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 하나로 채워진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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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녀시대의 리민 여사. |
리민은 1924년 11월 5일 흑룡강성 탕원현의 오동하촌(당시는 라북현에 속했음)에서 태어났다. 1928년 광주폭동이 실패한 후 최용건은 공산주의자들과 지식인들을 이끌고 동북으로 이동했다. 그들은 우선 농촌에서 학교를 세워 공산주의 사상과 10월혁명의 승리를 전파하고 선전했다.당시 오동하는 조선족이 비교적 많이 집중된 곳이었다. 그들은 이곳에 원래 있던 ‘라흥학교’를 ‘송동모범학교’로 개명하고 학생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당시 농민들의 생활은 매우 어려웠다.소출이 낮은 데다 지주의 극심한 착취와 조세수탈로 농민들은 기아선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그런데 무료로 학교에 다니게 한다니 누가 싫다고 하랴. 가난한 집 애들은 너도나도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6세나는 리민도 ‘송동모범학교’의 학생이 되었다.
“학교에 입학해서 제일 처음으로 배운 것이 ‘레닌탄생가’였습니다. 이 노래는 나의 유년에 깊은 인상을 남겼고 또한 나의 일생의 분투목표와 방향을 결정해준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볼가강변 농가에서
붉은 레닌 나셨다네
1870년에 4월 10일 그때라
아버지는 웰리아노브
어머니는 마리아
꽃과 같은 품안에
붉은 레닌 나셨다네
…
청청한 목소리에 또렷한 발음,한 마디도 틀림없이 노래 박자에 따라 몸을 약간씩 흔들며 부르는 그녀의 눈빛은 또다시 유년으로 돌아간듯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고 가난한 사람이 구성을 만난 듯한 감격에 젖어있었다.
“내 기억속의 최용건은 대단히 위대한 분이십니다. 그는 북만지구 항일투쟁 선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그녀는 80년 전 역사를 거슬러 더듬어 갔다
리민은6세의 어린 나이에 벌써 세계 인구의 95%를 차지하는 무산계급, 헐벗고 굶주리는 근로자들과 농민들이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고 공산주의의 실현을 위해 평생토록 분투할 것이라는 하나의 신념이 마음속 깊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당시 여자애들은 목숨이 벌레보다도 못했다고 말하는 그녀, 그런데 혁명대오에서는 그 누구나 당당하게 사람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그녀는 학교에 다니면서‘레닌주의아동단(후에는‘항일아동단’으로 개명)’에 들었고, 그후에는 항일구국 선전대에 참가하여 항일투쟁을 위한 모금연출에도 적극 참가하였으며 위험을 무릅쓰고 삐라를 살포하기도 했다.
“혁명이 어려운 고비에 처했을 때 변절자가 나타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버텨낼 수 있은 것은 바로 이 공산주의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였습니다. 이러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침략자를 쫓아낼 수 있었고 이러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에 해방 후 열심히 공부하고 일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오직 그래야만 인민과 희생된 열사들에게 미안하지 않다고 시시각각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결혼도 안했고 자녀도 없습니다. 희생된 그들에게 미안하지 않도록 하는 길은 오직 하나, 우리가 그들이 피로 바꿔온 이 강산을 잘 건설하고 후대들에게 그들의 공적과 정신을 널리 선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오늘날 ‘항일련군정신선전대’를 설립하고 항일련군정신을 선전하기 위하여 뛰어다니는 원인이라 하겠습니다.”