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녀동생 안성여의 외손녀 김영금씨를 찾아
(흑룡강신문=하얼빈)= "외할아버지의 업적은 천추에 길이 빛날것이다.안씨가문의 후손으로 안중근의사를 기념하기 위해 그동안 로심초사한 모든분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일가친지들이 세계각지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는 형편이여서 아쉬운 마음도 있지만 그 어디서든지 안씨가문의 후손된 긍지로 살고 있을것이라 믿어의심치 않는다."
이는 안중근 의사의 녀동생인 안성여(姓汝)녀사의 외손녀 김영금(72세)씨가 취재팀에 들려준 이야기다. 할빈체육학원을 졸업하고 핸드볼국가대표까지 지냈다가 부상으로 은퇴했다는 김영금씨(국가1급운동건장)와 반평생 군에서 병기전문가로 활약했다는 남편 오일룡(72세)씨는 할빈시 향방구 왕조가 41번지의 한 아파트단지에서 청빈하지만 행복한 만년을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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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금씨와 남편 오일룡씨가 안중근관련자료를 설명하고 있다./림영빈기자 |
운동선수출신답게 성격이 활달한 김영금씨는 장농속에 넣어두었던 관련자료와 옛사진을 꺼내가며 가족사를 소상히 들려주었다. 안중근의사는 부모 안태훈과 조마리아의 3남1녀중 맏이,그 다음으로 녀동생 안성여, 남동생 안정근, 안공근이 있었다. 일부에서는 안성여가 3남1녀중 막내라는 설도 있지만 김영금씨는 외할머니가 둘째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강조했다.
안성여녀사는 오빠인 안중근 의사가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격사(1909년 10월26일)한 이듬해에 어머니 조마리아 녀사, 동생인 안정근, 안공근 일가와 함께 두만강을 건너 북만주로 망명을 떠났다.안성여 녀사는 남편인 권승복(항일운동가,1920년 사망)과의 사이에 1남 3녀를 출산,차례로 권두선,권계선,권헌(권중일이라고 불렀음),권봉선씨이다. 김영금씨는 안성여녀사의 차녀 권계선씨의 자녀 8남매중 다섯째이다. 김영금씨의 말에 따르면 안중근의사가 려순감옥에 있을때 안성여녀사가 권계선씨를 데리고 면회를 갔었다고 한다. 관련자료가 없어 립증할수 없지만 면회갔을때 안중근의사가 녀동생인 안성여녀사에게 "사람이 멀리 생각지 못하면 큰일을 이루지 못하느니라"고 말했다고 피로했다. 당시 5세가량밖에 안되였던 권계선씨지만 총기가 좋아 외삼촌인 안중근의사를 면회갔을때 일본옥졸들이 회유하려고 자기네 모녀(안성여씨와 권계선씨)에게 대접을 잘해주었다는 일들을 기억해서 나중에 자녀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일본군의 철저한 감시속에 안중근의사 가족들은 러시아 연해주, 연변과 흑룡강 수분하, 동녕, 의란, 벌리, 할빈 등 여러지역을 전전하며 피신하다보니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였다. 권계선씨의 전남편인 리씨가 항일운동을 하다가 사망한후 권계선씨는 안중근의사의 조카인 안봉생(안중근의사의 사촌동생 안장근의 아들)의 소개로 김한응씨에게 재가해서 김영금씨 형제자매들을 낳았다고 한다. 김영금씨는 어머니 권계선씨로 부터 안성여씨를 비롯한 안중근의사 일가친지들이 수분하, 동녕, 연수, 의란 등지를 돌면서 피신하다가 현재 할빈 남강구 담배공장 부근의 낡은 건물에 모여 살면서 삯빨래를 해서 힘든 생활을 영위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밝혔다. 안성여녀사도 안중근의사의 영향으로 일본군의 눈을 피해가며 몰래 항일운동을 하였다고 밝혔다. 안성여녀사가 일본군에 끌려가 9일동안이나 감금당하면서 독립군의 행적을 일러바치라고 갖은 혹형을 받았지만 일언반구도 말치 않아 나중에 하는수 없이 석방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이는 후날 안성여녀사의 며느리이자 항일지사인 오항선(권헌씨 부인)의 증언에서도 밝힐수가 있었다. 권계선씨가 어머니인 안성여녀사와 혜여진곳은 흑룡강성 벌리현 소재지였다고 한다. 1940년대 초반 당시 안성여녀사는 아들 권헌씨, 며느리 오항선씨를 데리고 하북성쪽으로 피신갔다고 했다.
