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계순(녀) 동지는 1914년 11월에 길림성 화룡현 덕신사 금곡툰의 한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리계순은 14살에 이 마을의 사립학교에서 공부했는데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하고 늘쌍 학교에서 조직하는 문예대에 참가하여 반일투쟁을 선전하였으며 아동단을 조직하여 마을에서 보초를 서주었다. 그는 비밀교통원으로 활약하면서 부근의 마을에 내려 가 반일선전을 하고 일본제국주의 침략죄행을 폭로하였다.
1932년 여름, 일본침략자들은 화룡현 유격구에 대규모적인 ‘토벌’을 감행했다. 당조직은 놈들의 체포를 피면하기 위해 리계순을 어랑촌유격근거지에 파견하여 부녀사업을 하도록 했다. 그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부녀회조직을 재빨리 묶어 세웠고 아동단원들을 발동하여 혁명전사들에게 물을 끓여주거나 밥을 지어주고 옷을 씻어줌과 동시에 탄약을 운반하고 부상병들을 간호해주는 등 많은 사업을 했다. 이리하여 그는 1933년 5월 열아홉살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7년 봄에 리계순은 장백현 흑싸재골 밀영에 파견되여 항일련군 제2군 6사 8련에서 후방사업을 했다. 그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고 저녁 늦게 자면서 부상병들을 위해 국을 끓여주고 약을 갈아주고 똥오줌을 받아냈으며 또 밥을 짓고 옷과 양말을 기워주었다.
1937년 12월 리계순은 생명위험을 무릅쓰고 눈길을 헤가르며 식량을 구하러 떠났다가 일본놈들에게 붙잡혔다. 1938년 1월 잔인무도한 일본놈들은 리계순동지를 살해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겨우 24세 밖에 안되였다.
1972년 12월, 장백조선족자치현인민정부는 리계순렬사의 유해를 장백진 탑산기슭에 이장하고 비석을 세웠다. 장백현의 여러 민족 인민들은 해마다 청명절이면 이 곳에 찾아와서 성대한 기념모임을 가졌다.
1988년 조선 로동당 및 정부는 리계순렬사의 유해를 조선 평양시 대성산혁명렬사릉에 이장했다.
출처:길림신문
편집:김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