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가 외교의 실패로 국가의 짐이 되는 경우가 있다. 과거 조선의 선조가 그랬고,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도 이에 해당한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지금은 감옥에서 국민의 심판을 기다리는 처지가 된 윤석열 전 대통령도 부적절한 '대만 발언'으로 중국과의 갈등을 초래했었다.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일본 총리의 대만 발언은 시점과 내용 모두가 부적절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 7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자신의 대만 유사시 자위대 집단자위권 발동 발언에 대해 "조심은 하겠지만 존립위기 사태에 해당 시 집단자위권 행사가 가능하다는 발언 철회는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대만 유사시 일본이 군사 개입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공개적으로 밝힌 것이다.
다카이치 총리의 발언은 매우 부적절했다. '하나의 중국'은 국제법과 국제 규범으로 명확하게 확립된 원칙이자 국제 질서이다. 국제 평화와 역내 안정에 대해 책임이 있는 일본의 총리가 이 원칙을 거스를 수는 없는 것이다.
필자/권기식 한중도시우호협회장(서울미디어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
발언 시점도 부적절했다. 다카이치는 지난 10월 31일 경주 APEC에서 중일정상회담을 하고 돌아가 일주일만에 비신사적인 방식으로 대중(對中) 갈등을 촉발했다. 앞에서는 선한 미소로 우호를 이야기 하고 뒤에서는 비수를 꽂는 악의적인 이중 외교의 전형적 행태라는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다카이치 발언에 대해 중국은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경제와 외교 등에서 최대한의 대일(對日) 압박을 하고 있다. 최대 규모이던 중국 관광객과 유학생이 줄고 일본 상품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중국 시장에서 확산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5천500억달러 규모의 대미(對美) 투자로 어려워진 일본 경제가 더 어려운 상황이 될 것으로 분석한다.
다카이치는 극우 정치의 상징이었던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를 추종하는 우파 정치인이다. 아베의 대외 정책을 모방하고 싶은 마음이 이번 발언의 배경이 된 듯 하다. 그러나 그녀가 간과한 것이 있다. 아베 전 총리 집권 당시와 정치외교 및 경제 환경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다카이치는 연립정부라는 취약한 권력지형 위에서 총리직에 오른 것이고, 중국의 대외적 위상은 과거에 비해 크게 신장됐다. 일본도 어제의 일본이 아니듯 중국도 어제의 중국이 아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인정했듯이 이제 중국은 미국과 맞서는 유일한 강대국이자 G2인 것이다.
다카이치 총리는 궁지에 몰렸다. 중국이 원하는 대로 발언을 철회하면 정치적 기반이 무너질 것이고, 그대로 밀고 가자니 일본의 외교ㆍ경제적 피해가 막심한 진퇴양난의 상황에 놓인 것이다. 내심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 위기 상황에서 자신을 구해줄 것으로 기대한 듯 하다.
그러나 트럼프는 냉정했다. 중국과 무역합의를 이룬 마당에 일본 때문에 미중 관계를 다시 악화시킬 필요가 없다는 판단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월스트리저널(WSJ)은 지난 26일 미국과 일본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트럼프 대통령이 전날 다카이치 총리와의 전화 통화에서 대만 문제와 관련해 “베이징을 자극하지 말라”고 조언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에게 SOS를 쳤으나 훈계만 들은 꼴이 된 것이다. 비즈니스 맨 출신인 트럼프를 이념주의자로 착각한 오판은 외교적 망신으로 되돌아왔다. 다카이치는 5천500억달러라는 최대 규모의 대미(對美) 투자를 하고도 중일 갈등에서 트럼프의 지지를 얻어내지 못했다. 한마디로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중일 갈등에서 이재명 한국 대통령의 실용외교와 현명한 처신이 돋보였다. 이 대통령은 지난 24일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가 중국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즉답을 피하고 독일의 분단 극복 경험에 대해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실익이 없는 국제 갈등에 끼어들지 않겠다는 전략으로 읽힌다. 반중 정서에 사로잡힌 윤석열 전 대통령이라면 과연 어땠을까?
외교는 국익이 가장 첨예하는 맞붙는 총성없는 전장(戰場)이다. 국익 앞에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 이재명 대통령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아는 것을 다카이치 일본 총리는 모르고 있다. 그 결과는 일본의 국익 훼손과 국민의 피해로 되돌아왔다. 국민에게 폭군(暴君) 보다 더 나쁜 지도자는 혼군(昏君), 즉 어리석고 아둔한 지도자이다.
필자/권기식 한중도시우호협회장(서울미디어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