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자식은 옛날부터 비유짝은 떡판이였어...”
동창들이 우습다고 야단인데 강현수의 입에서는 ‘태양도에서’의 노래 2절이 또 흘러나온다...
행복의 열광 젊은 피 끓게 하고
달콤한 희열 처녀 얼굴에 피였네
참된 사랑을 안고
아름다운 꿈을 안고
우리는 태양도에 왔다네
우리는 태양도에 왔다네
행복한 생활은 로동으로
달콤한 열매는 땀으로
벗들아 우리 함께 슬기와 힘 모아
미래를 만들어 가자
더욱 아름답고 찬란할 미래를!
... ...
멋지게 ‘태양도에서’를 부른 강현수가 그 기타수를 한번 뜨겁게 안아주고 돌바위우에서 내려오자 동창들은 물론 삼삼오오 흩어져 앉아서 노래를 귀담아 듣던 유람객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저어보인다. 실로 아름다운 선률과 가락은 인종도 국경도 따로 없는듯 싶다.
“내가 돌바위우에 올라서서 이 쉼터를 굽어보노라니 무슨 생각이 불쑥 들었는지 알아?”
“무슨 생각을 했는데?...”
“이 태양도가 지구덩어리 같아 보이고 나는 마치 유엔 사무총장 반기문이 된 기분이였어.”
“반기문은 너무 멀고 방금 누가 현수는 여기 태양도에 와서 가이드로 돈을 벌라고 하던데 내 보긴 자넨 저녁마다 나이트클럽 같은데 다니며 노래를 부르면 진짜 돈을 벌것 같아.”
“현수야, 아마 너의 부모님 중엔 노래 잘 하시는 분 있었겠구나.”
“우리 어머님이 노래야 잘 하셨지. 흘러간 옛 노래는 모르는 곡 거의 없었거든. 그래서 문화대혁명땐 아버지는 감옥에 가고 어머니까지도 ‘남조선 자본주의’ 노래를 부른다고 고깔모자를 쓰고 마을에서 투쟁을 맞았어... 참, 우리 어머니가 생전에 제일 좋아한 노래가 ‘바다가 륙지라면’ 이 노래였어. 바다가 륙지라면~ 바다가 륙지라면~ 일찍 열다섯살 나던 해에 부모형제들을 한국 경상도 두메 산골에 두고 우리 아버지를 따라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오다보니 혈육이 그리워서 한평생 그 노래를 많이 부른것 같애...”
이렇게 말하는 강현수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핑 고이고 있었다. 과연 예술기질이 있는 사람은 감정이 풍부해 남달리 웃음도 많고 눈물도 헤픈 모양이다...
초행길
백일호는 태양도 유람을 가지 않았다. 대학총장회의를 마치고 점심때가 되여 돌아온 그는 야식장에서 동창들과 함께 점심을 먹을 때 오후엔 급한 문건 하나를 작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거짓말이였다.
백일호는 지금 별무리호텔 3층 제일 서쪽에 위치한 자기의 독방에 혼자 있다. 동창들이 풍경구유람을 떠날 때부터 남으로 향한 창문에 마주서서 먼 하늘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그는 오른쪽으로 줄을 세워 눕혔던 머리가 좌우로 헝클어져 있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손이 자꾸만 머리에 올라가 번져놓고 긁어놓아 그렇게 되였다...
오늘 오전 총장사무회를 마친 그는 곧추 연구생 관리처에 가서 박화학생의 당안을 들추어보았다. 뇌리를 치며 일어서는 예감이 그를 그리로 발걸음을 옮기게 했던것이다.
미상불 백일호는 박화학생의 당안에서 중요한 단서 하나를 발견했다. 박화는 중학시절에 공청단에 가입하고 성 3호학생으로 되였었는데 당시의 이름은 박일화라고 적혀져있고 북방사범대학에 입학해서부터 박화로 이름이 변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최윤희의 조카애라는 박화와 최윤희가 어릴때부터 키워왔다는 박일화는 분명 한 애가 틀림없었다.
백일호는 그 이름 하나로 서뿔리 결론을 내릴수가 없었다. 그는 돌아올 때 박화학생과 또 다른 조선족녀학생의 2촌짜리 증명사진 두장을 들고 왔다. 강현수는 최윤희가 키운 애를 잘 알고 있으니 강현수의 반응을 보려고 그랬다. 하긴 그럴만한 리유도 있었다. 며칠전에 강현수와 둘이 얼굴을 맞대고 동창모임의 구체적인 스케줄을 연구할때 강현수는 일본에서 박사공부를 하고있는 자기 형님네 아들이 방학이 되여 돌아왔는데 서른이 다된 애가 아직 총각이라면서 북방사범대학에 훌륭한 조선족 처녀애가 있으면 어떻게 좀 소개해달라고 백일호에게 부탁한적 있었던것이다.
백일호는 야식장에서 점심을 먹고 모두들 호텔로 돌아와 휴식을 할 때 강현수를 자기 방으로 불렀다. 그는 가지고 온 사진 두장을 강현수앞에 내보이면서 둘중 어느 애가 강현수의 조카와 마주 세우면 맞춤 하겠냐고 넌지시 물었다.
백일호의 속셈을 알리 없는 강현수는 사진 두장을 손에 들고 살펴보는데 별안간 박화란 처녀애의 사진에 가서는 두눈이 화등잔처럼 커진다.
“걔가 누군지 알어?”
“누군데?...”
