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일촌은 과거 중공 왕청현위와 하마탕구위의 소재지였던 곳이다. 이 마을은 화려함보다는 진솔함으로, 가벼움보다는 묵직함으로 방문객을 맞이한다. "
왕청현 대흥구진 홍일촌. 화려한 관광지나 트렌디한 카페를 기대하는 이들에게는 다소 지루한 시골마을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마을은 화려함보다는 진솔함으로, 가벼움보다는 묵직함으로 방문객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다. 백년고목이며, 독일식 로교회며…
김백문의 사적을 해설하는 임국영.
“여기 홍일촌은 과거 중공 왕청현위와 하마탕구위의 소재지였던 곳입니다. 김상화, 김백문, 리광, 김은식 등 수많은 영렬들이 용솟음쳐나온 곳이죠.” 길림왕청애국주의교양중심 해설원 임국영이 펼쳐보이는 홍일촌의 항일력사이야기이다.
◆강철같은 혁명가, 김상화
“저 느릅나무는 ‘상화수’라고도 불립니다.”
임국영은 마을에 우뚝 선 느릅나무를 가리켰다. 나무 아래에는 ‘김상화 렬사 희생지’ 기념비가 세워져있었다.
십진가 <김상화의 노래>.
“1931년 2월 5일, 김상화 렬사가 바로 이 나무에 효시되였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고작 31세였죠.”
김상화(1900─1931)는 연길현(현 룡정시) 후동촌에서 태여나 1924년 왕청현 하마탕 대방자촌(현 대흥구진 홍일촌)으로 이주했다. 1930년 7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그는 1930년 9월에 중공 하마탕구위 서기로, 1931년 1월에 왕청현당위 제2임 서기로 임명되였다.
홍일촌당성교양관내에 전시된 김상화 렬사의 글.
“1931년 2월 2일, 김상화 서기는 하마탕 대방자촌에서 북하마탕당지부 서기 한영호와 회의를 하던중 일본군 토벌대에 포위되였습니다.”
체포된 김상화는 쇠고리로 엄지손가락을 옭아묶여 매달린 채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쇠고리에 묶인 두 손가락은 살이 벗겨져 뼈가 드러났고 피가 줄줄 흘렀지만 그는 끝내 당의 비밀을 지켰다.
김상화는 한영호와 자결을 선택하기로 합의했다. 한영호는 작은 칼을 꺼내 목을 베고는 세상을 떠났고 김상화는 같은 방식으로 자결하려다 교도관에게 발각되였다. 목이 베여져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던 그는 적들이 자백하라고 한 종이에 ‘나와 한영호는 공산당원이고 나머지는 모두 무고한 백성이다. 너희들은 즉시 그들을 석방해야 한다. 혁명은 결국 성공할 것이다!’라고 썼다.
홍일촌력사관 전시물.
“1931년 2월 5일, 적들은 김상화와 한영호의 목을 작두로 베고 이 느릅나무에 머리를 매달았습니다. ‘공산당을 따르는 자는 모두 이 꼴이 된다.’며 위협했죠.”
하지만 이 잔인한 행위는 오히려 마을사람들의 혁명의지를 더욱 굳건히 했다. 사람들은 눈물로 김상화의 유체를 수습했고 후에 그의 업적을 기리는 ‘십진가’를 만들어 불렀다.
“1954년 10월 6일, 중앙인민정부는 김상화를 혁명렬사로 추인했습니다. 2007년에 왕청현에서는 김상화 렬사릉원을 새로 건설했고 2017년에는 홍일촌당성교양관에 그의 사적을 전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임국영이 이같이 소개했다.
◆항일의 꽃, 김백문
“이제 우리는 김백문 렬사의 생가를 둘러보겠습니다.”
임국영은 마을 한편에 자리한 전통가옥으로 안내했다. 1930년대 조선족 가옥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이 집은 지금도 당시의 혁명정신을 고스란히 전하고 있었다.
“김백문(1918─2005)은 바로 이 마을에서 태여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반일혁명가였고 오빠 김은식은 왕청현유격대 정치위원이였습니다.”
김백문의 가족은 모두 혁명에 헌신했다. 아버지는 그녀가 세살 때 적에게 살해되였고 오빠는 24세의 젊은 나이에 희생되였다. 어머니와 올케도 혁명의 길에 들어섰다가 목숨을 잃었다.
“1930년, 12살의 김백문은 아동단에 가입했습니다. 총명한 소녀였던 그는 소식 전달과 유격대 이동 지원에서 뛰여난 능력을 보여 ‘적의 기마대를 릉가하는 소녀’라는 별명까지 얻었죠.”
임국영은 김백문의 혁명활동을 생생하게 설명했다. 1931년초에 김백문은 공청단에 가입했다. 낮에는 고향사람들을 도와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전단지를 뿌리고 표어를 붙이고 편지를 나르고 보초를 서는 등 솟아오르는 열정으로 혁명 활동을 이어갔다. 1932년 가을, 반역자의 밀고로 체포되였으나 탈출에 성공했고 1935년 5월에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에 합류해 본격적인 항일전사가 되였다.
1937년 7월, 김백문은 항일장령 리조린과 결혼했고 해방 후에는 각종 요직을 거치며 국가 건설에 기여했다.
◆홍일촌의 현재와 미래
“지금 앞에 보이는 건물은 백년 력사를 지닌 독일식 교회입니다. 지금은 촌력사관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로교회당을 개조하여 만든 촌력사관에는 홍일촌의 발전력사가 담겨진 물품들이 전시되여있다.
홍일촌력사관.
임국영은 마을의 변모를 설명했다.
“홍일촌은 ‘한개의 기념비, 두개의 박물관, 한개의 옛집’이라는 독특한 당성교양 시스템을 갖추고 있습니다. 김상화 렬사릉원, 당성교양관, 촌사관, 김백문 생가 등이 그것이죠.”
홍일촌력사관 내부.
홍일촌은 2020년에 제2기 전국 향촌관광중점촌과 전국 홍색관광발전 전형사례 60선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2021년, 홍일촌당성교양기지는 성당위, 성정부에 의해 성급 애국주의교양기지로 명명되였다.
홍색관광은 마을 경제에도 활력을 불어넣었다. 촌민들은 직접 재배한 유기농 남새와 토종닭으로 방문객들을 대접하고 빈집을 민박으로 개조해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
홍일촌력사관에 전시된 옛 물품들.
홍일촌력사관에 전시된 옛 물품들.
홍일촌력사관에 전시된 옛 물품들.
◆력사를 잇는 마을
“력사가 중요한 것은 단지 과거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력사는 오늘의 우리가 존재하는 근본이기 때문이죠.”
임국영의 말이 마음에 와닿았다. 홍일촌은 살아있는 력사 교실이자 혁명 선렬들의 정신을 이어가는 현장이다.
홍일촌은 시대의 흐름 속에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며 항전력사의 소중함을 전하고 있다. 성장보다는 성숙을, 량보다는 질을, 속도보다는 내실을 추구하는 마을이다. 이 작은 마을이 간직한 위대한 항전정신은 앞으로도 수많은 방문객들의 가슴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출처:연변일보
편집:김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