김영금씨가 후날 알게된 이야기로는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한국림시정부의 도움으로 안성여녀사는 아들 권헌씨가족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갔다. 안성여녀사를 '누님'이라고 불렀다는 리승만 한국대통령과 백범 김구주석의 도움으로 한국 서울 청파동과 쌍림동 일대로 거처를 옮겨다닌 안성여녀사는 1951년 6월25일 전쟁이 터지자 부산으로 피란했다. 권헌씨의 딸인 권혜영씨는 "어릴적 서울 명동성당에 할머니를 따라 몇번 다녔고 아현동으로 기억되는 안중근 의사의 외동딸인 안현생의 집에 감자 캐러 간 일이 어렴풋이 기억난다"고 말했다. 당시 부산시 영도 봉래동의 두칸짜리 가옥에서 생활하던 안성여녀사 가족은 같은 집에서 생활하던 다른 피란민이 불편해하자 부산시 영도 신선동 2가2번지 산비탈로 거처를 옮겼고, 이곳을 새 본적으로 등록했다.안성여녀사는 1954년 사망, 안성여녀사 유해를 부산 영도 청학동에 안장한 후손들은 1974년 부산 대연동으로 이사가면서 현재의 부산 용호동 천주교회묘지로 이장했다...
1960년 권계선씨가 큰아들을 찾아 조선으로 가면서 김영금씨에게 "앞으로 기회가 되면 꼭 너의 피붙이들을 찾아라. 어느때인가 안중근후손이라고 너희들을 찾을때가 있을것이다. 하지만 안중근의 후손이라고 과분한 요구를 제출해서는 안된다."고 부탁했다고한다. 모든 항일운동가의 후손들이 대개 그러하듯 이들 가문도 가난의 늪에서 허덕이였으며 중국, 한국, 조선, 러시아, 미국, 일본 등 세계적인 리산가족이 되여 오래동안 서로의 소식을 모르고 살았다. 2005년 우연한 기회에 외삼촌인 권헌씨의 일가족을 찾으면서 김영금씨는 피의 소중함을 알았다고 한다. 외숙모인 오항선(당시95세)씨는 60여년만에 중국 흑룡강성 벌리현에서 헤여졌던 '넙쭉이 언니'(권계선씨의 별명)가 살아왔다며 기뻐했다는 말을 하면서 김영금씨는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2005년 한국 방문시 부산 남구 용호동 천주교 교회묘지에 안장돼있는 외할머니-안성여녀사의 묘를 찾아갔는데 너무 초라했다고 말하는 김영금씨는 대우나 보상을 위한것은 아니지만 한국의 학계나 정부에서 안성여녀사에 대한 자료를 확보하지 못해 공정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것이 아쉽다고 했다. 안중근 의사 가문은 40여명이 항일운동에 투신했다. 우리 민족 항일사의 축소판인 셈이다.그러나 이들 가문의 항일운동에 관한 연구는 안중근의사와 남동생 안정근, 안공근, 사촌들인 안명근, 안경근, 조카 안봉생, 안춘생등 11명에 그치고 있다. 안중근의사의 친녀동생인 안성여녀사의 행적이 전무한것이다. 전문가들은 안성여녀사의 항일운동을 비롯해 총체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안성여녀사의 항일운동 기록을 밝혀내는 것은 안중근 가문의 항일운동사와 련결된다는 점에서 력사적 중요성을 갖는다고 피력했다.
안중근의사 순국 99주년(3월26일)을 맞아 한국 안중근의사숭모회(회장 황인성)에서 행사 참여 초청장을 받았지만 신체상황으로 갈수 없어 무척 유감이라는 김영금씨는 래년 순국 백주년 기념식에는 만사를 제쳐놓고 꼭 참여할것이라며 외할아버지(안중근의사)는 자신들의 정신적기둥이라고 강조했다.
/ 안중근의거 백주년 기념행사 특별취재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