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정협 사업의 개척자
드디어 그녀는 다시 밝은 해빛을 볼 수 있었다. 1972년에 출옥한 그녀는 1973년 5월 다시 하얼빈시제1도구공장 혁명위원회 부주임직을 담임하게 되었다. 그해 6월에는 흑룡강성총공회 제4기 부주석직을 담임, 그후로 연이어 제5기 부주석과 당조 부서기 직을 담임했다.
총공회 부주석으로 있는 기간 그녀는 기술골간들이 역할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흑룡강성기술협력위원회를 설립, 친히 이 위원회의 주석직을 담임하고 이름난 노력모범인 소광명 등과 함께 사업하여 기술혁신에서 많은 중요한 성과들을 이룩했다.
또한 그해 중화전국총공회 제9기대표와 집행위원으로 당선되었으며 1979년에는 제5기 전국정협위원으로 당선되었다.
1973년부터 1982년까지의 기간 리민은 “문화대혁명”으로 인한 기업의 혼란된 국면을 바로잡기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1977년부터는 기업의 민주화관리에 전신의 힘을 다했다. 그녀는 기업관리의 선진적 경험을 보급하고 기술혁신을 틀어쥐여 흑룡강성 전 성의 공회사업을 촉진하였고 생산력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1982년 11월부터 1987년, 리민은 흑룡강성 제5기 성정협 부주석 겸 통전부 부부장, 성민족사무위원회 주임, 당조서기, 중국공산당 흑룡강성 제4기 후보위원, 제5기 성위 위원 등 직무를 담임했다. 그녀가 흑룡강성민위에서 사업하던 기간, 흑룡강성민족간부학원, 민족연구소와 소수민족경제발전무역회사를 설립했었고 흑룡강성 각 소수민족의 단결을 추진하였고 민족경제와 민족교육의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1987년부터 1993년까지는 제6기 성정협 부주석 겸 성정협 제안위원회 주임, 민족종교위원회 주임 직을 맡았다. 이 기간 리민은 성정협 기관의 동지들을 거느리고 기층에 심입하여 개혁개방중 어떻게 정치협상을 하고 민주감독을 할것인가에 대한 조사연구를 진행하였으며 건설적인 의견들을 제출하였다.
황금같은 여가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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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북항일련군정신선전대를 이끌고 항일련군 유적지를 찾은 리민 여사. |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으로,또 성급지도자라는 우월한 조건으로 그녀는 만년을 편히 보내도 되었다.하지만 그녀는 솟구치는 샘처럼 언제나 정열에 차넘쳤다.누구도 그녀의 입에서 “힘들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으며 그 누구도 그를 불치의병에 걸린 환자로 보지 않았다.
오랜 감옥생활은 그녀에게 무서운 병을 남겨놓았었다.1974년에 상해에서 직장암수술을 받은 그녀는 비닐관으로 대변을 체외에 배출해야 했다. 함께 수술을 받은 여러 직장암 환자들이 한달만에, 1년만에,3년을 못넘기고 모두 저세상 사람으로 되었다.의사는 그녀에게 몸관리를 잘하면 3년은 살 것이라고 했다.
그녀에게는 이 3년이 너무나도 소중했고 짧았다.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그녀는 서둘러 ‘동북항일련군노래집’이라는 책을 만들어냈고 희생된 전우들의 영혼이 머문 유적지들을 찾아 헤맸다.여러가지 외사활동에도 적극 참가했다.여러번 조선을 방문하여 김일성주석의 접견도 받았다.
김일성주석은 그녀를 만나 어릴 때 애명을 부르며 반가와 했다.그러다나니 10여개의 3년이 눈깜짝할 사이 쏜살같이 흘러갔다.그녀는 자신이 “상형선고”를 받은 암환자란 것을 거의 잊고 살았다. 과로로 인해 체외로 배출된 대변이 옷을 적실 때만 잠깐 의식하곤 또 금방 잊었다.
이 같이 리민은 퇴직 후에도 쉬지 않고 있다.민족과 여성 아동들을 위해 동분서주하며 여러가지 활동에 적극 참가하고 있으며 2002년부터는 ‘항일련군정신선전대’를 설립하고 동북항일유적지를 찾아다니며 항일련군정신 선전을 위해 황혼을 불태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