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강신문=하얼빈) 흑룡강성 한랭지역 흑토벌의 벼농사 얘기는 자연히 조선족과 떼여놓을 수 없다.조선족들의 가장 큰 공헌은 바로 한랭지역의 벼농사에 대한 기여이다. 조선족들은 동토에 논을 만들고 씨앗을 뿌려 한랭지역에서 흰 쌀이 쏟아져 나오는 신화를 창조했다. 조선족들은 흑토벌 벼농사의 개척자로 기록됐다.
흑룡강성의 벼농사 개척자는 조선인으로 기록됐다. 일반적으로 흑룡강성의 벼 조기개발은 당시 오상에서 시작된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논에 선녀가 내려왔나. 삼총사의 출현으로 황금 논밭이 더욱 빛난다. /특별취재팀 한동현 기자(자료사진)
흑룡강성농업과학원의 유명한 장실(张失) 벼전문가는 ‘흑룡강성 벼’라는 책에 ‘오상시의 벼농사는 1895년 시작됐다’고 적었다. 녕안시의 벼 조기개발은 1897년으로 기록됐으며 역시 길림성으로부터 전파된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당시에 "쌀농사는 조선족이 짓는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오늘에 와서 상업성 때문에 서로 자기 지역에서 벼농사를 더 일찍 시작했다며 ‘원조’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학자인 길림성인대 상무위원회 부주임 고 리정문은 1981년 발표한 조사보고 ‘동북의 벼농사’는 글에서 동북에서 제일 처음으로 벼농사를 시작한 곳은 길림성 통화현 하전자(下甸子)라고 밝혔다. 1870년 김씨 조선족 농민이 조선에 가서 벼씨 몇근을 사가지고 와서 해볕이 잘 쪼이는 양지쪽 내가에다 논 두어바닥 풀고 벼씨를 뿌렸는데 가을에 벼가 잘 여물었다고 적었다. 이것이 동북의 벼농사 ‘원조’라고 밝혔다. 연변대학 리광일 교수 역시 동북지역에서 제일 일찍 벼농사를 지은 곳은 길림성 통화지역이라고 밝혔다. 단 그 년도가 1875년이라고 밝혀 년도 상에서 다소 차이가 났다.
흑룡강성의 벼농사가 길림성으로부터 전파된 점을 감안할 때 오상시의 벼농사가 1895년 시작됐다는 것이 더 사실에 접근하는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40여년간 흑룡성 조선족 력사를 연구해온 고 서명훈(사진. 1931년~2016년 10월)할빈시민족종교사무국 부국장은 생전 인터뷰에서 흑룡강성의 조선족들의 이주경로와 벼농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흑룡강성의 동포들은 3갈래 경로를 통해 이곳에 정착했습니다. 첫번째 경로는 일제강점기때 조국을 떠나 이곳으로 살길을 찾아 혹은 독립운동을 위해 이곳에 정착했습니다. 두번째는 러시아 극동지역에서 이곳으로 밀려들었습니다. 세번째는 길림성, 료녕성에서 들어왔습니다.
지난 20세기 20년대 길림성의 연변지역과 길림지역, 흑룡강성 수전의 100%, 통화지역의 85%, 료녕성 개원지역 수전의 90%, 심양지역 수전의 85%, 무순지역 수전의 80%, 단동지역 수전의 70%를 조선족농민들이 개척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이처럼 조선반도에서 이주한 조선족 농민들이 전반 동북 한랭지역의 70% 수전을 개척한걸로 사료에 나옵니다.
