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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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열처절했던 전쟁연대에 맺어진 사랑(남편 진뢰 전 흑룡강성 성장과 함께). |
리민은 어릴 때 이름을 봉이, 봉선이라고 불렀고 한때 리명순이라고 부르기도 했었다.
리민의 가족으로는 어머니, 아버지와 오빠, 남동생이 있었는데 남동생은 3세때 홍역으로 죽었고 어머니는 리민이 8세때 병으로 돌아가셨다. 리민은 항일활동에 참가한 아버지와 오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리민이 8~ 12세때 아버지는 구위서기 직을 맡고 있었고 오빠는 항일련군 6군 1사 6련대의 정치부 주임 직을 맡고 있었다.
아버지와 오빠가 혁명사업으로 바삐 보내다보니 8세밖에 안되는 어린 나이의 리민은 자취생활을 해야 했다.밥을 지어야겠는데 부뚜막이 너무 높아 기여 올라갔다가는 기여 내려와야 했다.한번은 야외로 산나물을 캐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외나무다리에서 떨어져 강에 빠져 죽을번 하기도 했었다…
1936년 겨울, 12살난 리민은 동북항일련군에 가입하여 제6군의 선전원, 간호원기관총분대 전사로 삼강평원, 완달산맥, 소흥안령을 누비며 일본침락자들을 무찌르며 용감히 싸웠다.
취사반에서 일할 때였다. 어느날 아침, 전사들이 금방 밥을 먹기 시작했는데 적들이 돌연습격을 해왔다.전사들은 밥을 먹지도 못한채 철퇴하기 시작했다. 리민은 전사들이 미처 먹지 못한 옥수수죽 반통을 잃지 않으려다가 하마트면 적들의 기관총 사격에 명중될번 했다.
1937년, 13살나는 리민은 모아산피복공장에서 군복 만드는 일을 하다가 그해 9월 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했고 11월 모아산피복공장이 후방병원으로 되자 간호원으로 바삐 돌아쳤다.
1938년 14세나는 리민은 리조린장군이 친히 꾸린 교도대에 들어가 군정지식을 학습하였고 그해 9월에 졸업하고 6군 1사의 선전원이 되었다.바로 그해 11월 23일,리민이 소속된 후방병원일군과 부상병으로 구성된 소부대는 보청현 과회산(锅盔山)에서 300여명 적들에게 겹겹이 포위되었다.소부대는 탄약과 식량이 다 떨어진 상태였다. 처음엔 그래도 느릅나무껍질로 기아를 달랠 수 있었다.하지만 후에는 나무껍질 마저 다 먹어버려 지도원은 우라초신(靰鞡鞋)과 류씨 전사의 바지에서 찢어낸 한쪼각 양가죽을 삶았다.이제는 더 먹을 것도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놔뒀다가 이튿날에 먹고 포위를 돌파하기로 작심했다.적들은 밀집된 화력에 의해 돌격해왔다. 박격포탄이 무시로 날아와 작렬했다.류소대장과 마씨 전사가 쓰러졌다. 리민은 피가 흥건히 묻은 마씨 전사의 총을 부여잡고 적들에게 복수의 총탄을 안겼다.이윽고 총알도 수류탄도 다 떨어졌다.
“남산으로 퇴각!”포위를 돌파하고 퇴각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앞으로 달리던 리민은 그만 키넘는 눈구뎅이에 푹 빠져들어갔다.”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금방 퇴각명령을 내리던 책임자의 비장한 목소리와 함께 자지러진 총성이 울렸다.놈들에게 체포되어가는 몇몇 여전사들의 목소리도 들렸다.
(얼른 나가 전우들을 구하자!전우들을 놈들의 손에 그냥 넘길 수는 없다!)리민은 막 눈을 헤집고 뛰쳐나가려다 생각을 고쳐먹었다.이렇게 막무가내로 뛰쳐나가다간 전우를 구하기는 커녕 자신의 목숨도 놈들의 손에 맡기는 신세가 되고 말 것이 아닌가,한 사람이라도 남아서 투쟁을 계속해야지. 리민은 전우를 잃는 것으로 인한 가슴을 오려내는 듯한 아픔을 참으며 놈들의 자취가 멀어지기만을 기다렸다.
황혼무렵, 눈구뎅이에서 기어나온 리민은 거의 동태가 된 몸을 끌고 항일련군부대를 찾아 밀림속을 홀로 헤맸다. 나무껍질을 벗겨 먹고 죽은 쥐도 구워 먹었다.놈들의 추격속에서 그녀는 사흘째 되는 날 저녁에 드디어 부대를 찾게 되었다.그는 전우들과 함께 과회산고지에 돌아와 희생된 전우들의 시체를 묻고 또 다시 혈전의 길에 올랐다……
1938년 음력 섣달 30일, 15세나는 리민은 과회산숙영지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41년 가을, 16세나는 리민은 소련경내의 A영에서 의무지식 학습과 락하산부대 훈련을 받았으며 간호원소대의 당소조장직을 맡았다.
1942년 소련 A영 국제려 교통영에서 무선전통신업무를 배웠고 당지부 부서기직을 맡았다.
1943년 11월 5일 그녀는 A영에서 진뢰동지(전 흑룡강성 성장)와 결혼하고 1945년 8월 소련홍군과 함께 동북으로 귀환했다. 당시 진뢰동지의 영도하에 수화중심현위에서 정부건설과 당건설, 군대건설사업을 했으며 수화 현위, 현정부가 설립된후에는 지식인, 여성사업에 몰두했다.
1948년에는 하얼빈외국어단과학교에서 학습한 후 북안현 단위 부서기로 전근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