜 웃는거요?”
“아무것도 아니예요.”
“윤희는 집에 형제 자매들이 많소?”
최윤희의 웃음소리는 두사람이 대화를 할수있는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그 웃음소리를 빌어 백일호는 말을 걸기 시작했다. 혼자라면 몰라도 둘이서 먼길을 같이 걸으면서 그냥 묵묵히 걷기만 하자니 마음이 갑갑해나고 힘은 곱절 더 들었던것이다.
“제가 맏이래요.”
“그럼 밑에는 동생이 몇이나 있소?”
“저는 또 막내래요.”
“?... 그럼 집에서 외동딸이란 말이구만.”
“그렇게 생각해도 될것 같아요.”
“그럼 부모님들은 무슨 사업을 하오?”
“저의 신상은 더 묻지 말고 반장의 이야기나 좀 해요.”
“내 이야길? 그래 어떤걸 하라오?”
“아무 거나...”
실은 최윤희도 인적이라고는 전혀 없는 깊은 산길을 그저 묵묵히 걷기만 하자니 적막감이 가슴을 조이고 있었던 터였다.
“반장은 련애를 해봤어요?”
최윤희는 한발 다가와 백일호와 나란히 서면서 고개들어 백일호의 얼굴을 슬쩍 쳐다본다.
“련애를 해봤지! 대학 오기전에 고향마을에서 어떤 처녀하고 2년이나 련애를 하였지...”
“참, 솔직하네요. 그럼 반장이 련애를 할 때 제일 재미있던 일, 딱 한가지만 얘기해 봐요.”
“한가지만 이야기하라? 그래 하지!... 내가 살던 마을학교 운동장주위엔 대들보 같이 크고 높이 자란 백양나무들이 많았는데 여름철 저녁이 되면 그 나무밑에 숱한 마을사람들이 모여서 한담을 하였소. 그런데 둘이서 사람들에게 들키우지 않고 동구밖으로 나가 련애를 하려면 반드시 그 백양나무 바로 옆에 있는 큰길을 지나가야 했는데 그것이 큰 걱정거리였단 말이오. 그래서 내가 머리를 짜며 궁리해낸것이 그 처녀가 신은 장화엔 벽돌장두께만한 나무토막을 깔고 키가 남자들처럼 커 보이라고 말이오. 머리엔 초모자를 씌우고 어깨엔 낚시대를 메게 하고 입에다는 담배를 물고 연기를 풀풀 뿜으며 그곳을 지나게 했소. 나도 담배피울줄 모르지만 그 때만은 담배를 벅벅 빨면서 둘이 걸어가니 남자와 녀자라고 의심하는 사람들은 하나도 없었단 말이오.”
“호, 반장 머리가 참 좋네요. 그 처녀도 키가 꽤 컸던 모양이지요?”
“키야 녀성들 보통 키였지. 윤희보다 많이 작으니까.”
“그런데 반장은 무엇때문에 그 처녀와 그만두게 되였어요? 반장이 대학으로 가게 되여서요?”
“아니, 그건 윤희가 모르고 하는 소리요. 내가 그만둔것이 아니라 그 처녀가 나를 차버린거였소.”
“이- 거짓말!...”
“진담이라니까. 그 처녀는 마을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는데 77년도 문화혁명후 첫해 대학시험에 길림대학에 붙었소. 나도 같이 시험을 쳤는데 난 미역국을 먹었구. 난 이듬해 다시 시험을 쳐서야 겨우 지금 우리 학교에 온거요.”
“호- 믿어도 되겠죠?”
“믿고 안 믿는건 윤희 문제고 난 가감 없이 실말을 했으니까.”
과연 둘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하며 길을 걸으니 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몇 발짝 앞에서 꼬리 긴 황가리 한 마리가 길을 가로 지나가고 눈우에서 무엇을 쪼아먹던 꿩들이 인기척에 놀라 날개를 푸덕거리며 날아 나는것도 백일호와 최윤희는 이야기에 도취되여 별로 딴 눈길을 팔지 않았다.
“그럼 그 얘긴 한 페지 접어놓고... 반장은 농촌에서 몇년 일했어요?”
“만 5년!”
“그럼 이번엔 5년간 농촌에 있으면서 반장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일, 하나만 이야기해봐요.”
“허허, 가장 인상 깊었던 일이라면 마을에서 닭을 훔쳐먹던 그 일이지...”
“어머! 반장은 농촌에 있을 때 마을에서 입당도 했고 단지부서기도 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인상이 더 깊은거 아니겠소?... 우리 마을엔 명태라고 하는 소꿉친구가 있었는데 어릴적부터 아버지가 없이 어머니하고 남동생하고 셋이서 살았소. 그래서 우에 어려운 사람 없는 명태네집은 어려서부터 우리 몇몇 또래들의 놀음의 소굴로 되였댔소. 머리가 다 큰 청년들이 되여서도 말이오. 명태는 마을 민병련 련장이면서도 문예선전대에서 손풍금수로 있었고 나는 그때 단지부서기에 문예선전대 대장을 겸하고 있었소.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잘 먹지들 못했으니 깊은 밤중까지 춤노래 련습을 하는 선전대 일을 거들고 나면 배가 허기지고 썰썰 해서 견딜수가 없었소. 그러던 어느날 밤, 우리 몇은 문예선전대 련습이 끝나자 또 명태네 집에 모였는데 누군가 닭을 훔쳐먹자고 제의 했던거요. 가불간 모두들 동의해서 저마끔 어둠을 타고 동네로 닭을 훔치러 나선거요. 이 키꺽다리 나도 명태네 집에서 나왔지. 그런데 음모야 함께 짰지만 정작 누구네 집 닭굴에 들어가 닭을 훔치려고 생각하니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더구만. 일단 발각되는 날이면 청년들은 물론, 온 동네 사람들 앞에서 얼굴을 못 쳐들건 불보듯 뻔한 일이라 호박쓰고 돼지굴에 들어갈 일을 어찌한단 말이오. 그때 별안간 머리에서 묘한 궁리 하나가 떠오르더구만. 우리 집 닭이나 명태네 집 닭을 훔치면 누구한테 들키워도 아무 탈 없겠다는 생각 말이오. 그런데 우리 집은 마을 제일 동쪽에 있어 한밤중에 우리 집 닭을 들고 온다해도 누가 보면 의심을 살것 같았소. 그래서 명태네 집에서 나와 명태네 닭굴에 있는 닭을 눈을 질끈 감고 손이 닿는대로 두 마리 쥐고 목을 쓱 비튼거요. 내가 명태네 집 부엌에다 닭 두마리를 메쳐 놓은지 한참 되니까 명태를 포함해서 닭훔치러 나섰던 친구들이 숨을 헐떡거리며 돌아오고들 있었소. 그런데 내가 ‘훔친’ 닭 두마리를 내놓고는 어느 한 친구도 닭을 훔쳐오지 못하고 모두가 주인집에 발각되여 저마끔 쫓기여 다니다가 요행 숨어서 오는 길이였다오. 그날 저녁 우리는 그 닭 두마리를 가마에 푹 고아서 배를 두드리며 잘 먹었지. 허허, 물론 이튿날엔 명태 어머니가 야단 치셨고 우린 우리대로 배를 끌어안고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