오상시 민락벌에서 무더운 삼복철에 농민들이 손김을 매고 있다. 유기농쌀을 생산하기 위해 농약을 살포하지 않고 인공제초를 한다. / 특별취재팀 한동현 기자(자료사진)
그 시기에 주요하게는 저습지, 황무지 등 한전 농사를 못하는 곳을 개척했지요. 처음에는 민국 정부에서 조선사람이 토지를 개척하지 못하게 했어요. 입적하지 못한 사람은 농사도 짓지 못하게 했어요. 해방이 되자 토지개혁을 시작했거든요. 토지개혁을 시작해서 각 지역에서는 조선족한테 한족과 마찬가지로 토지를 분배했는데 그 때는 정책이 조금 달랐어요. 빈강지구나 삼강지구에서는 토지는 줬지만 소유권은 주지 않았어요. 목단강지구만은 그때는 똑같이 한족과 나눠주고 토지 소유권도 주었어요. 이래서 우리 조선족 농민들이 1947~1948년도 초에 토지의 주인이 되기 시작했지요.
당시 도시의 입쌀 공급은 기본상 조선족이 했고 한족들은 거의다 자기 식량을 해결하는 수준이였습니다. 조선족 농민들이 국가에 징구량을 많이 바쳤는데 도시 주민의 입쌀 공급은 조선족이 했다고 할수 있습니다”
풍작을 거둔 한 농민이 환한 모습으로 가을걷이를 하는 장면이 렌즈에 포착됐다. /특별취재팀 한동현 기자(자료사진)
새중국 건국후 흑룡강성의 벼농사면적이 급격히 늘어나던 시기에 조선족 간부들이 벼생산과 수리건설을 진두지휘하며 생산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흑룡강성 농업청 생산처(후에 농업기술보급소로 변경) 최광일 부처장(별세)이 1980년 초에 흑룡강성의 벼생산을 지휘한것으로 알려졌다.
그후로는 남병원 총농예사(별세. 부청급)가 쌀농사 관련 정책 제정에 깊이 관여했다. 농기계구매 보조, 수전개발보조, 징구량임무 감소 등 정책을 펴내 흑룡강성의 수전개발에 힘을 실어주었다.
또한 조선족들이 많은 한족들과 교류하면서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는데 큰 공헌을 한것으로 인정 받고 있다.
쌀이라는 중국어 ‘米’를 뜯어보면‘八十八’(88)가 되는데 농민의 손이 88번 닿아야 쌀이 생긴다는 뜻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쌀이 마지막 절차를 거쳐 도정공장에서 나온다. 도정한 쌀을 진공포장하고 있다. /특별취재팀 한동현 기자(자료사진)
다년간 흑룡강성농업기술보급소에서 부소장으로 사업했던 한족 장홍도(张洪涛)씨는 ‘조선족발전 연혁 및 공헌’이라는 책을 보여주며 조선족의 벼농사 공헌에 대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려창원 동지가 쓴 이 책에는 흑룡강성의 벼농사에 공헌한 43명의 농민이 언급 돼 있는데 그중에는 특별하게 유명한 조선족 동지가 39명이나 기록돼 있습니다.조선족 동지들은 광범한 농민이든 과학기술자든 종자 방면에서 매우 큰 기여를 했습니다”
다년간 흑룡강성농업개발판공실에서 사업했던 최화동주임은 조선족의 벼농사 공헌을 3가지로 개괄했다.
흑룡강성 오상시 산하진 오향농민합작사에서 쌀을 가공하고 있다. /특별취재팀 한동현 기자(자료사진)
첫째는 조선족들이 황무지, 습지 등 한족 농민들이 개간못하는 버린 땅을 개간해서 논밭을 만든것이다.
둘째는 조선족들이 과학적으로 농사 짓고 수전 기계화를 제일 먼저 보급해 생산량을 증가한 것이다.
셋째는 국가에 징구량을 많이 바쳤다. 건국 후부터 70년대말까지 조선족 농민들이 일인당 국가에 바치는 징구량 비중이 높았는바 공헌이 크다.
이처럼 눈물겨운 조선족들의 한랭지역 쌀농사 공헌은 마멸할수 없으며 중국의 근대사와 조선족 이주 150년 력사에서 영원히 빛날 것이다.
/특별취재팀 리수봉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