“자네가 우리 집사람한테 말했다는 최윤희의 조카애야. 이름은 박화구...”
“얘가 윤희 조카라구?”
강현수는 눈알이 앞으로 확 쏟아질 지경으로 놀라와하는 기미다.
“자넨 최윤희의 조카를 본적 있어?”
“아니, 며칠전에 그런 조카가 있다고 윤희가 전화에서 하는 말을 들었을뿐이야...”
“그런데 사진을 보는 눈길이 아주 익숙한 얼굴을 들여다보는것 같네.”
백일호는 아침에 동창들이 숲에 들어가 ‘보배’를 찾을 때 강현수와 최윤희가 하던 말, 최윤희가 엄마라고 부르는 박일화를 어릴적부터 키워왔다는 그 말은 여기에서 꺼내고 싶지 않았다. 최윤희가 자기가 키워온 박일화란 애는 일본에 가서 공부한다고 말하는걸 들어서는 분명 강현수에게도 많은 비밀을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였다. 그래서 “이 애가 바로 네가 어릴때부터 보아온 박일화 맞지?”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바투 들이대지도 않았다. 다만 강현수가 이 사진을 보고 어떤 반응일가를 살펴보는것이 목적이였다. 그 목적의 화살은 예견대로 적중히 과녁을 맞추고 있었다.
“이 사진을 내가 가져가 일본에서 온 우리 조카애를 보이면 안될가?”
“그건 안되지! 학생 본인들의 동의 없이 자네한테만 보이려고 몰래 가져온건데 공연히 날 인권침해 죄를 범하게 해서야 어디 되겠나?”
점심휴식시간에 강현수와 있은 일이다...
창밖을 내다보는 백일호는 생각할수록 가슴이 조이고 등골이 서늘해난다.
너무도 급작스레, 너무도 놀랍게 덮쳐드는 현실은 백일호의 헝클어진 머리처럼 질서정연하던 두뇌의 신경을 뭉청뭉청 뜯어다 이리저리 뒤바꿔 놓는듯 싶다.
(최윤희?... 어제 오후 이 곳에 도착하자 비밀리에 누구에겐가 핸드폰을 치더니 급급히 그 사람 만나러 나갔다. 그것은 한방에 든 안송옥의 말이다. 그런데 장소는 송화강공로대교 건너편에 있는 망강호텔이고 만난 사람은 다름아닌 박화학생이다. 그것은 왕주임이 직접 목격한 일이다.
그런데 왜서 동창들의 눈을 속혀가며 비밀리에 만나야만 했는가? 왜 강현수한테도 같은 학교 교원이 돈지갑을 잃어버려서 려비를 주려고 기차역으로 나갔었다고 거짓말을 했는가?
당안을 보면 박화가 바로 최윤희가 키운 박일화다. 그런데 왜 자기가 키운 애는 일본에 갔다고 하는건가? 강현수도 최윤희가 전화로 말했다는 조카애는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지만 사진에서의 그 애는 얼굴이 익숙한 애라고 말하는것만 같았다. 일본에 가지 않고 여기 있었구나 하고 놀라는 눈길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한 애를 왜서 두 애로 만들어 놓는건가? 그렇다면 키운애가 아니라 최윤희가 낳은 딸?...최윤희가 낳은 딸이라면 그 애의 아버지는?...)
백일호는 지금 아슬아슬한 살얼음을 디디면서 땀을 움켜쥔 주먹으로 추억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 ...
그것은 1981년 2월 하순, 백일호가 대학 3학년 첫 학기를 보내고 두번째 학기를 맞는 그해 겨울방학에 있은 일이다.
겨울방학기간 78년급 조문반 학생들은 4~5명씩 조를 무어 전 성 조선족향촌을 다니며 방언, 사전에 오르지 않은 어휘, 민간이야기를 수집하게 되였다. 그때 조문반에서 반장이였던 백일호는 리두성(맥주병밑굽), 민철규(이미 세상 떴음), 최윤희로 무어진 한조를 거느리고 경상도 사람들로 모여 사는 탕원현 탕왕향과 함경도 사람들로 모여 사는 화천현 성화향을 거쳐서 벌리현으로 가게 되였다. 벌리현엔 11개 조선족마을이 여러개 향에 널려져 있었는데 성화향처럼 대부분 북선사람들이여서 함경도방언은 별로 더 조사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현조선족중학교의 로 교원들한테서 알아보니 현성에서 50여리 떨어진 장흥촌이란 마을에 판소리를 잘하는 로인이 한분 계시고 현성에서 남쪽으로 20여리 상거한 동천이라고 하는 산간마을에는 또 옛날 서울에서 ‘열두대문 큰 부자집’의 머슴으로 살았던 한 할머니가 있는데 민간에서 모르는 고풍스러운 어휘들을 숱해 장악하고 있다는것이였다. 학교에서 떠날 때 수집 조사 시일은 두주일안팎으로 정했었는데 백일호네가 탕왕, 성화를 거쳐 벌리현에 이르렀을때는 이미 학교에서 나온지 열닷새째나 되였었다. 당장 학교로 가서 새학기 개학을 맞고 공부를 시작해야 했다. 그래서 수집시간을 단축하려고 네사람이 두조로 나누어 가기로 했는데 민철규와 리두성은 무작정 최윤희를 반장 백일호에게 떠맡기며 둘은 장흥촌으로 떠난다고 길을 나섰다. 그래서 백일호는 최윤희와 함께 동천촌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