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려순감옥에서 안중근의 영용한 투쟁의 력사적작용
일본의 한국침략과정의 돌출한 특점은 "동양평화 수호", "한국독립을 보호", "한국의 진보를 촉진" 등 위선적 구호를 내건것이다. 1908년 2월, 이등은 한국원로들에게 "본인은 한국을 부축하고 유도함을 목적하며 한국의 멸망을 기대하지 않는다. 한국을 위해 걱정하고 최선을 다한다, 한국을 위해 지사인인이 되려 한다."고 말하였다.
여기서 이등을 대표로 한 일본 고위통치자들이 배후에서 한국침략을 밀모한 실화를 보기로 하자.
일찍 1871년, 이등박문, 야마가타 아리토모(山县有朋) 등은 "한국정복론"을 제기하였다. 1890년 12월 야마가타 아리토모수상은 제국의회의 연설에서 "아국의 리익초점은 조선에 있다."고 하였다. 1894년 7월(갑오전쟁 전)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상소문에서 "부산, 의주간의 도로는 동아대륙으로 통하는 길이며 나중에 중국을 횡단하여 인도까지 이르는 길임에 틀림없다."고 하였다. 1909년 4월 10일 가쓰라다로(桂太郎)수상과 고무라(小村)외상은 비밀리에 이등을 방문하여 "한국에 대해 합병책을 취할수 밖에 없다"는 의견을 제출하였고 이등은 즉시 "완전 동의"를 표시하였다. 동년 7월 6일 일본내각은 적당한 때에 "일한합병"을 추진할데 관한 비밀결정을 내렸다.
안중근은 물론 이등 무리의 비밀결정을 알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언행을 관찰하고 표상에서 본질을 보아낸것이다. 안중근은 이등의 공개언론과 일본신문, 친일파의 공개언론을 들을뿐만아니라 이등의 소행을 수집하고 연구하는데 더 중시를 돌려 이등의 열다섯가지 죄목을 귀납하였다.
그렇다면 안중근이 렬거한 이등의 죄행은 사실에 부합되는것인가? 80년이 지난 1982년 일본 동경변호사협회 부회장 가노다꾸미(鹿野逐见)는 유명한 장편론문《안중근무죄론》을 발표하였다. 론문의 결론은 안중근이 렬거한 이등의 15조 죄목 중 제15조 이등이 천황의 부친인 태상황을 시해했다는 죄목이 틀린것 외 나머지 14조는 이등의 행위이며 일본국의 행위이다. 때문에 "안중근의 행위가 무죄임을 믿으며 본 사건의 소송은 응당 페기해야 한다."였다. 나카노 다유우(中野太雄)는 1982년 발표한《력사와 심판》에서 안중근이 이등을 격살하였는데 "피살자유죄"라고 주장하였다. 당년 일한합병문안을 작성한 구라치는 30년후 력사진상 증언에서 "합병은 곧 침략이며 이등은 한국을 합병한 주모자이다"라고 하였다. 력사사실은 객관존재하는것으로 왜곡하고 부인할수 없다. 누군가 왜곡하고 위조한다면 잠시 사람들을 속일수 있을지 몰라도 언젠가는 꼭 력사의 진실을 회복할수 있을것이다.
상술한 내용을 종합하면 안중근이 려순감옥에서 진행한 영용한 투쟁이 지닌 력사적작용을 귀납할수 있다. 첫째, 안중근이 할빈에서 이등을 격살한것은 그가 "할빈에 와서 전쟁을 개시"한 "독립전쟁의 일부분"으로 세계를 진감하는 작용을 하였다. 안중근이 려순감옥에서 이등의 죄행을 폭로하고 성토한것은 "할빈 전쟁 개시"의 연속으로 할빈의거의 정당성을 유력하게 론증하여 다시한번 세계를 진동시켰다. 둘째, 려순감옥에서의 영용한 투쟁을 거쳐 세인들로 하여금 안중근을 다시 인식하게 해주었다. 안중근은 애국열정이 높은 용사일뿐만아니라 정치적으로 성숙하고 지용이 겸비된 장군이며 품격이 고상한 애국자와 견정불굴의 민족영웅이고 1910년 이전 세계 피압박국가에 나타난적 없는 위인이다. 공판이 끝난후 영국변호사 더글러스(德克勒士)는 안병찬 변호사에게 "내가 세상의 큰인물을 많이 만났고 중대한 재판도 많이 겪었지만 안중근 같은 인물은 처음 보오. 앞으로 세계 각지로 다니면서 그를 선전하겠소."하고 말하였다. 셋째, 안중근의 영용한 사적을 통해 세인은 처음으로 대한민족은 문명하고 용감하고 애국심이 강한 민족이며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임을 알게 되였다. 넷째, 안중근의 영용한 사적과 고상한 애국주의정신은 동아시아인민의 정기를 고무하였고 중한인민이 련합하여 일제침략세력을 반대하는 위대한 투쟁을 촉진하였다. 주은래는 중일갑오전쟁후, 본 세기초, 안중근이 할빈역에서 이등박문을 격살한 때부터 중조 량국인민이 일본제국주의를 공동반대하는 투쟁은 시작되였다고 평가하였다. (196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